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양시내 요녕성박물관과 신락유적지 위치(출처 : 구글지도)

심양 한가운데 혼하渾河가 흐른다. 혼하渾河는 태자하太子河와 더불어 이하二河라 불렸다. 고구려 역사는 주로 압록강, 혼강 즉, 이강二江과 혼하, 태자하, 이하二河에서 전개되었다할 정도로 고구려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강이다. 요녕성박물관을 출발한 우리는 고구려의 역사를 간직한 혼하를 건너 신락유적지(신러유적지, 新樂遺址)로 갔다.

▲ 심양을 가로지르는 혼하. 고구려의 역사를 품고있다.

신락유적지는 지금으로부터 7천 년 전인 BC.5000년경 신석기시대 원시 모계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씨족 공동체의 유적지로 다양한 크기의 집터와 골기骨器, 도기陶器, 석기石器 등 유물이 함께 출토되어 당시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 신락유적지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갑자기 내린 장대비와 심양의 교통체증 때문에 신락유적지에 도착하니 이미 관람 시간이 지나버렸다. 하지만 우리의 유능한 가이드 김 선생이 경비를 설득, 출입문 사이로 비석과 조형물을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세워져 있는 황금색 조형물은 신락유적지에서 출토된 ‘권장權杖’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 신락유적지를 설명하는 비석과 발굴된 권장의 문양을 모티브로한 조형물

권장은 ‘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이기에 권장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다면 그것은 그 집단에서 신성시하는 토템일 가능성이 크다. 신락유적지에서 발굴된 목조 권장은 길이 38.5cm, 너비 4.8cm로 권장의 한쪽 끝에는 새의 부리와 머리, 눈, 코, 꼬리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이 모양을 두고 학자들은 신락유적에서 살았던 종족들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내어놓았다. 

그런데 이 지팡이에 관해 조금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중국 고고학자 곽대순郭大順(궈다순)은 ‘새의 몸통을 자세히 보면 용의 비늘과 같은 문양이기에 용을 나무에 새긴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권장權杖이 아닌 비녀 일 수도 있는데 크기로 보았을 때 예기禮器였을 것’이라고 하며 단순히 새뿐 아니라 용의 모습이 함께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바로 이 부분에서 신락유적지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추정해 볼 수 있다. 사실, 용이 함께 있는 모습이던 새만 있는 모습이던 주인공을 가리는 데 크게 문제는 없을 듯하다. 신시배달국의 천손문화를 나타내는 상징이 바로 용과 새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족들은 용은 신성한 존재로 여겨 황제의 상징으로 삼는 등 떠받들어 왔으나 상대적으로 새에 대해서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봉황은 ‘상상의 새’로 신성하게 여겼으나 용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하다.

▲ 백제금동대향로. 아래는 용, 위에는 봉황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그러나 홍산문화 이래로 우리 민족의 각종 설화와 유물들에서는 용과 봉황이 허다하게 발견이 된다. 북부여의 단군인 해모수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하늘을 오고 갔다는  설화나 봉황과 용이 함께 새겨진 백제 금동대향로가 대표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용과 새는 한국선도의 수행문화적 관점에서도 권장에 새겨진 용과 새를 해석할 수 있다. 신시배달국 천손문화의 양대 표상물인 용과 새(매, 까마귀, 봉황)는 기氣에너지를 상징하는데, 삼원오행론三元五行論에 따르면 순정한 기 에너지가 9단계에 걸쳐 물질 에너지로 바뀌면서 땅(물)의 동물인 ‘용’이 승천하여 하늘 동물인 ‘새’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화한다.

 그 외에도 신시배달국의 천손문화가 태호복희씨, 여와씨, 소호씨 등 배달국 제가諸家들의 중원이주와 함께 전파된 중원 문화가 산동성·강소성·안휘성 북부 일대에서 펼쳐진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에서는 ‘소호씨’를 송골매의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보았을 때 신락유적지의 주인공들은 적어도 배달국의 천손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종족임을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 천손문화와 문명의 발달

멀리서 나마 신락유적지의 상징인 조형물을 살펴본 천손문화연구회 답사팀은 유적지 정문 앞에서 지도교수인 정경희 교수의 신락유적지와 천손문화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한 시간 가량 이어진 강의에 다들 피곤한 기색도 없이 꼼꼼히 필기하며 열심이다.

▲ 강의 중인 정경희교수의 뒷모습과 열심히 듣고 있는 답사팀.

신락유적지가 조성된 것과 같은 시대에 요서 적봉赤峯지역에서는 홍산문화의 직전단계인 조보구문화(B.C.5000년~B.C.4400년)시기였다. 동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 문화수준 차이가 크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요서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주도한 신시배달국의 집권세력, 배달족의 문명 수준은 동시대 여타 종족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이는 신석기 요서문화를 주도한 배달족의 옥기 가공술이나 신시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치우천황)이 B.C.2600년 경 이미 동·철기를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배달족은 우수한 기술력을 이용하여 주변을 정복·지배하거나, 기술력을 보급하여 물질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보다는 정신문화를 보급, 평화와 공존의 길을 택한다. 배달족의 노력으로 누구나 선택과 노력을 하면 내면의 밝음을 완전히 깨운 ‘인격자’, ‘천손天孫’이 될 수 있다는 천손문화天孫文化는 신석기 모계사회에 빠르게 퍼져 나간다. 남성보다 물리적으로 힘이 약한 여성이 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평화로웠던 신석기 모계사회는 전쟁과 지배보다는 조화로움을 우선시하는 천손문화를 보급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청동기의 보급과 함께 사회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다. 청동은 예기禮器이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무기武器였다. 검, 화살 등 날카로운 무기가 보급되고 대규모의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점차 남성중심의 부계사회로 무게가 옮겨가기 시작했다. 전쟁은 사람에게 내재된 짐승 같은 본능인 수성獸性을 자극하였다. 중원지역의 화하족華夏族 뿐 아니라 배달족조차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천손문화를 지키고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역대 단군들은 신시배달국의 환웅들과 달리 강인한 군사력을 갖추어야 했다. 단군조선의 유적으로 알려진 하가점하층문화(BC.2000년~BC.1500년)에서 발굴된 군사시설과 무기 등은 변화된 시대상을 보여준다.

▲ 신락유적지 입구 외벽에 그려진 부조. 신석기시대 생활상을 보여준다.

흔히 ‘문명은 발달할수록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석기시대보다는 청동기/철기 시대가, 고대보다 중세가, 중세보다 근대가, 근대보다 현대가 더 삶의 질이 높고 우수하다 말한다. 그러나 배달족의 천손문화 보급을 보며 과연 문명이 발달할수록 좋은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배달족은 높은 문화수준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물질적인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다함께 인성회복과 완성을 하고 평화롭게 사는 공존을 택했고 그럼으로써 당시 사회는 조화롭고 평화로울 수 있었다. 다만, 배달국 말기로 갈수록 중원의 화하족에 의하여 이런 안정된 사회가 깨지기 시작하면서 천손문화권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이를 막기 위하여 자오지환웅(치우천황)은 81명의 제후를 모아 10년에 걸린 중원원정을 단행하는데, 이는 훗날의 일이다.

아마 신락유적지는 배달족은 아니지만 천손문화를 받아들인 종족의 유적일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서 정말로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시대 여러 수준의 문화가 공존을 하면서 평화롭게 그 넓은 강역을 경영할 수 있었던 당시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아닐까?

 

✔ 천손문화연구회 2015 중국 동북3성 선도문화탐방 그 네번째 ::  
 [4편] 수도首都라기보다는 신성지역 소도蘇塗, 환인桓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