▲ 독립운동가 백포 서일
최근 백포 서일(白圃 徐一)이 주목받고 있다.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 당시 김좌진 장군은 그의 부하였다.

서굉일 한신대 명예교수는 “서일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은 애국자”라며 “자신의 전 생애를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바쳤다”라고 평가했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한국사회에서 건국의 지표로 안중근을 본다. 그러나 당시 상해임시정부가 공식 인정한 군대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이다”라며 “그 군대를 이끈 사람이 백포 서일이다. 마땅히 건국의 총사령관으로서 지표”라고 말했다.

지난 2009년 12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의 국학연구원(원장 조남호)에서 서일을 주제로 학술좌담회를 마련했다. 이어 2011년 12월 서일기념사업회(회장 서훈)가 <백포 평전> 출판기념회와 한·중국제학술포럼을 개최했다. 이듬해 10월 국학연구소(소장 서굉일)는 정기학술회의 주제로 서일을 택했다.

고조선학회(회장 복기대)는 4월 26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대일항쟁기의 역사적 교훈과 통일안보-백포 서일의 역사관 및 대일항쟁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기사 바로가기 클릭 )

복기대 회장(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은 “백포 서일은 한민족주의 이론적 틀을 확립하고 그 이론을 행동으로 옮겼다.”라며 “당시 암울했던 대일항쟁에 그 길을 열었던 지도자”라고 말했다.

국권회복을 향한 ‘일념’

▲ 서일 총재가 이끌었던 북로군정서의 소총과 탄약, 숨겨놓은 수류탄 사진
서일은 1881년 2월 1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태어났다. 경성군 함일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아동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간도 망명 이후에도 명동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

본격적인 항일투쟁은 대종교인이 주축이 된 1911년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31세의 나이로 단장에 추대된 때부터다.

서일은 대일항전을 위해 사관양성소를 만들어 간부양성에 주력했다. 그 임무를 김좌진에게 맡겨 이범석 등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배출된 사관생들은 대한군정서 군대조직의 근간이 된다. 이들은 청산리전투 등 대일전쟁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서일은 대종교를 중광한 나철의 제자다. 1913년 10월 시교사로 임명된다. 3년 만에 1916년 상교로 승진한다. 1919년 당시 2대 도사교(都司敎)이자 독립운동가인 김교헌(金敎獻)은 서일에게 교통(敎統)을 전수하고자 한다. 서일은 일제와의 전쟁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5년을 유보한다.

신운용 한국외국어대학교 외래교수는 이에 관해 “이는 서일이 국권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대종교와 민족의 미래가 없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며 “이러한 서일의 생각은 국권보다 종교의 이익을 우선하던 일부 세력과는 본질에서 달랐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서일은 삼일철학(三一哲學)을 체계화한 사상가였다. 그는 《회삼경》,《삼일신고강의》,《구변도설》,《진리도설》,《오대종지강연》,《삼문일답》등을 집필했다.

김동환 연구원은 “회삼경은 서일의 삼일사상이 가장 종합적으로 체계화된 글”이라며 “유불선 삼교의 원리인 불교의 묘법, 유교의 역학, 도교의 현리(玄理)를 종합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 청산리전투 직후 기념사진

독립군은 청산리 전투 후 일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령(領) 밀산(密山)으로 이동한다. 여기에서 서일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 10개 부대 3,500여 명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으로 결성된다. 서일은 초대 총재로 추대된다.

그러나 1921년 6월 노령 자유시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는 자유시참변으로 치명적 타격을 받는다. 8월에는 토비들의 습격까지 받는다. 서일은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통감한다.

그는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여 국권을 회복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한국선도의 조식법(調息法)으로 순국한다.

정부는 백포 서일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