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셋째 날. 집안에서 아침이 밝았다. 시간은 한국보다 1시간 늦지만 해 뜨는 시간은 비슷했다. 일어나자마나 커튼을 열어보니 창문 밖으로 보이는 국내성 성벽이 어젯밤과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 호텔 방 창문에서 보이는 국내성 성벽. 건물과 건물사이, 이렇게 남아있는 국내성 성벽이라니. 마음 한 가득 불편함이 올라온다.

오늘은 아침 식사 전, 모두 함께 압록강 산책을 하기로 하였다. 새벽 5시 30분, 먼저 호텔 주차장에서 단전치기와 체조로 뻐근했던 몸을 풀어주었다. 둥글게 모여 하나둘셋넷 숫자를 붙여가며 체조하는 모습이 신기했던지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갔다.

잘 알려진 대로 집안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이다. 고구려 멸망한 후, 이 지역은 발해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발해는 통화지역에 서경압록부를 설치하고 태왕릉 등을 유지 보수하며 집안 일대를 ‘성지聖地’로 보호 하였다. 태왕릉 등 고구려유적에서 발해시대의 기와가 발굴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발해가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을 성지聖地로 보호했다는 것은 발해 사람들이 스스로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 압록강이 보이자 뛰어가는 일행들의 뒷모습. 왠지 저 모습에서 설레임이 묻어 있는 것 같다.

 가벼운 체조를 마치고 드디어 압록강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압록강까지는 불과 10분. 정말 가까운 거리였다. 저 멀리 압록강이 보이자 조금씩 발걸음이 빨라졌다. 일행 중 몇몇은 뛰기 시작했다. 압록강 건너편은 북한 땅. 빨라지는 발걸음만큼, 심장 박동도 빨라지고 있었다.

 

▲ 집안에 접해있는 압록강. 오른쪽이 중국 집안시, 왼쪽이 북한의 만포시이다. 강폭이 생각보다 좁아 헤엄쳐서 건널 수도 있어보였다.

어느덧 압록강에 다다랐다. 짙은 황토색 강물이 흐르는 압록강은 헤엄쳐 건널 수도 있을 만큼 폭이 좁았다. 강가 양쪽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으며, 건너 북한 마을에는 파란색 지붕을 가진 집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건너편 산머리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들에 그저 울컥한 마음이 올라왔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이 손 끝에 저 파란 지붕이 잡힐 듯한데. 입가에서 맴도는 독립군가 ‘압록강 행진곡’에 결국 눈물을 삼켰다. 압록강을 바라보며 조국 분단의 현실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 압록강과 압록강 비석을 배경으로 한 천손문화연구회 답사팀 단체사진.

압록강에서 여러 마음을 안고 돌아온 우리 일행은 아침 식사를 하고 일찍 ‘환도산성丸都山城’으로 향했다. 출발할 때까지는 몰랐었다. 3일 차 일정은 너무나도 마음이 힘든 일정이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집안 시내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환도산성은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도 불린다. 평지성과 전시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고구려의 시스템에서 국내성은 평지성, 환도산성은 전시성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3년에 축조되었는데, 2대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수도 방어용으로 쌓았다고 한다. ‘위나암성’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왠지 ‘환도성’보다는 ‘위나암성’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 산 중턱에 걸쳐져 있는 환도산성. 지금은 낮은 성벽만이 남아있지만 예전엔 얼마나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을까 상상하니 가슴이 떨린다.

버스가 집안 시내를 벗어나 산길에 접어들었다. 어느 순간 길 앞이 탁 트이며 정면에 산이 하나 나타났다. 온통 초록색의 나무들 사이로 산을 따라 뱀처럼 길게 늘어서 있는 황토색의 낮은 성벽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느낌이 온다. 아, 환도산성이구나. 자연 스럽게 시선이 산 아래로 향했다. 피라미드 형태의 적석총들이 보인다. 환도산성 앞에 흐르는 통구하通溝河의 맑은 물과 이른 아침 산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이곳을 더욱 신령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피부에 닿는 약간 서늘한 공기의 청량함이 더해지니 정말 상쾌하였다.

 

▲ 환도산성 앞으로 흐르는 통구하. 맑고 깨끗했다. 마침 우리가 갔을때 건너편 강가에서 한 여성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환도산성을 가기 위해서는 통구하通溝河를 건너야했다. 요즘은 다리가 놓여 있어 쉽게 건널 수 있지만 원래 이곳은 천연 해자로 적이 쳐들어 왔을 때 쉽게 환도산성으로 진입할 수 없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직접 본 통구하는 생각보다 그 폭이 좁아 말을 타고 넘을 수 있을 듯 해 보였는데 적이 잘 침범하지 못했다 하니 그 당시에는 지금과 너비가 달랐을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환도산성의 성벽은 산의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구축되어 있었다. 물론 지금은 모든 성벽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성문은 남문만 평지에 만들어져 있고 나머지 문은 모두 높고 가파른 암벽 위에 만들어져있기에 남문을 거치지 않으면 성안으로 들어가기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환도산성이 2번 완전히 함락된 적이 있었는데, 바로 244년 동천왕 때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략과 343년 고국원왕 시절 전연의 모용황의 침략이 그것이다. 관구검은 환도산성을 함락한 후 왕실 서고 등에 보관되어 있던 고조선과 그 이전 시기의 역사를 담은 수많은 선도 사서들을 불태워버렸다고 하니 우리 민족의 역사가 이민족 침략으로 소실되기 시작한 시작점이며,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절대 함락이 되지 않았던 무적의 상징인 환도산성이 함락된 것은 고구려 사람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하듯 고구려는 그 이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를 거치며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낸다.

 

▲ 집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환도산성 내부 상상 복원도. 오른쪽 끝에 팔각 건물이 2개 서있다.

고구려가 이 곳 집안으로 천도를 한 것은 제 2대 유리왕 때로 지금 환도산성의 ‘환’자는 ‘丸’을 쓰지만 이 지방이 ‘환주桓州’ 혹은 ‘신주’였던 것을 보았을 때 환도산성의 ‘환’자도 예전에는 ‘桓’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2000년대 들어 환도산성을 정비하고 재발굴하는 과정에서 환도산성의 오른쪽에서 팔각 건물지가 2개 발굴이 되었다. 한국선도에서 ‘팔각’이 의미하는 바는 ‘천부天符’로 순수한 에너지가 움직여 물질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신궁神宮이나 신성한 제사유적을 팔각 건물로 지었는데, 경주 신라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나정蘿井’에서 발굴된 팔각 신궁이 대표적인 예이다. 환도산성이 후대에는 방어를 중시하는 전시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성이 가진 방어 기능 외에 한국선도의 가장 근본적인 제천 기능을 수행했던 곳은 아마 이 팔각 건물지라고 생각된다.

▲ 산성하 고분군 전경. 전경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일부분이다. 저 안쪽으로 훨씬 더 많은 수의 적석총들이 널려 있으며 바깥쪽에 있는 것보다 몇배 거대한 것도 있다한다. 예전에는 저 안쪽까지 들어 갈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통제해 놓았다.

환도산성과 산성의 성벽 밑에 있는 고분들을 보았을 때 낯설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로 들어오는 입구에 엄청나게 큰 공동묘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한차례의 의아함이 지나가자 고구려 사람들이 가진 ‘죽음’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지금은 ‘죽음’은 두렵고 슬픈 것이며 죽은 사람의 몸이 묻힌 공동묘지는 공포 이야기의 단골소재이지만 수도 입구에 공동묘지를 만든 고구려 때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한국 선도 전통에서 죽음은 ‘조천朝天’, 즉 하늘로 돌아가기 위한 의식이었다. ‘죽음’은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간완성의 마지막 관문이었기에 중요하고도 신성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무덤과 제천단은 다르지 않았으며, 무덤을 쓸 때도 신령한 곳을 택했다. 환도산성과 산성하고분군이 있는 이곳도 참 맑고 신령한 곳이었다.

 

▲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며 소리를 지르던 경비(!) 아저씨.

우리 답사팀은 통구하 다리를 건너 버스에서 내렸다. 환도산성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데, 누군가 저 앞에서 우리를 보고 소리를 지른다. 중국말이다 보니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기에 그냥 걸었다. ‘환도산성 경구입구’라고 쓰인 팻말이 보이자 소리를 지르던 아저씨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를 지르며 앞을 막아섰다. 황급하게 뒤따라온 가이드 김선생님은 출입금지라며 아저씨의 말을 전해주었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니 곳곳에 펜스와 사진촬영금지 표식이 있었다. 아저씨는 빨리 이곳에서 나가라고 성화였다. 인터넷 상의 글들에서는 환도산성과 산성하고분군에 들어갔다 왔다는 답사기가 수두룩하였는데 이 아저씨는 왜 우리를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일까?

 

▲ 환도산성 성벽 복원 현장. 돌 무더기 위로 웃옷을 벗은 인부들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환도산성은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 산 중턱까지 길게 이어진 성곽에서는 인부들이 부지런히 오가며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마치 나무 위에 붙은 개미처럼 인부들이 오르내린다. 중국은 2004년 환도산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 후 10년이 넘도록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산성 안에는 들어 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출입자체를 통제하고 무엇을 하는 것인지.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앞선다. 고구려 식으로 완벽하게 복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식으로 성벽을 쌓는 것은 아닐지 말이다.

 

▲ 산성하 고분군 적석총 발굴 현장. 대체 무엇이 저기에서 발굴되고 있을까 정말 궁금하다.

성곽 보수뿐 아니었다. 산성 아래 적석총들은 무언가 발굴을 하는 듯 몇몇 기의 적석총은 돌을 치우고 있었고, 몇몇 기는 이미 돌을 다 치워 놓고 사람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연신 플래시를 터트리고 있었다. 혹여라도 우리 일행이 발굴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카메라 렌즈를 들라치면 아까의 그 아저씨가 소리소리 질렀다. 김선생님은 여차하면 카메라를 빼앗기거나 최악의 경우 여권을 빼앗길 수 있으므로 조심하라 신신 당부를 한다. 대체 저기서 무엇이 나오고 있을까. 정말 궁금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이 상황에 가슴이 묵직하다.

고구려 귀족의 무덤군이라 알려진 ‘산성하고분군山城下古墳群 ’은 현재 1,562기의 무덤이 남아있다고 한다. 적석총을 비롯하여 특이한 널방천정을 가진 절천장묘折天障墓와 널방 안 귀갑무늬가 그려진 귀갑총龜甲塚 등 여러 형태의 고분이 있으며 축조시기도 2~6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아직까지도 다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니, 혹시 알까. 고구려시대 보다 더 오래된 시대의 피라미드 적석총이 있을지도. 이곳이 우리 땅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쉽다.

 

 

 ✔ 천손문화연구회 2015 중국 동북3성 선도문화탐방 그 여덟번째 ::  
 [8편]  집안박물관, 국동대혈, 장군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