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민족정신광복운동은 단학선원(현 단월드)회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아침마다 공원에서 무료로 지역주민에게 단학수련을 하는 국민건강운동, 둘째 바르게 숨쉬기 운동이란 이름으로 자연보호운동을 전개했다. 단학선원은 전국 3천여 공원에서 무료수련지도를 하는 강사들에게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등 역사단체와 연계해서 역사교육을 하고 이를 통해 민족정신 함양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당시 인식조차 크게 없었던 개천절을 건국기념일, 한민족의 생일로서 전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축제로 만들고자 하는 문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개천축제는 87년 민족정신광복운동을 시작으로 점차 규모가 커져 1996년에는 단학선원과 대전MBC가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에서 1만여 명이 참석한 ‘개천절 한문화 국민축제’를 성대하게 치르게 되었다. 1997년에는 전국 70여 곳에서 20만여 명이 참석한 개천문화축제를 개최했다. 또한 1997년 8월 17일 전국에서 4만5천 명이 참여하여 민간주도 행사로 최대 규모의 광복절 한문화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2002년 개천절에는 전 국민을 붉은 악마응원단 열기로 물들게 했던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전국 10만여 명이 참석한 ‘개천절 경축 2002지구인 축제’를 열었다.

단학선원이 이러한 개천축제를 오랜기간 펼쳐올 수 있었던 바탕은 다름아닌 단학수련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와 정신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뜬 회원들이었다.

▲ 1999년 10월 10일 홍익문화운동연합 및 50여 개 단체 1만 5천여 명의 회원들이 훼손된 단군상을 앞세우고 탑골공원에서 대학로까지 항의 가두행진을 했다.

외환위기의 먹구름이 국민의 희망을 꺾고

1997년 겨울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맞아 많은 기업들이 부도로 쓰러지고 대량 실업사태로 중산층이 무너진 상황에서 나라 전체에 정신적 상실감이 팽배했다. 북한의 기아 상황도 심각해 민족 전체가 좌초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한국이 샴페인을 일찍 터트렸다.”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총체적인 부실국가, 원칙을 우습게 아는 부실국민”이라는 외국 언론의 비난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국민 스스로 자괴감, 절망감에 휩싸여 희망을 잃은 것이었다.

이때 단월드(구 단학선원)의 설립자인 이승헌 총장은 “이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자긍심을 회복하고 종교, 정파, 지역, 빈부, 세대에 관계없이 온 국민을 뭉치게 할 범국민적 단합의 상징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통일기원 국조 단군상 건립을 제안했다.

물론 단군상을 건립한다고 실직문제가 해결되거나 돈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국민이 긍지와 희망을 되찾는 것은 다시 일어서기 위해 필수 불가결했다. 우리 역사에서 고비마다 구심점이 되어 준 것이 바로 국조 단군이었기 때문이다. 수당 전쟁의 선봉에 서며 고구려의 기개와 용맹을 떨쳤던 조의선인, 일제 치하 만주 무장독립군의 구심도 바로 단군이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통일과제를 남겨둔 우리에게 체제를 넘어 남북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유일한 끈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역대정부에서 국민통합을 위해 단군상, 단군성전을 건립하고자 할 때마다 번번이 일부 기독교계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승만 정부 때 경남 밀양 단군성전 건립계획, 1963년 정부의 서울 남산 단군상 건립이 무산되었고 1966년 박정희 정부가 국고 1억 원으로 남산에 단군상을 건립하고자 한 것도 ‘우상숭배’라는 기독교계의 반발로 백지화되었다. 1985년 전두환 정부 때 서울시에서 사직공원 내 단군성전 복원계획을 발표했다가 염보현 시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승헌 총장의 통일기원 국조단군상 건립 제안에 민족정신광복운동을 본격적인 시민운동으로 전개하고자 발족한 홍익문화운동연합(회장 문수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해 나갔다. 단학선원에서도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건립취지를 알렸다.

국민의 긍지와 희망, 평화통일 기원 담아 통일기원 국조단군상 369기 설립

▲ 전국 초・중・고 학교장의 요청으로 학교교정에도 통일기원 국조단군상이 세워져 우리나라 교육기본법 2조에 있는 교육이념인 '홍익인간'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1998년 11월 21일 밀양 동강중학교에 제1호 단군상을 기증했다. 학교장, 교사, 학생, 학생, 주민, 홍익문화운동연합회원, 주민 150여 명이 참석해 축하했다. 처음엔36기를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전국에서 단군상 건립이 차례로 이루어지자 많은 학교에서 기증요청이 쇄도했다. 대다수가 학교장들도 “우리 교육이념이 홍익인간임에도 아이들이 뿌리 없는 교육을 받고 있다.”며 많은 이들이 학교 교정과 공원, 자신의 사유지를 민족정신 교육의 장으로 내놓았다.

홍익문화운동연합 회원들의 자발적인 성금 15억원으로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국조 단군상 기증이 이루어졌다. 1999년 5월 말까지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전국 학교, 공공장소, 사유지 등에 369기의 단군상이 세워질 수 있었다.

1999년 5월 12일에는 부산항을 출발해 바다를 건너 미국 애리조나주 세도나시에도 단군상이 세워졌다. 지금도 ‘5천 년 전에 홍익이라는 평화 정신으로 고대 한국의 국가인 옛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단군’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이곳에 한국민속문화촌이 건립되고 있다.

단군상 70여 기 훼손, 전기톱으로 목 베고 페인트칠,
심지어 대낮에 학생들 앞에서 해머로 파괴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국민적 분노 불러일으켜

당시 전국적으로 훼손된 단군상은 70여기에 이르렀다

단군상 건립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 일부 기독교계로 단군상 건립 반대 및 철폐운동에 나섰다. 언론을 통해 “민족우월주의 내지는 국수주의를 충동한다.”며 단군을 신화에 입각한 우상이고 사이비 종교단체의 우상숭배라고 비난했다. 또한 시위와 기도회, 결의대회를 전국적으로 벌였다.

급기야 1999년 7월 4일 경기도 여주시의 3개 학교에 설치된 단군상의 목이 잘렸다. 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70여 기의 단군상이 훼손되었다. 한밤중에 전기톱으로 목이 잘리고 불에 그슬리고 페인트를 뒤집어쓴 모습이 마치 일제가 독립투사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모습을 연상시켰다. 심지어 영주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대낮에 어린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해머로 단군상을 부수는 만행까지 일어났다.

단군상 훼손 사건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이러한 만행에 대한 국민들이 분노를 불러 일으켰음은 물론 단군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6대 종교 지도자들(기독교, 불교, 천주교, 성공회, 원불교, 천도교)은 1999년 7월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단군상 훼손에 대해 “최근 편협한 신앙이 빚은 충격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며 “단군은 어느 한 종단의 신앙이 아니라 우리 역사와 문화의 뿌리이자 상징”이라고 유사 사건의 재발방지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대 종교계 대표 “단군은 어느 한 종단의 신앙 아닌 우리 역사 문화의 뿌리”

또한 기독교계에서 존경받던 크리스찬 아카데미 이사장인 고(故) 강원룡 목사와 같이 단군상 건립을 민족정신을 세우는 것으로 보고 “단군의 홍익정신과 예수의 사랑은 다르지 않다.”며 적극 이해하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 인사들도 있었다.

단군상을 세운 학교 교장단 284명은 일간지에 성명서를 통해 “통일기원 국조단군상을 교정에 세우자는 제의에 응한 것은 지금이야말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민족의 뿌리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을 심어주겠다는 뜻에서였다.”며 “단군상을 지키는 활동이 또 하나의 3․1운동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2000년 1월에는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최근덕 전 성균관장 등을 공동대표로 민족정기선양협의회가 연달아 일어나는 단군상 훼손과 관련해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 국조를 부정하는 것은 민족과 종교를 혼동하는 행위로써 대단히 부당하며 단군 시조를 구심점으로 남북이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마음을 합해야 한다.”고 7개 항에 걸친 성명을 발표했으며 김수환 추기경도 ‘단군상을 훼손하는 폭력행위에 대한 반대 입장을 당시 박지원 문화부장관에게 전달했다.

1999년 첫 단군상이 섰던 경남지역 홍익문화운동연합 사무실로 주요 방송국 시사고발프로그램(MBC ‘PD수첩’)에서 찾아왔다. 일부 기독교인의 제보로 단군상 건립의 종교성 시비를 취재하러 온 취재진은 방송장비도 제대로 들어올 수 없는 2평짜리 협소한 다락방 사무실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전국에 369기의 단군상을 세운 단체라면 큰 재단과 규모를 예상했던 PD는 민족정신을 살리기 위해 순수한 뜻과 열정으로 일하는 취지를 공감하고 결과적으로 호의적인 방송이 나갔다.

“나는 단군상 철거반장” 일부 기독교 목사, 장로 등 구속

▲ 훼손된 국조 단군상

계속되는 단군상 훼손을 막기 위해 홍익문화운동연합 회원들은 밤마다 짝을 이뤄 학교나 공원 등에서 단군상을 지켰다. 그러나 훼손은 주로 한밤중에 일어나 범인을 검거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예배시간에 “자신이 단군상 철거반장”이라며 구체적인 훼손사례를 무용담처럼 알려주던 영주의 한 목사를 포함 몇몇 광신 목사, 장로 등이 구속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홍익문화운동연합에서는 1999년 개천절에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위해 추진했던 단군상 건립의 취지에 따라 더 이상 훼손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단군상 훼손과 관련된 고소를 취하하기도 했다.

단군상 훼손이 국민적 반감 일으키자 이젠
“단군상을 세운 단체를 빨갱이로, 사이비 종교단체로 선전해 무너뜨리자!” 결의

그러나 통일기원 국조 단군상에 대한 훼손은 계속 일어났다. 일부 기독교(‘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특별위원회 조직인 ‘단군상문제기독교대책위원회’)에서는 이에 그치지 않고 2002년 “단군을 믿으면 죄인”이란 취지의 주일학교 ‘통합공과’를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또한 단군상을 세우거나 도운 단체를 친북좌파단체나 사이비 종교단체로 매도했다. 북한에서 단군을 이야기하니 단군을 이야기하는 단체는 그들 표현에 의하면 ‘빨갱이’란 것이다. 또한 단군에 대한 부정과 단군상의 직접적인 훼손이 국민적 비난을 받자 공격대상을 단군상을 세운 단체로 전환했다.

단군상 훼손에 관여했던 이모 집사가 주동이 되어 전단지(전직 단월드 지도자 모임)라는 안티카페를 열어 설립자와 단월드에 대해 허위정보를 유포했다. 그는 법원에서 무고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사이트는 폐쇄되었다. 국내에서는 불법사이트로 개설할 수 없게 되자 미국, 캐나다, 터키 등 해외서버를 이용해 계속적으로 안티정보를 유포해 사이트 개설과 폐쇄를 반복하고 있으며 지금도 정부주요기관에 계속하여 근거 없는 투서를 하고 있다.

알면서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고뇌

통일기원 국조단군상 건립을 제안한 이승헌 총장은 그가 안고 갈 위험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불교계 원로스님이 신도에게 10억 원 기부를 받고 강원도에 단군전 건립을 추진했다가 일부 과격 기독교계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받은 공격에 대해 조언을 했다. 당시 단학선원 내부에서도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후원을 보류하자는 의견도 일부 있었지만 결국 가야할 길이라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다.

이승헌 총장은 그의 저서 <한국인에게 고함>에서 “단군상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단군상을 세운다면 시대착오적인 국수주의자로 오해받을 뿐만 아니라 종교성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단학선원이 짧은 기간에 급성장하면서 종교성 시비 등의 오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나 단학선원의 발전을 위해서는 단군을 얘기하지 않는 것이 백 번 유익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타협하기에는 나의 내면의 목소리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며 “나는 지금도 국조 단군이 한민족의 건국이념으로 제시한 홍익인간 이화세계 정신이 개인과 민족과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정신이라고 확신한다.”고 밝힌 바 있다.

1998년 단군상 건립운동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국민들에게 단군의 존재와 의미를 되새기게 만들었지만, 단순한 심신수련기관을 넘어 국학운동의 대중적 신호탄이 된 그 사건은 단월드(구 단학선원)에게는 크나큰 고난과 시련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그만큼 단군과 홍익인간이란 단어가 일반 국민들에게는 아직은 멀게 느껴졌고, 일부 기독교에게는 최대의 우상이자 적이었기 때문이다.

코리안스피릿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