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이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으로 결정되기까지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1945년 미 군정의 위촉으로 교육계와 학계의 권위자 100여 명을 초청하여 조선교육심의회가 조직되었다. 교육이념·교육제도·교육행정·초·중등교육·직업교육·사범교육·고등교육·교과서·의학교육 등의 10개 분과위원회를 두어 각 분과로 하여금 학무국에서 마련한 여러 가지 의제를 협의, 결정하게 되었다. 1945년 12월 23일 조직되어 1946년 3월 7일을 마지막으로 분과위원회 105회, 전체회의 20회를 개최하였다.

1949년 12월 31일 공포된 교육법과 제도를 살펴보면 대부분은 미국식 혹은 일본식 법제를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교육이념만은 다르다. <교육법> 제1조에 삽입되어 한국교육의 이념으로 명문화된 ‘홍익인간’의 교육이념과 교육의 기본 방침이 심의·결정되었고, 학제를 비롯한 교육제도에 대한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쳐 홍익인간 이념이 우리의 교육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조선교육심의회 중 제1분과위원회는 교육이념을 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여기에는 위원장 안재홍을 비롯해 백낙준, 하경덕,  김활란, 홍정식, 키퍼 대위가 속해 있었다.

1945년 12월 20일 오후 2시 미군정청 중앙 회의실에서 열린 조선교육심의회 제4차 전체회의는 교육이념을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교육이념으로 ‘인류공영’과 ‘홍익인간’ 중 이견을 좁히지 못한 상태였다.

홍익인간 교육이념에 찬성하는 이는 현상윤, 안재홍, 정인보 등이었는데 처음 '홍익인간'을 주창했던 사람은 백낙준이었다.

당시 백낙준은 “교육학적 여러 이론이나 철학적 이론을 내가 말할 수 없지만 홍익인간으로 삼자고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사회에 유익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교육의 제1목표요, 배운 사람의 다음 목적은 내 개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복리, 크게 말하면 인간 행복을 위해서 활동한다는 것이 곧 교육을 받는 사람의 목적이다”며 홍익인간을 해석했다.

▲ 백낙준 제2대 문교부 장관(사진제공=연세대학교)

‘군정시대에 교육이념 이야기가 처음 나왔다. 여러분들이 교육이념을 두세 개 제출해 토론하였는데 처음에는 우리 교육이념이 될만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내가 생각이 나서 '홍익인간'이라고 정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니, 그때 모두가 좋다고 하였다.’ -백낙준 《한국의 현실과 이상》 중-

훗날 백낙준 주창설에 논란이 제기되는데 이는 서구 유학파이면서 기독교 목사였던 백낙준의 사상적 배경이나 출신 성향을 놓고 볼 때 홍익인간 이념을 주창한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었다.

백낙준은 기독교 목사이면서 교육계 대표로 조선교육이념심의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낙준이 당시 맡고 있던 연희전문학교의 배경을 살펴보면 홍익인간 제창이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적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백낙준은 1927년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교수가 되고 회의가 있던 1946년 연희전문의 교장직을 맡고 있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우리나라 국학(國學)연구와 민족사학의 최고 중심축이었다. 일제하에 유일하게 문과 과정을 개설해 일제의 감시와 압력에도 공개적으로 때로는 강의 이름을 바꾸어 가면서 민족정신과 독립의식을 고취하고자 교육했다. 특히 역사학과의 정인보, 백낙준, 손진태 등은 일제의 식민사학에 맞선 민족사학의 중심이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홍익인간’은 특정 종교의 이념이 아닌 한민족의 정신적 중심철학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날 회의장에서 백낙준의 바로 앞자리에 앉았던 정인보는 백낙준의 발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이를 《용재(백낙준의 호)선생과 홍익인간의 문제》에서 이렇게 밝혔다.

‘어쩌면 불교인의 용어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를 홍익인간이란 덕목이 불교인도 아니고, 국사를 전공한 분도 아닐 뿐 더러, 기독교 목사의 자격을 지니신 선생에 의해서 제창되었다는 데에 나는 지대한 관심과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개 기독교인으로서의 외연(外延)이, 용재선생의 경우 얼마나 적극적이고 폭넓은 것이었던가,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민영규 《용재선생과 홍익인간의 문제》 중-

▲ 독립운동가이자 한학자 정인보(사진제공=연세대학교)

그러나 '홍익인간' 교육이념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에 나선 인사는 주로 오천석(제8대 문교부장관), 장이도, 이인기 등 주로 미국과 일본에서 공부했던 유학파 출신이었다. 특히 동경상대를 나온 좌익계 학자로 당시 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백남운은 홍익인간 이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백남운은 "홍익인간이라는 말이 고기(古記)에서 나온 말이요, 따라서 신화에 가까운 비과학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일본의 침략 논리로 즐겨쓰던 팔굉일우(八宏一宇)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주장하며 상당히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팔굉일우는 지상 여덟 모퉁이에 기둥을 세워 지붕을 이고, 온 지구를 그 밑에 덮은 다음, 그 지붕 아래에 있는 모든 민족을 일본이 지배한다는 뜻이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창안되어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국가 통치이념이다.

백남운은 우리 교육이 입각해야 할 '민족교육'의 원칙으로 (1) 일제식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말살할 것 (2) 민주주의 정신을 불식할 것 (3) 과학사상을 발양(發揚)할 것 등 3원칙을 들고, 홍익인간이념은 이들 3원칙에 모두 위배되는 반동적-비과학적 이념이라 공격하였다.

그는 홍익인간 이념은 신화라는 '조국 정신'의 한 유형으로 과학사상이 아닌 신화 전설에 근거하고 있으며, "조선의 민주적 건국정신과는 본질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라 규정하였다.

백남운을 비롯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이들은 홍익인간을 비관하는 논거로 '과학'이 아니라는 유물론적 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 해방 후 교육에 대한 열의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사진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나 백낙준은 “홍익인간이라는 말이 《제왕운기》나 《삼국유사》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들 저자들에 의하여 이념으로 정립된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빌려온 것도 아니고, 또 이것이 다른 나라를 배타하는 제국주의 사상도 아닌, 민족문화의 유구한 전통 속에서 영글어진 개념으로 민족적 이상을 가장 잘 나타낸 이념”이라고 반론했다.

그는 홍익인간을 ‘인간에 대한 최대의 봉사(Maximum service to humanity)'로 번역하며 설명했다. 키퍼 대위도 기독교적 박애사상과 다를 바 없다는 백낙준의 설명에 수긍했다.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홍익인간’이 교육이념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1949년 최초의 교육법이 제정될 때에는 국회 심의과정에서 논란이 제기된다. ‘[기획] 21세기 다시 살아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다음 편에는 ‘교육이념 홍익인간에 대한 끝없는 논란’ 두 번째 이야기를 연재한다.

[기획] 21세기 다시 살아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1편. 민족의 정신적 보배를 아십니까? (클릭)

글. 전은애 기자 hspmaker@gmail.com
참고. 이형래. 해방 후 단군인식과 현대 단군운동의 전개 ㅣ 조흥윤. 홍익인간 사상의 연원과 의미(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