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격동의 아시아, 1‧2차 아편전쟁의 결과 청의 수도이자 황제의 도시인 베이징이 서양인에게 활짝 열렸다. 청은 영국을 위시한 서양 제국들에 속수무책으로 패했고,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와 각각 텐진조약과 베이징조약을 맺었다. 조약을 맺은 국가의 서양인은 중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당시 동아시아로 향한 서양인들의 시선은 중국을 넘어 유일하게 빗장을 걸어 잠근 채 어떠한 통상 요구나 조약도 거부하던 조선을 향했다. 종교적 관심 또는 학문적 호기심, 무역 이득에 대한 기대 등 이유는 다양했다.그 시기 조선 조정은
《숙종 시대 문명의 도전과 지식의 전환》(김선희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22)은 ‘문명의식’이라는 관점에서 숙종 대 조선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저자 김선희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는 숙종 시대를 특징짓는 예송(禮訟)과 환국(換局) 정치를 당시 정치적 분화의 표현형으로 보고 그 기저의 문법을 대보단·만동묘(萬東廟)·관왕묘(關王廟) 같은, 전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주목되지 않았던 새로운 정치 공간에서 찾고자 했다. 그리고 이 정치 공간을 운용하는 논리와 이념을 ‘문명의식’이라는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이 책은 조선이
고려대학교(총장 정진택) 민족문화연구원은 1월 24일(월)부터 27일(목)까지 4일에 걸쳐 ‘대전환의 시대, 한국 학문의 미래’라는 주제로 〈제1회 한국학 페스티벌〉을 개최한다.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 개최하는 이번 행사는 포니정재단이 후원하고 국내외 연구자 80여 명이 참여하고, 고려대 백주년기념관과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진행하는 대면 형식과 메타버스를 활용한 비대면 형식으로 동시에 열린다.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민족문화연구원은 코로나19 세계적 유행(팬데믹)으로 인한 대혼란과 격변의 시기에 새로운 한국학 논의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그동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우, 이하 한중연)은 특집으로 전통 미술 중 고려시대 도자 문화에 관한 최근 국내 연구와, 리뷰로 최근 중국 내 한국학 관련 연구 성과에 대한 국내 학자의 리뷰를 게재한 영문학술지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특집호로 6월 1일 발간했다. 이번 호 ‘연구특집’으로는 라는 주제 아래 국내 학자 5명의 논문을 게재하였다.논문 △“Perception of Goryeo Celadon in the Context of th
중국 내 고조선과 고구려 유적지 답사 5일차의 일정은 숙소인 요양빈관 길 건너 맞은편 요양 백탑을 둘러보고 고구려 중심지인 요양시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먼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동경성과 백암성으로 알려진 연주성산성을 살펴보고 심양시 기반산 풍경구에 있는 고구려 석대자산성을 거쳐 고구려 국내성으로 추정되는 철령시 개원 노성으로 이동하여 숭수사탑과 성터를 답사하는 여정이다.호텔(요양빈관)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출발하기 전까지 여유 시간을 활용하여 길 건너 요양 백탑을 보러 갔다. 요양 백탑은 금나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 간행 이후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이 오면 이 책을 대량으로 구입하였다.정조 때 서장관으로 중국에 간 서유문(徐有聞)의 '무오연행록'을 보면 북경 유리창 책(冊) 가게 13곳이 있고, 그 외 두세 곳이 있는데 가게마다 다 우리나라 '동의보감' 고이 책으로 꾸며서 서너 질 없는 곳이 없다고 했다.
2012년 마지막 날 '제야의 종'은 누가 치게 될까?서울시는 올해 ‘제야(除夜)의 종’ 타종행사에 함께 참여할 시민대표로 사회 각 분야에서 희망과 용기를 준 인물 11명을 선정, 오는 31일 종로 보신각에서 33번의 제야의 종을 울린다고 27일 밝혔다.올해 타종인사로는 매년 정례적으로 참여하는 고정인사인 서울시장·서울시의회의장·서울시교육감·서울경찰청장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은 전쟁 전(前) 단계에서 줄곧 명의 전쟁관련 문제에 대한 정책결정자였다. 그는 명군의 조선 파병을 주도하였지만 봉공 실패후 투옥되어 옥중에 사망했다. 석성은 명나라 공부, 예부, 병부상서를 역임하였고 일찍이 만력연간의 3대 전쟁을 주도적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석성은 왜 조선에 대해 우호를 베풀었는가.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