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촌 이암 선생의 《단군세기》를 보면 “배달 신시 개천 1565(단기 원년, B.C. 2333)년 10월 3일에, 신인 왕검께서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백명을 거느리고 단목 터에 와서 백성과 더불어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내셨다(至開天千五百六十五年上月三日하야 有神人王儉者가 五加之魁로 率徒八百하시고 來御于檀木之墟하사 與衆으로 奉祭于三神하시니)"는 구절이 있습니다.이것은 단군조선 건국 1565년 전에 환웅천왕이 홍익인간 정신으로 신시 개천을 했고 B.C. 2333년 10월 3일에 단군왕검이 이를 계승하여 홍익인간 정신을 건국이
12월이 되자 갑자기 몰아친 한파에 모두 움츠려 든다. 그러나 서기 1636년 12월은 우리 역사상 가장 추운 겨울이 있었다. 병자호란이 발발 하여 근세조선의 518년 역사상 초유로 왕이 항복을 하였기 때문이다. 1598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ㆍ 무명의 생령이 스러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불과 38년 만에 또 다시 휘몰아쳐온 경천동지의
근화가 계주와 함께 삼산을 밟으러 떠나던 날 나는 진한리에 사는 친구 이명지로부터 카카오 톡을 받았다.“진한리에서 이숙이라는 관광요식업을 하는 여자가 있는데, 자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이상한 생각이 들게 하더군. 혹시 결혼 약속이라도 했다가 헤어진 여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자네가 허락한다면 이 여자와 술 한 잔 하고 싶은데, 진한리에
1637년(인조15년) 1월 30일, 약 400년전 요즘같은 동장군이 활개를 칠 무렵 청의 장수 용골대는 성밖에서 인조의 출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의 상징인 곤룡포 대신 하급관리가 입는 남색 관복차림으로 흰 백마를 탄 모습은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다. 백마조차 주인을 잘못 알아 기우뚱거리고 평소에 거느리던 일체의 의장은 모두 제거한 후 단지 시종 수십 명이 그를 따랐다.그는 지금의 '나'이고 '우리'이다. 나라 잃은 임금이 항복 조인식에 끌려가는 터라 얼굴은 초췌하고 눈은 빛을 잃었다. 서문을 향해
연평도는 몇 년 전 만해도 조기잡이로 파시를 이루었던 섬이다. 남지나해의 먼 바다에서 올라오는 조기떼가 전남 영광의 칠산 앞바다에서 알이 부풀어 오르고 연평도 앞바다에서 알을 쏟고 수정을 하고 치어들이 자라다가 다시 대양으로 나가는 물목이다. 청淸나라로 끌려간 소현 태자를 다시 모셔 오기 위하여 북상하던 임경업 장군이 연평도에 들러서 조기떼를 발견하고, 그때부터 연평도에서는 조기잡이가 시작된다. 그리운 고향으로 향한 회향과 새 생명의 탄생의 섬이 갑자기 포연에 휩싸인 전쟁터가 되었다. 그것도 형제가 형제의 가슴을 쏘는 포격이다.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