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 년 고도 경주 속에 오롯이 간직된 한민족 고유의 천손문화를 찾는다!

지난 5월 25~26일, 경주에서는 아주 특별한 문화탐방행사가 있었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의 천손문화연구회가 주최한 '경주 선도문화탐방'이 바로 그것. 선도문화는 한민족 전통의 '하늘문화(제천문화)'로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화랑도, 고구려의 조의선인 등이 이 선도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나들었지만, 한민족 고유의 선도문화를 향한 천손문화연구회원들의 뜨거운 열정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그 현장을 기자가 동행 취재하였다.

※ 천손문화연구회 경주 선도문화탐방 기획기사
[1편] 신라건국의 비밀 - 오릉, 알영정, 숭덕전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
[2편] 신라의 불교 수용과 한국 선도의 쇠락 - 천경림 흥륜사, 무열왕릉, 서악리 고분군

# 천경림 흥륜사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왕을 모신 사당인 숭덕전을 끝으로 천손문화연구회는 오릉 답사를 마치고 천경림 흥륜사로 이동하였다. 천경림 흥륜사는 이차돈의 순교 이후 중창하였고 당시에는 규모가 상당히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천경림입니다. 다 왔습니다."

태어난 후부터 지금까지 대학 시절을 제외하고 모든 시간을 경주에서 보냈다는 경주 토박이 김의식 회원의 안내에 따라 차에서 내렸다. 두둥... 순간 눈을 의심하였다. 흥륜사는 544년 완공되었다.  건물이 남아 있다면 천 여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황룡사지처럼 터만 남아 있겠거니 생각했다.  정작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최근 지은 절과 똑같았다. 아니, 그보다 규모도 훨씬 작았다. 

▲ 천경림 흥륜사 경내. 지금의 건물들은 1980년대에 다시 지었다.

상상했던 바와 좀 다른 모습에 약간 실망했다. 그늘로 자리를 옮겨 '천경림 흥륜사'를 소개하는 정경희 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천경림 흥륜사'는 원래 '천경림'이라고 하여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 땅에 있었던 신성 지역, 즉 소도터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소도를 하늘과의 통로라고 믿었고, 소도를 통하여 하늘과 통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라에 불교가 점점 들어오면서 선도문화의 소도가 사찰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한민족 고유의 선도문화가 점점 힘을 잃고 외래로 들어온 불교문화에 밀려  신성한 지역, 소도를 하나씩 내주었다.  왠지 가슴이 짠하고 서글픈 생각이 든다. 아아! 이렇게 우리 민족의 선도문화가 쇠락해갔구나.

지금의 흥륜사는 경주에 구전으로  내려온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실제 흥륜사지는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경주공업고등학교 부지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얼마 전 경주공고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면서 땅을 팠는데, 그 자리에서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글을 새긴 기왓장이 다량 출토된 것이다. 이를 근거로  원래 흥륜사지는 지금의 경주공고로 보는 학자가 많다고 한다. 지금의 흥륜사 자리는 선덕여왕 대 세운 '영묘사' 터로 본다.

▲ 경주공업고등학교 전경. 이곳을 원래 흥륜사가 있었던 곳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사진 출처 : 경주공업고등학교 홈페이지 www.kjth.hs.kr)

우리는 계속해서 흥륜사지에 얽힌 시대 배경 설명을 들었다.

"『삼국유사』기록을 보면 흥륜사는 고구려 승려인 '아도(阿道)'가 신라 13대 미추왕 3년(264년) 공주의 병을 고쳐주고 세운 절이라고 합니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이 된 것이 527년이니까, 264년이면 약 240년 정도 전이죠. 신라에서 '아도'는 남자 사제를 뜻하는 보통명사였습니다. 처음에는 승려도 선도사제의 의미로 '아도'라고 불렀지요. 

이렇게 지은 흥륜사는 미추왕 사후에 폐허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아직 신라에 선도 전통이 남아있었던 시기라 귀족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겠죠. 선도문화 전통에서는 왕은 당시 최고의 수행자였습니다. 사람들을 이끌어주고 성장시키는 스승이 왕이 되었습니다. 또한 누구나 하늘을 접하고 맞이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내면의 밝음을 깨우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왕인데,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왕이 될 수 있고 일반 백성도 다 하늘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하면 왕에게는 좋을까요, 나쁠까요? 그래서 당시 신라의 김씨 왕들은 불교를 적극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처음 불교가 들어온 미추왕 이후 19대 눌지왕, 21대 소지왕 때도 계속 불교가 유입되었으나 다들 쫓겨나지요. 이를 반복하다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말미암아 마침내 공인됩니다. 이때가 527년입니다. 어쩌면 이차돈의 순교는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던 불교 공인을 위한 김씨 왕족의 마지막 쇼일지도 모릅니다."

▲ 흥륜사 경내에는  이차돈 순교  부조를 새긴 비석이 있다.
이차돈 순교 부조의 원본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200년이 넘도록 끈질기게 이 땅에 들어오고자 계속 기회를 엿본 불교,  그에 끝까지 맞서 선도 전통을 지켜내고자 저항을 하였지만 결국 시대의 흐름에 거스르지 못하고 스러져버린 선도. 왠지 바람 속에서도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흥륜사 경내를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보았다. 경내의 중앙에는  '만고대광명 이차돈 성자'라는 글과 함께 이차돈 순교 부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비석이 있다.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은 천경림 흥륜사를 돌아보며 "지금까지 돌아본 것만으로도 기존에 학교에서 배우고, 역사를 보았던 시각과 많이 달랐는데, 앞으로 어떤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면 두근두근한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차돈의 순교'라고 표현하지만, 이는 불교의 입장에서 '순교'이지 한민족 고유 선도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생각 없이 당연하게 배운 대로 말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며 설렘과 안타까움을 전했다.

# 태종 무열왕릉

▲ 태종 무열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

천경림 흥륜사를 돌아본 천손문화연구회는 다음 장소인 태종무열왕릉으로 향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신라 중기 첫 진골출신의 왕으로 뛰어난 외교력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고 전하는 인물이다. 이번 장소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신라 시대의 고분을 어떤 것은 '릉陵', 어느 것은 '총塚'으로 부른다. 둘 다 무덤을 뜻하는 글자다.  태종 무열왕릉, 문무왕릉, 내물왕릉 등 '릉'으로 부르는 것과 '천마총', '황남대총' 등 '총'으로 부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 태종 무열왕릉비

바로 그 무덤의 주인이 어느 왕이라고  알려주는 비석 등이 출토가 된 경우 '릉'이라 하고, 왕릉으로 추정 되지만,  주인을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무덤을 '총'이라 한다. 신라 천 년 동안 56명의 왕이 있었으나 능의 주인이 확실하지 않은 게 많다. 왕릉으로 보이기는 한데 어느 왕의 능이라고 딱 떨어지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태종무열왕릉은 그 무덤에 묻힌 이가  '태종 무열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비석이 발굴 당시 출토됐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용을 새긴 비석을 등 위에 얹은 거북이 모양의 비석이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자세를 뽐내고 있었다.

태종무열왕릉비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왕릉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 태종무열왕릉 전경. 능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들이 인상적이다.

"신라의 6부 촌장들은 각각의 성스러운 산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는 왕이 되는 박, 석, 김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박씨는 이 무열왕릉 뒤쪽으로 보이는 선도산(仙桃山)과 이 일대가 박씨족의 성산(聖山)이었습니다. 석씨와 김씨의 성지(聖地)는 어디였을까요?"

정경희 교수가 불쑥 던진 질문에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은 경주의 산을 아는 대로 말하기 시작하였지만 , 정답을 쏙쏙 피해 다녔다.

"석씨는 토함산입니다. 그리고 김씨는 다른 성씨보다 나중에 경주 지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경주 주변에서 잡을 산이 없었어요. 그래서 김씨가 성지로 정한 곳이 계림입니다. 각 성씨의 성지를 중심으로 세력권이 펼쳐졌고, 왕들의 무덤 역시 성지를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무열왕릉을 보면 박씨의 성지인 선도산 아래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열왕과 관련이 있는 고분군들이 이 뒤쪽으로 펼쳐 있습니다. 이는 김씨와 박씨가 연합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신라 중기의 김씨 왕들은 박씨에서 왕비를 뽑습니다. 이는 박씨가 지닌 사상, 종교의 상징성을 왕실로 끌어당겼다는 것이지요. 김씨 왕들은 박씨 왕비를 맞아들여 삼국통일의 기틀이 되는 화랑도를 창설, 통일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각종 역사 드라마의 영향을 받고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을 중심으로 역사를 배워온 우리에게 화랑의 이미지는 김유신, 관창과 같이 뛰어난 무예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선도 사서인 『청학집(靑鶴集)』이나 『해동이적(海東異蹟)』, 또 신라 화랑들의 전기인 『화랑외사(花郞外史)』 등에서는 다르다. 이런 자료에서  화랑의 본보기로 꼽는 물계자(勿稽子)나 백결 선생(百結 先生)을 보면 단지 무예가 뛰어난 것만이 아니라 풍류를 즐기고, 시비를 드러내기보다는 전체의 조화와 화합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화랑도의 정신은 선도문화를 뿌리로 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단군조선에서부터 내려오는 선도문화를 이어받아 신라의 사상과 종교의 중심이었던 박씨족이 화랑도를 주로 이끌었다. 이 점을 김씨 왕들은 십분 활용을 하여 박씨에서 왕비를 뽑음으로써 화랑도를 품을 수 있었다.

김씨와 박씨의 연합으로 왕이 화랑도를 활용하여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으나, 선도에 관한 인식이 더욱 약해지고 그에 따라 선도 사상이라는  중심을 잃어 가게 된다.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김씨의 성지인 계림 북쪽에 김씨왕실의 종묘를 크게 짓습니다. 그리고 태조를 모시죠. 태조를 누구를 모셨을까요?"

회원들은 고개를 갸우뚱 하였다. 당연히 태조면 건국시조인 박혁거세 아닐까?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였는지, 한 회원이 대답을 하였다.

"박혁거세 아닌가요?"

 정경희 교수가 빙그레 웃으며 답을 했다.

"당연히 박혁거세를 모셨을 것 같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누구를 태조로 세웠을까요?"

순간 기자의 머릿속을 지나간 인물이 있었다.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김알지! 그가 아닐까?

"김알지인가요?"

다들 궁금한 듯, 정경희 교수의 입을 쳐다보았다.

"김알지의 다음 세대로 김성한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시조로 내세웠어요. 이는 단군조선의 법맥을 이은 국가 정체성을 바꿔버린 사건입니다. 심지어는 더 나아가서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과 문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묘비명에 시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적습니다. 소호금천씨가 누구예요? 황제 헌원의 후예입니다. 점점 뿌리에 관한 의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단군조선, 배달국으로 이어지는 전통성과 역사의식이 점점 흐려져서 아예 자신들의 시조가 중국 황제 헌원의 후예라고 갖다 붙였어요."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인지. 그동안 신라의 삼한일통의 기틀을 닦고 이룩한 사람이라며 참 대단해 보였던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이 달리 보이는 순간이었다. 한 나라의 왕의 가문이고, 대장군의 가문이 자신들의 뿌리에  이렇게 취약한 역사 의식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신라의 선도문화가 제대로 살아있었다면 적어도 자신의 뿌리 인식은 제대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 서악리 고분군

▲ 서악리 고분군. 한눈에 보기에도 일직선으로 배열이 되어있다.

태종 무열왕릉에서 신라 중기로 넘어갈수록 점점 선도문화와 역사의식이 흐려지고 있음에 아쉬워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이곳저곳에서 이런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들린다.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은 태종무열왕릉의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서 올라갔다. 무열왕릉을 둘러싸고 있던 소나무들을 지나가자 거대한 고분군이 나란히 우리를 맞이하였다.

이 고분들은 누구의 무덤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태종 무열왕릉 뒤편으로 직선을 그리며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태종 무열왕과 관련이 있는 왕이나 왕족의 무덤을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역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김씨 종묘를 세우고 가문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하니, 당시 김씨 왕실의 자신감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었다.

▲ 선도산 성모사에서 바라본 서악리 고분군.
맨 왼쪽 나무들에 둘러싸인 무열왕릉에서부터 또렷한 일직선을 이룬다.

천손문화연구회는 천경림 흥륜사와 태종 무열왕릉 그리고 서악리 고분군을 돌아보며 끊임없이 이 땅을 노렸던 불교와 이를 받아들이고 점차 쇠락해가는 선도문화를 볼 수 있었다. 선도문화가 사라지면서 뿌리와 역사의식마저 희미해져 결국은 자신의 조상이 중국 황제 헌원이라 하였으니 중심철학의 중요성에 대해서 뼛속 깊이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 천손문화연구회 경주 선도문화탐방 세번째 기획기사 ::
[3편] 파소신녀의 마음을 느끼며 선도산을 오르다
- 서악리 삼층석탑, 진흥왕릉, 선도산 성모사, 선도산 정상 적석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