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생로병사의 고통과 모든 재난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설산에서 피골이 상접하는 6년의 혹독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이 마음을 깨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 몸뚱이와 몸뚱이가 일으키는 모든 고통이 참으로 공(空)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몸뚱이라는 실체가 분명히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의 뜻은 이 몸뚱이와 고통이 없거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몸뚱이와 고통이 바로 생각이고 마음이며 부처이므로 공한 것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고통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이 바로 생각 마음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있다고 하는 이 몸뚱이의 실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몸뚱이다 하여 지극히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좋아하는 번뇌 망상일 뿐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오랜 시간 동안 좋아하고 싫어하는 허망한 생각이 버릇과 습관이 되어 쌓인 것이 바로 이 몸뚱이기 때문에 어떤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이 몸뚱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실체가 없는 이름일 뿐이고, 의미이며, 뜻이고, 느낌이며, 그 다운 역할과 작용을 하는 생각과 마음의 부처인 것입니다. 그래서 작용과 마음과 부처를 떠나 몸뚱이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육신과 육신이 일으키는 모든 고통이 생각이고 마음이며 부처의 작용임을 깨치신 역대 조사 스님의 행적을 살펴봅니다.

혜가 스님은 달마 조사를 만나 스승으로 섬기었습니다. 소림사까지 따라오면서 항상 조사에게 법을 물었으나 달마 조사는 전혀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스스로 탄식하기를 “옛 사람은 법을 구하기 위해 뼈를 깨고 골수를 꺼내고, 피를 뽑아 부처님 성상을 그리고, 머리채를 풀어 진흙에 펴고 벼랑에 몸을 던지고 주린 범에게 몸을 주었다. 옛 사람은 이렇게까지 하였는데 나는 무엇을 소중히 할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혜가 스님은 법을 구하기 위해 눈 오는 밤을 서서 새웠습니다. 날이 새어 달마 조사가 보고 물었습니다.

“네가 눈 속에 섰으니 무슨 구하는 바가 있느냐? 혜가 스님이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면서 말했습니다. “바라옵건대 조사이시여, 열반의 문을 활짝 열어 모든 중생을 건져 주십시오.” 달마 조사가 말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은 여러 겁을 수행한 것이거늘 네가 작은 뜻으로 큰 법을 구하려 해도 끝내 될 수 없느니라.” 혜가 스님이 이 말을 듣자 곧 날카로운 칼을 뽑아 자기의 왼팔을 끊어서 달마 조사의 앞에 놓으니 조사가 말하였습니다.
“부처님들과 보살님들이 법을 구할 때엔 몸으로써 몸을 삼지 않고, 목숨으로써 목숨을 삼지 않았는데 네가 이제 팔을 끊었으니 법을 구할 만하구나.” 그리고는 법호를 혜가라 내려 주었습니다.

혜가 스님이 사뢰었습니다. “조사께서 저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소서.” 조사가 대답하였습니다.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 주리라. 혜가 스님이 말했습니다.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조사가 대답하였습니다. “찾아지면 어찌 그것이 너의 마음이겠느냐? 벌써 너의 마음을 편안히 하였다.” 다시 말하였습니다. “너의 마음을 이미 편안히 해 주었다. 너는 보는가?”

혜가 스님이 이 말씀에 문득 활짝 깨닫고 조사에게 사뢰었습니다. “오늘에야 모든 법이 본래부터 공하고 고요하여 오늘에야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은 것임을 알았나이다. 그러기에 보살은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보살의 바다에 이르며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열반의 언덕에 오르나이다.” 조사가 말하였습니다. “옳은 말이다.”

미혹한 어리석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마음이 스스로 슬픈 눈물로 표출된 혜가 스님이 말했습니다. 조사께서 모든 번뇌가 꺼진 열반의 문을 활짝 열어 모든 중생을 고통의 바다에서 건져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달마 조사는 부처님의 깨달음은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어떤 계급과 차별도 없는 평등한 정각의 지혜인 무상의 깨달음은 여러 겁을 수행한 것이다. 네가 지금 갖고 있는 싫어하고 좋아하는 등의 번뇌 망상은 위와 아래가 있고 계급과 차별이 있어서 평등한 정각의 지혜가 아니다. 그런 작은 뜻으로 큰 법을 구하려 해도 끝내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은 과거 고통을 참는 수행 중에 누가 재산과 부인을 달라면 재산과 부인을 주었으며 눈을 달라고 하면 눈을 빼주고 팔과 다리를 달라고 하면 팔과 다리를 잘라 주었으며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뚱이를 전부 내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내 것을 아끼고 내 몸을 소중히 애착하는 차별적인 마음인 불평등한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마음을 올바르게 깨쳐서 잊고 있는 부처를 되찾고자 한다면 싫어하고 좋아하며 위와 아래가 있는 불평등한 분별 망상이 없어야 하며, 내 재산과 내 부인을 아끼고 내 눈과 팔 다리 몸뚱이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인색한 번뇌 망상을 멀리 떠나보내야 부처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뜻을 알고 있던 혜가 스님이 날카로운 칼을 뽑아 자기의 왼팔을 끊어서 달마 조사의 앞에 놓으니 조사가 말하였습니다. “부처님들과 보살님들이 법을 구할 때엔 몸으로써 몸을 삼지 않고, 목숨으로써 목숨을 삼지 않았다. 네가 이제 팔을 끊었으니 법을 구할 만 하다.”

혜가 스님이 사뢰었습니다. “조사께서 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조사가 대답하였습니다.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하게 하여 주리라. 혜가 스님이 말했습니다.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혜가 스님의 편안하지 못한 마음 곧 불편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그 불편한 마음은 당신과 나와 우리 모두 작용하는 생각이고 마음이며 부처임을 잊어버리고 나는 똑똑하고 잘난 체하며 뽐내는 허깨비 같은 버릇과 습관으로 쌓아온 싫어하고 좋아하며 위와 아래와 차별이 있는 불평등한 허망한 마음이 바로 불편한 마음입니다.

이같이 잘난 체하고 뽐내는 번뇌가 150억 년 전 빅뱅한 하나의 티끌로서 싫어하고 좋아하며 위와 아래와 차별이 있는 불평등한 망상의 마음입니다. 이 망상이 바로 40억 년 전 지구의 바다에 최초 출현한 단세포입니다. 이는 싫어하고 좋아하는 번뇌 망상이 모양과 모습으로 자취를 나타낸 것입니다. 결국 번뇌 망상이 진화와 유전을 거듭 반복하여 그림자 같은 우리들의 몸뚱이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뚱이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오직 잘난 체하고 뽐내며 싫어하고 좋아하는 분별망상이 유전과 진화를 반복해서 생긴 버릇의 습관으로 실체가 없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달마 조사가 너의 마음을 가져오면 편안하게 해주리라 하였지만 잘난 체하고 뽐내는 망상의 허깨비 마음을 어찌 찾을 수 있고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혜가 스님은 이런 불편한 분별 망상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조사가 대답하였습니다. “찾아지면 어찌 그것이 너의 마음이겠느냐? 벌써 너의 마음을 편안히 하였다.”

마음이 찾아진다면 그 마음은 번뇌 망상일 뿐 본래 참마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주세계 일체 존재가 그대로 작용하는 생각이고 마음이며 부처인데 무엇을 찾고 안 찾고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좋아해서 따로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나쁘다 하여 따로 버릴 수 있으며, 무엇이 크고 작고, 무엇이 예쁘고 밉고, 더럽고 깨끗한 것이 있으며, 무슨 똑똑하고 잘나고 뽐내는 아만이 있고, 다른 사람은 나보다 못하다며 경시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어떤 괴로움의 고통과 즐겁고 편안함이 있으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여당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어떻게 따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일체가 오직 작용하는 생각 마음 부처이므로 불편한 번뇌는 본래부터 없기 때문에 벌써 마음을 편안히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였습니다. “너의 마음을 이미 편안히 해 주었다. 너는 보는가?”

혜가 스님이 이 말씀에 문득 활짝 깨닫고 조사에게 사뢰었습니다. “오늘에야 모든 법이 본래부터 공하고 고요하여 오늘에야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은 것임을 알았나이다. 그러기에 보살은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보살의 바다에 이르며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열반의 언덕에 오르나이다.” 조사가 말하였습니다. “옳은 말이다.”

혜가 스님이 이 말씀에 참마음을 활짝 깨달았습니다. 참마음이란, 나는 똑똑하다고 뽐내고 너는 나보다 어리석다고 경시하는 마음이 없는 평등한 마음이 참마음입니다. 또한 참마음은 우주세계의 모든 존재가 그 다운 역할과 생각 그 나름의 작용을 하는 것을 참마음의 부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체 존재가 빠짐없이 바로 참마음의 부처이기 때문에 티끌 하나라도 따로 얻을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혜가 스님은 달마 조사에게 사뢰었습니다. “오늘에야 모든 법이 곧 일체 존재가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공하고, 또한 잘났다고 뽐내지 않아서 고요해서 일체가 그대로 깨달음이므로 오늘에야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은 것임을 알았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법이 본래 공하고 고요하다는 것은, 하나의 티끌을 포함한 이 몸뚱이와 우주세계의 일체 존재가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므로 곧 공하고 분별의 대립이 없으므로 고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세계는 우주세계라는 이름이 바로 생각과 마음이고, 우주세계를 구성하는 의미와 우주를 나타내는 뜻과, 우주에 대한 느낌이 곧 생각 마음 부처이며, 우주세계의 구성원들의 그 나름의 역할과 모든 작용이 바로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세계는 곧 활동과 작용이고, 활동과 작용하는 것이 생각과 마음이며 이렇게 깨닫는 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때문에 싫어하고 좋아하는 번뇌 망상이 곧 작용하는 생각 마음 부처이며, 나의 재산과 부인을 남에게 줄 때 서운하고 아까워하는 것도 눈과 팔 다리를 잘라 줄 때 느끼는 지옥 같은 고통 또한 작용과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므로 조금도 아깝지도 서운하지도 아프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세계 자체 그대로가 깨달은 생각 마음 부처이므로 혜가 스님은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은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살은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지혜의 바다에 이르며,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열반의 언덕에 오르나이다.” 지혜의 바다와 열반의 언덕 자체가 곧 생각 마음 부처이므로 생각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발을 움직이지 않아도 지혜의 바다에 이르고 열반의 언덕에 오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사가 말하였습니다. “옳은 말이다.”

그러므로 살구열매 하나도 작용과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고, 끝없이 멀리 있는 우주세계 끝자락도 작용과 생각과 마음과 부처로서 티끌만큼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살구 열매 하나 보듯이 우주세계 끝까지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내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와 우주세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소리도 이와 같고, 한 걸음과 우주 끝까지 가는 수없는 걸음과 지금 나의 마음과 나의 전생과 우주세계 전체 사람들의 마음과 전생도 티끌만큼도 다르지 않는 한 작용, 한 생각, 한 마음, 한 부처이므로 모두 들을 수 있고, 발을 움직이지 않고 갈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의 마음과 전생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래부터 부처이므로 영원히 죽지도 않는 무궁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망상으로 이루어진 재산과 부인 그리고 눈과 팔 다리 몸뚱이 전부를 남에게 주어도 조금도 아깝거나 서운하지 않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