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 년 고도 경주 속에 오롯이 간직된 한민족 고유의 천손문화를 찾는다!

지난 5월 25~26일, 경주에서는 아주 특별한 문화탐방행사가 있었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의 천손문화연구회가 주최한 '경주 선도문화탐방'이 바로 그것. 선도문화는 한민족 전통의 '하늘문화(제천문화)'로 신라 삼국 통일의 주역인 화랑도, 고구려의 조의선인 등이 이 선도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나들었지만, 한민족 고유의 선도문화를 향한 천손문화연구회원들의 뜨거운 열정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그 현장을 기자가 동행 취재하였다.

※ 천손문화연구회 경주 선도문화탐방 기획기사
[1편] 신라 건국의 비밀 - 오릉, 알영정, 숭덕전

혹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이라는 노래를 아시는지.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 대대손손 훌륭한 인물도 많아~ 고구려 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 알에서 나온 혁거세~"

그렇다. 신라의 선도문화는 한민족의 시조이신 단군왕검, 그리고 그 이전의 환웅천황, 그리고 신라의 건국시조인 박혁거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에 천손문화연구회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능이라고 알려진 오릉에서 선도문화 탐방을 시작하였다.

▲ 경주 오릉 입구. 이곳에서부터 천손문화연구회는 경주선도문화탐방을 시작했다.

5월 25일 정오. 경주 오릉 매표소 앞.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서울, 부산, 서산, 구미, 천안 등 전국에서 모인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의 얼굴을 설렘으로 가득찼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경주를 처음 찾는다는 회원부터 경주 토박이까지. 오로지  선도문화의 자취를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달려온 회원들 앞에 천손문화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정경희 교수(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가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중국의 도교, 불교, 유교와는 다른, 고유의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는 풍류도, 선도, 선교 등 다양한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왔는데, 단순히 종교나 신앙이 아니라 '신선'으로 표현되는 전인적인 인격체가 되는 심신 수련법, 즉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밝음을 밝히는 수행문화였습니다.

단군왕검, 그 이전인 환웅의 배달국 시대부터 우리 민족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 수행문화와 이를 통해 내면의 밝음이 깨어난 '천손', 천손문화가 세월이 흐르면서 수행을 잊고, 중심을 잃어가면서 점차 그 본질이 변질되어 끝내 사라졌습니다. 이번 선도문화 탐방은 잃어버린 천손문화를 되찾고, 이 천손문화의 중심이 바로 서서 들불처럼 펴져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마련하였습니다. 그 시작은 비록 미미할지라도 크게 번져나가 상고 이래 천손문화가 다시 부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수와 함께 누군가 구호를 제안했다.

"천손문화부활! 천손문화부활! 천손문화부활!"

천손문화가 다시 살아나 이 땅의 모든 사람의 내면을 밝히기를 바라는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의 마음을 담은 구호가 널리 퍼져 나갔다.

# 오릉(五陵)

▲ 박혁거세의 왕릉으로 알려진 오릉. 신라건국 초기 왕들과 함께 살아 숨 쉬는 듯했다.

 

매표소 문을 지나서 조금 걸으니 우거진 소나무 숲 사이로 새초롬하게 얼굴을 내민 봉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릉은 박혁거세와 그의 왕비였던 알영부인(閼英夫人), 제2대 남해왕(南解王), 제3대 유리왕(儒理王), 제5대 파사왕(婆娑王) 등 박씨 성을 가진 5명의 왕의 왕릉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승하 후 유체가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섯 개로 나누어져 땅에 떨어졌으므로 이를 합장하려 하자 큰 뱀이 나와 방해하므로 그대로 다섯 군데에 매장하였다 하여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천손문화연구회는 봉분이 잘 보이는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오릉을 바라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하기 이전, 이 지역에 있었던 6부는 조선 유민이라고 합니다.  단군조선은 공식적으로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에 의해서 망했다고 되어있지만, 선도 사서에 의하면 그 이전인 기원전 238년에 고열가 단군을 끝으로 나라 문을 닫습니다.

나라의 중심이 사라지니 사람들도 흩어지겠죠. 그래서 각 처로 흩어지게 되지만, 이들에는 단군조선의 후예이고 천손족이라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신라로 정착하게 된 6부 세력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이 6부는 경주 내에 각각 산을 근거지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들이 천손강림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 오릉과 그 시대 배경을 설명하는 정경희교수.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모두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집중을 하면서 듣고 있었다. 정경희 교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런데 기원전 70년경, 단군조선 계통 - 단군조선이 나라이름을 북부여로 바꾸었는데 - 이 북부여 계통의 여성사제이죠, 신녀집단이 경주지역으로 유입됩니다. 이미 6부가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신녀집단은 6부 중 소벌도리 가문과 혼인동맹을 통해서 세력을 형성합니다. 이 신녀집단의 우두머리가 파소 또는 파사소 신녀로 바로 박혁거세의 어머니입니다."

신라는 사상의 중심을 단군조선에 두었었다. 선도가 나라의 중심이었던 단군조선에서 왕은 통치자이기 이전에 당대 최고의 수행자였고,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스승이었다. 그래서 단군조선에서는 '단군'의 지위가 반드시 아들에게 세습 되지 않았었고, 이런 전통을 신라도 이어받아 박, 석, 김 세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이 되었다. 물론,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선도 전통이 흐려지면서 이런 문화가 사라지게 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박혁거세 관련 전승을 보면 번개 빛, 몸에서 나는 빛, 청명해진 해와 달, 밝다는 뜻의 '밝'을 성으로 삼아 '朴'으로 성을 표기한 점, 이름인 '혁거세(赫居世)' 역시 밝음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인 점 등 박혁거세에 관한 모든 수식어가 '빛'과 관련 있다. 이는 박혁거세의 수행자적인 면모를 보여줌과 동시에 당시 신라의 시대 이념으로 선도문화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단군조선으로부터 이어져 온 선도의 정통성, 그리고 박혁거세가 지닌 수행자적 면모. 이것이 북부여에서 이주한 세력인 파소신녀의 아들이었던 박혁거세가 6부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이다.

▲ 설명을 들으며 환하게 웃는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

한참 눈을 빛내며 설명을 듣던 한 회원이 이야기 하였다.
"제가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다 보니 백제, 고구려, 신라 중 유독 신라에서 불교가 늦게 받아들여지고 또, 그 과정에서 이차돈이 죽는 등 진통이 있었는데 이런 신라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군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을 천천히 박혁거세의 전설이 서려 있는 오릉을 둘러보았다. 조선시대 왕릉의 봉분에 비해 엄청나게 큰 박씨 왕들의 왕릉을 보고 있자니, 왠지 이곳에서 함께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부인의 탄생지라고 알려진 알영정을 향해 이동하였다.

# 알영정(閼英井)과 숭덕전(崇德殿)

▲ 알영정으로 들어가는 입구.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이 알영정의 유래 안내문을 살펴 보고 있다.

오릉을 끼고 몇 미터 걸었을까. 알영정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대나무 숲을 지나니 곧 작은 전각이 나타났다. '신라시조왕비 탄강지'라는 제목 아래 알영정의 유래가 쓰여 있었다. 설명에 따르면 알영정은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간 노인이 큰 용을 보았는데 그 용의 옆구리에서 귀녀가 탄생하여 거두어 길렀더니 용모가 아름답고 총명할뿐더러 매우 지혜로워 혁거세 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라고 한다. 왕비가 태어났던 우물이라.. 호기심을 가지고 들어간 기자의 앞에 길죽한 돌 3덩어리만 놓여 있었다.

▲ 알영정 유적. 지금은 덮개돌로 덮어 놓았다.

당황한 기자의 마음을 읽은 듯, 정경희 교수는 얼른 마이크를 잡고 알영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알영정은 우물이라고 알려졌지만, 일제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이 일대에 언덕이 있었다고만 하지, 우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아마도 기원전 1세기에도 우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알영정인데 우물이 아니라니..? 정경희 교수는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신라시대 여성 사제들은 '알', '아리' , 남성 사제들은 '아도' 와 같이 '알'과 관련된 이름들이 많았습니다. 또 박혁거세, 김수로 등 건국시조나 뛰어난 영웅들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많지요. 이는 우주 근원의 생명력에서 나오는 '천지인(天地人)'의 우리말 표현인 '얼울알'을 의미합니다. '천'은 '얼', '지'는 '울', '인'은 '알'을 말하는 것이지요. '알'은 실제 달걀을 말하는 알이 아니라 우주 근원의 생명력을 말하는 것이며, 건국시조나 영웅들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나 '알'계통의 이름은 이들이 우주의 생명력을 받은 빼어난 인물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시간이 흐르며 선도가 중심을 잃고 변질하면서 단순 난생(卵生)설화로 바뀐 것이지요."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는 사람들이 늘어나 있었다. 자녀와 함께 온 부모, 관광객 등이 함께 선도문화유적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새로운 사실에 놀라워했다.

"경주에 우물 '井'자를 쓴 유적이 몇 군데 있지요. 대표적인 곳이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하는 '나정'이고, 이 알영정 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정을 답사하면서 이야기하겠지만, 우물 井의 표상은 '얼'의 한자식 표기입니다. 이 일대는 원래 파소신녀세력과 혼인동맹을 맺었던 소벌도리 가문의 '서청전(壻請田)'이라고 불리는 신성지역 즉, 소도터였습니다. 아마 알영은 이 소벌도리 가문의 여성사제였을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알영부인도 '성인(聖人)'이었다고 하지요. 알영부인과 박혁거세왕은 이성(二聖)이라 불리며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합니다."

자신을 경주 토박이라고 소개한 이동호(41) 회원은 "어렸을 때 이곳의 덮개돌은 굉장히 깨끗한 새 것"이었다며, "덮개돌 아래에는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 신라건국시조 박혁거세의 시조사당, 숭덕전 전경. 세종의 왕명으로 지은 건물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중건하였다.

알영정에서 조금 걸어나오니 박혁거세의 시조사당인 숭덕전이 있었다. 지금도 박씨 문중에서 춘분과 추분에 제향을 봉행하는 이곳은 신라 초기 국가 제사의 중심으로 '밝음', '밝'왕인 박혁거세를 통해 하늘과 통할 수 있는 장소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러나 5세기 소지왕(?~500, 신라 제21대 왕)이 지금의 나정에 신궁을 지으면서 모든 국가 제사의 중심이 옮겨지게 되었고 박혁거세의 사당은 박씨의 종묘 정도로 위상이 격하되어 버린다. 이후 사라졌다가 조선 세종 조에 삼국의 시조사당을 세우라는 조서를 내려 다시 세워지게 된다. 내부를 살펴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 홍살문과 숭덕전. 홍살문이 있었던 자리가 옛 담엄사(曇嚴寺)의 당간지주 자리이다.

이곳 숭덕전 일대는 서청전이라 불리는 소도터였었다. 선도에서 소도는 하늘과의 통로를 의미하는 신성지역으로 여러 곳에 존재하였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신성지역이었던 소도터에는 사찰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곳 서청전(壻請田)에도 담엄사(曇嚴寺)라는 사찰이 자리 잡았다가 조선조에 폐사되었고 당간지주 역시 유교식의 홍살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천손문화연구회의 경주선도문화탐방 첫번째 답사지인 오릉과 알영정, 숭덕전은 신라 건국의 역사부터 지금까지 2천여 년을 지나면서 선도에서 불교, 불교에서 유교로 사상의 변화를 거친 장소였다.


✔ 천손문화연구회 경주 선도문화탐방 두번째 기획기사 ::
[2편] 신라의 불교 수용과 한국 선도의 쇠락
 - 청경림 흥륜사, 무열왕릉, 서악리 고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