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단기 4348년) 8월 9일. 한국 선도 제천의 원형을 찾아 중국 답사를 떠나는 날이 밝았다. 우리 역사가 시작이 되었고 마고 복본사상으로 인성 회복을 이룬 실제 역사가 존재했었던 땅. 그 땅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꽤나 흥분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동북공정의 실체를 직접 맞닥뜨릴 것을 생각하니 비장해졌다.

 

▲ 출발 전. 인천공항에서 주의사항을 듣고 있는 일행들.

오전 9시 30분. 인천공항에 답사팀이 속속 모여들었다. 단체티, 항공권, 자료집 등을 나누어 갖고 난 후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는 것으로 출국 전 준비 끝. 우리의 답사일정과 장소가 다른 이들의  중국 여행일정과 매우 달라 중국 현지 여행사들이 모두 거부하는 바람에 중간에서 어르고 달래는 데 진땀을 뺐다는 여행사 사장님은 쉽지 않은 일정이라 고생문이 훤하다며 잘 다녀오라고 배웅을 하였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오후 12시 30분에 출발하는 심양행 중국남방항공. 단체임을 고려하여 무려 3시간 전에 모였음에도,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과 겹쳐 수속하고, 짐 부치고, 환전하고, 로밍하고, 출국심사 후 게이트까지 가는 데도 시간이 빠듯하다. 겨우 모이기로 약속한 시각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비행기 탑승 전까지 남은 시간은 약 15분. 막간을 이용하여 전체 답사에 관하여 천손문화연구회 지도교수인 정경희 교수의 간단한 오프닝 강의가 진행되었다.

인천에서 심양까지 2시간. 기내식을 먹고 나니 어느덧 착륙이다. 약간은 살벌(!)한 입국심사 후 짐을 찾고 바깥으로 나와서 7박 8일 동안 우리와 함께할 가이드 김 선생과 버스 기사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가이드 김 선생은 중국 동포(조선족)로 증조할아버지 때 만주로 건너온 4세대로 원래는 경기도 광주에서 살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증조할아버지가 일본인을 죽여 온 가족이 도망을 쳐 이주하였다고 한다. 내 민족이 겪는 일, 내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 치부하고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이렇게 한 가족의 역사에도 민족의 수난사가 배여 있기 때문임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답사 기간 내내 김 선생은 우리에게 한국인들이 잘 모르고 있는 중국동포들의 현실과 변화상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안타까운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많이 교차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중국인들이 부르는 ‘조선족’이라는 단어 대신 ‘중국동포’라는 호칭을 쓰겠노라 마음먹었다. 

본격적으로 답사가 시작되었다.

심양 공항을 출발한 우리팀은 제일 먼저 요녕성박물관(랴오닝성박물관, 遼寧省博物館)을 찾아갔다. 동북공정을 말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요하문명전’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 곳으로 답사 전 ‘요녕성박물관이 정비 중이라 못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었으나 다행히 출발을 한 주 남겨 놓고 다시 개관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다.

▲ 새로 이사한 요녕성박물관.

요녕성 박물관에 도착하니 오후 2시 40분. 최근 새 건물로 이사를 하였다는 요녕성박물관은 한눈에 보기에도 웬만한 국립박물관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박물관 폐장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남짓. 저 정도 규모의 박물관을 2시간 안에 다 볼 수 있을까 걱정 반, 전시된 유물은 꼼꼼히 다 보고 싶은 욕심 반으로 일행들을 재촉하여 요녕성박물관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니, 공항 검색대에서나 볼 수 있는 엑스레이 기계가 출입문 앞에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난떤다’는 생각과 함께 감시를 받는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입구의 엑스레이 기기. 감시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방학을 맞아 박물관을 찾은 가족단위의 관람객으로 넓은 로비가 시끌시끌했다. 사진 촬영을 못하는 줄 알고 카메라를 차에 놓고 내렸는데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고 한다. 다소 아쉽지만 핸드폰카메라로 만족해야 했다.  박물관의 한쪽에서는 나폴레옹 특별전시전을 하고 있었고, 2층과 3층은 현재 정비가 안 되어서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홍산문화紅山文化(홍샨문화) 관련 유물들을 보기 위해서였기에 부지런히 관련 전시실을 찾았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정비가 안 되어 있는 전시실이 2층과 3층뿐이 아니었다. 홍산문화 유물들을 전시하는 전시실에도 차단벽이 설치, 전시가 중단되어 있었다. 답사의 제일 첫 시작을 요녕성박물관으로 잡은 이유는 오로지 홍산문명 유물을 보기 위해서였었기에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 홍산문명관련 전시실은 공사중이라는 차단벽. 우하량 여신묘에서 발굴된 여신상이 눈에 띈다.

그나마 정상적으로 볼 수 있었던 전시실은 명나라·청나라 시대의 옥기를 전시해 놓은 곳 한 곳뿐. 그래도 홍산문화의 대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옥기’와 관련이 있으니 아쉬운 마음으로나마 명·청대 옥기전시실로 들어갔다.

옥기玉器는 홍산문화의 발견과 함께 역사화 과정을 밟고 있는 환웅시대, 즉 신시배달국의 대표적인 신성의기神聖儀器(神器)이다. 적봉, 우하량 등의 요서지역은 흥륭와문화興隆洼文化(씽롱와문화, 홍산문화 이전의 신석기시대 문화로 서요하西遼河와 대릉하大凌河 유역에 분포한다. B.C. 6200~5200년에 해당한다) 이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뛰어난 옥기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특히 홍산문화에서 발굴된 옥기는 신석기 옥기의 최고 걸작이자 주변 신석기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형태적으로도 구상미가 뛰어 날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다양한 천손문화적 상징을 가지고 있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홍산후기문화에 이르러서는 권력자의 무덤에 옥기만을 부장하는 등 옥기가 당대 최고의 신물神物임을 보여준다. 여러 형태의 옥기가 부장이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기철학을 상징하는 기하학적인 무늬의 옥기는 부장자의 머리와 가슴 부근에만 놓여 있어 홍산인들이 물질보다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전시되어 있는 명청시대의 옥벽. 사진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중앙에 음양태극이, 주변에는 팔괘가 새겨져 있다. 보이지 않은 기에너지를 상징하는 중앙자리에 삼태극이 아닌 물질을 상징하는 음양태극으로 바뀐 사례.

옥기는 홍산후기문화 이후 단군조선뿐 아니라 중원 일대에도 널리 계승이 되어 한나라 시기까지 이어진다. 다만, 단군조선 방면으로 이어진 옥기는 고졸함을 유지했던 것에 비하여 중원 일대로 전해진 옥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화려한 모습을 띄는 것이 특징이다. 

이후 옥기는 중국적인 문화와 제도가 정착되는 한대漢代를 거치면서 변화된 사회 분위기로 인하여 옥기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결국, 한대 이후 옥기는 한낱 장식물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전통이라는 것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 법. 요녕성박물관 명·청대 옥기전시실에 전시된 옥기들 중에는 간혹 홍산문화의 영향을 받아 기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형태를 가진 것들이 눈에 띄었다. 그나마 중원으로 퍼져나간 홍산문화가 어떻게 이어져 나갔고 변질이 되어 갔는지를 볼 수 있었으니 그나마 소득이라면 소득이랄까.

▲ 정전으로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전시실.

돌아서려는 우리 앞에 ‘요하문명 어쩌고~’라고 쓰인 전시실이 나타났다. 다시 한 번 ‘설마’하는 마음으로 다소 고무되어 전시실을 들어가려 하였는데 맙소사! 정전이라고 볼 수가 없단다. 당황스러웠지만 전시실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박물관을 나가기 전 도록이라도 사려고 했더니 정리가 안 되어 판매할 수 없다 하고, 카탈로그라도 달라 하니 그런 것도 없다 하여 이래저래 다음을 기약하며 박물관에서 나왔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들어올 때는 맑다 못해 잡아먹을 기세로 내리쬐던 햇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꼼짝 못 하고 박물관 현관에서 비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린 지 30분. 빗줄기가 조금씩 약해졌다. 가늘게 내리는 빗방울에 머리를 적시며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버스를 향해 뛰었다.

▲ 가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버스로 돌아가던 중,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무지개가 떠있다.

뛰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반도에서 보던 무지개와 똑 닮은 무지개가 저 앞에서 빙긋 웃고 있었다.

 

✔ 천손문화연구회 2015 중국 동북3성 선도문화탐방 그 세번째 ::  
 [3편]  여성시대와 천손문화  - 신락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