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목(惡木)이라 박해받았던 황칠나무
악목(惡木)이라 박해받았던 황칠나무
  • 정유철 기자
  • hsp3h@ikoreanspirit.com
  • 승인 2015.03.16 22: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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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려 고종 38년(1251)에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물경 750년이나 지났지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 시대 목재로 된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남아있더라도 훼손이 심한 것에 비교하면 팔만대장경의 경우는 경이롭다. 팔만대장경이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듯 잘 보존되어온 비결 가운데 하나로 옻칠을 들 수 있다.
고려인들은 글자를 새기고 교정 작업을 마친 목각판에 특별히 옻칠을 하였다. 목각판은 표면에 먹물을 칠하거나 콩의 전즙이나 송연으로 처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목각판에 옻칠을 한 것은 세계적으로 팔만대장경이 유일하다. 경판에 옻칠을 한 덕분에 팔만대장경은 750년이 지나도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장경판 보존에 옻칠을 이용할 만큼 우리 민족은 옻칠을 널리 활용할 줄 알았다. 그 흔적은 언어에도 남아있다. 우리가 흔히 물감을 칠한다고 하는데 이 ‘칠한다’는 본래의 의미를 옻칠을 하는 것이다. 칠은 곧 옻칠을 의미하여 굳이 옻칠이라고 하지 않아도 통용되었다.

칠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꼽았던 것이 황칠(黃漆)이다.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황칠나무는 ‘노란옻나무’라고도 한다. 황칠을 바르는 것을 금칠(金漆)이라 하였다. 황칠나무 수액은 예부터 우리나라 특산물로 매우 귀하고 우수하여 주로 왕실에서 사용하였다. 아름드리나무에서 겨우 한 잔 정도 황칠 수액이 나오니 귀하게 대접했던 것이다.
조선 인조 25년(1647) 9월 칙서를 가져온 청나라의 칙사는 대접이 허술한 것을 인조에게 불평했다. 그러자 인조는 이렇게 말하였다. “칙사의 생각에는 칙사를 맞이할 때 쓰는 상탁(床卓)을 황칠(黃漆)로 칠해 주기를 바라는가?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 황칠로 칠해 주겠다.” 이렇듯 황칠의 가치를 청인들도 알았다.
이 황칠은 나무에서 얻는 것도 귀하지만 자라는 곳이 남해안 일부 지역뿐이어서 더욱 얻기가 힘들었다. 민간에서는 약으로 쓸 수도 없었으니 허준의 ‘동의보감’에서 황칠을 활용한 방문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귀한 것이니 조선시대에는 아전들의 수탈이 날로 심해졌다. 조선 정조 18년(1794)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 서영보(徐榮輔)가 정조에게 일종의 출장보고서를 올렸다.
“완도는 바로 황칠(黃柒)이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에 본도의 감영·병영·수영 및 본도의 지방인 강진·해남·영암 등 세 읍에다 모두 연례적으로 바치는 것이 있고 왕왕 더 징수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근년 이래로 나무의 산출은 점점 전보다 못한데 추가로 징수하는 것이 해마다 더 늘어나고, 관에 바칠 즈음에는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뇌물을 요구하는 일이 날로 더 많아지니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금년에 바람의 재해를 입은 후에 큰 나무는 또한 말라 죽은 것이 많고 겨우 어린 나무 약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황칠(黃柒)은 또한 기물의 수요에 관계되는 것인 만큼 마땅히 배양하고 심고 가꾸어 국용에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10년을 한정하여 영과 읍에 으레 바쳐오던 것을 아울러 감면하여 오래 자라는 실효가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옛날 상태를 회복하여 규례대로 납부하게 된 뒤라도 과외로 징수하는 폐단은 엄격히 조목을 세워 일체 금단해서 영원히 섬 백성들의 민폐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 보고를 받은 정조는 10년간 황칠을 징수하지 못하게 했다.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궁복산에 가득한 황칠나무를 그대 보지 않았던가(君不見弓福山中滿山黃)
깨끗한 금빛 액체 반짝반짝 윤이 나지(金泥瀅潔生蕤光)
껍질 벗기고 즙 받기를 옻칠 받듯 하는데(割皮取汁如取漆)
아름드리 나무래야 겨우 한잔 넘친다(拱把椔殘纔濫觴)
상자에다 칠을 하면 옻칠 정도가 아니어서(㔶箱潤色奪髹碧)
잘 익은 치자로는 어림도 없다 하네(巵子腐腸那得方)
글씨 쓰는 경황으로는 더더욱 좋아서(書家硬黃尤絶妙)
납지고 양각이고 그 앞에선 쪽 못쓴다네(蠟紙羊角皆退藏)
그 나무 명성이 온 천하에 알려지고(此樹名聲達天下)
박물군자도 더러더러 그 이름을 기억하지(博物往往收遺芳)
공물로 지정되어 해마다 실려 가고(貢苞年年輸匠作)
징구하는 아전들 농간도 막을 길 없어(胥吏徵求奸莫防)
지방민들 그 나무를 악목이라 이름하고(土人指樹爲惡木)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每夜村斧潛來戕)
지난 봄에 성상이 공납 면제하였더니(聖旨前春許蠲免)
영릉복유 되었다니 이 얼마나 상서인가(零陵復乳眞奇祥)
바람 불고 비 맞으면 등걸에서 싹이 돋고(風吹雨潤長髡枾)
가지가지 죽죽 뻗어 푸르름 어울어지리(杈椏擢秀交靑蒼)”

다산 정약용 선생의 ‘황칠(黃漆)’이라는 시이다. 이 ‘황칠’ 시에서 다산 선생이 언급한 것처럼 귀한 황칠나무가 백성들에게는 악목(惡木)이었고 그래서 밤마다 도끼를 들고 몰래 찍어 없앴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봄에 임금이 황칠 공납을 면제하였더니 영릉복유(零陵復乳) 즉 없어졌다고 한 것이 다시 생겨났다. 영릉(零陵復乳)는 영릉에서 생산되는 석종유(石鍾油)를 공물로 바치는데 그것을 채취하기가 너무 힘들고 정당한 보상도 없어 지방민들이 석종유가 없어졌다고 보고했다. 그 후 지방관으로 온 관리가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이 감복하여 석종유가 다시 생겨났다고 보고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황칠의 역사를 자세히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 축소판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고의 조공품, 진상품이며 백성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부담이었으니. 이런 역사를 간직한 황칠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황칠 수액의 특성과 천연도료로서 가치의 우수성, 약재로서 가치를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국립산림과학원의 연구자료를 보면 황칠의 장점은 무궁무진하다. 칠과 향만으로도 어떠한 도료나 향보다도 우수한 품질의 상품으로 복원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분야에 과감히 투자하는 기업이 나온다면 그 기업을 뜨겁게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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