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산(馬韓山) 제천(祭天)]

서기전2333년 10월 3일에 조선을 개국한 후, 단군왕검은 삼한(三韓)으로 관경(管境)을 나누었으며, 마한(馬韓)에 웅백다(熊伯多)를 봉하여 달지국(達支國)에 도읍하게 하고 마한산(馬韓山)에 올라 하늘에 제(祭)를 올리게 하였다.

웅백다(熊伯多)는 다(多)라는 이름을 가진 웅백(熊伯)이라는 말이 되는 바, 웅씨(熊氏)인 백작(伯爵)으로서 이름이 다(多)가 되어, 단군왕검에 의하여 백작이 비왕(裨王)인 마한(馬韓)으로 승격된 것으로 된다.

달지국(達支國)은 백아강(白牙岡)이라고도 불리는데, 지금의 한반도 평양(平壤) 자리이다. 마한산(馬韓山)은 백아강에 있던 산으로서 서기전2283년에 혈구(穴口, 강화도)의 마리산(摩離山) 참성단(塹城壇)이 축성되기 이전에 하늘에 제(祭)를 올리던 제천단(祭天壇)이 있던 곳이 된다.

단군왕검이 웅백다로 하여금 마한산에 올라 제천(祭天)하게 하고 조서(詔書)를 내렸으되, “사람이 거울을 보면 곱고 더러운 것이 저절로 나타나고,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 다스림과 어지러움이 정치에 나타나느니, 거울을 보면 모름지기 먼저 모습을 보고, 임금을 보면 모름지기 먼저 정치를 보느니라” 하셨다. 이에 마한 웅백다는, “거룩하신 말씀이시어! 성스런 임금은 능히 무리들의 뜻을 따르는 까닭으로 도(道)가 크며, 어리석은 임금은 독선(獨善)을 잘 쓰는 까닭으로 도(道)가 작사오니, 반드시 안으로 살펴서 게으르지 않겠나이다” 하였다.

[천사(天使) 유호씨(有戶氏)의 당요(唐堯) 토벌(討伐)과 요의 항복]

조선(朝鮮) 개국이후 약 10년이 흐르는 사이에 단군왕검은 내실(內實)을 다지고 바야흐로 전란(戰亂)의 과오(過誤)를 저지른 당요(唐堯)를 토벌하는 것을 실행에 옮겼다. 즉 단군왕검은 유호씨(有戶氏)를 사자(使者)로 삼아 요(堯)에게 배달나라의 질서를 어기고 천리(天理)를 거역한 잘못을 깨우치게 하고 따르지 아니하면 군사를 움직여 정벌토록 하였던 것이다.

서기전2324년에 순(舜)의 나이는 20세였다. 순은 서기전2343년 출생이다. 순은 어려서 포의자(浦衣子)라는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순이 20세 되던 해에 아버지 유호씨(有戶氏)를 따라 환부(鰥夫)가 되어 요(堯)를 치러가게 되었다. 이때 유호씨는 약147세였으며, 요임금은 78세였고, 단군왕검은 47세였다.

환부(鰥夫)는 배달나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무여율법(無餘律法) 4조(條)를 조절(調節)하는 직책이다. 무여율법은 저지른 잘못이나 지은 죄를 씻어 세상을 깨끗하게 하여 홍익인간 세상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율법(律法)이다. 순은 서기전2324년에 환부가 되어 아버지 유호씨를 보좌하였던 것이다. 이때 순(舜)은 아버지를 잘 따랐으므로 효자였다고 기록된다.

유호씨는 큰아들 순(舜)을 환부(鰥夫)로 삼고 작은아들 상(象)을 권사(權士)로 삼는 등 간부 100여명과 군사 수천을 인솔하여 요(堯)가 왕노릇하는 곳으로 향하였다.

소위 요임금이 왕노릇하는 나라의 수도는 평양(平陽)이다. 이 평양은 황하중류 지역의 남류(南流) 동쪽이자 동류(東流)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태원(太原)의 남쪽에 있었다. 유호씨가 무리를 이끌고 감(甘) 땅에 도달하니, 요(堯)는 얼른 정세를 알아차리고 망설임 없이 유호씨를 하빈(河濱)에서 영접하였다. 이에 유호씨는 감(甘)에 자리를 잡고 요로 하여금 항복절차를 밟게 하였다.

요(堯)가 항복한 것은 필시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만약 유호씨에게 대적하였더라면, 이때 당(唐)이라는 나라는 없어졌을 것이다. 당요는 유호씨가 어떤 인물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堯)의 즉각적인 항복을 받은 유호씨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단단히 타이르고 따르지 아니하면 정벌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눈치가 빨랐던 요가 토벌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먼저 선수를 쳐서 항복하였던 것이며, 이리하여 나라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호씨는 요(堯)의 행동을 감독(監督)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요(堯)의 속셈이 나타났다. 그것은 요(堯)가 순(舜)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요임금은 순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 유호씨가 어쩌지 못할 것이라 계산하였던 것이다. 유호씨는 순을 타일러 요에게 협조하는 것을 말렸다. 그러나, 순(舜)은 순대로 야망이 있었던 것이다.

순(舜)은 아버지 유호씨의 타이름을 겉으로만 예, 예 하면서 속으로는 듣지 않고 요(堯)에게 동조(同助)하였다. 서기전2324년부터 10년이 흐르는 사이에 순(舜)은 요(堯)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순(舜)은 아버지를 거역하였으므로 불효자로 기록된다.

[요(堯)임금의 30세 순(舜) 등용]

서기전2314년 순(舜)이 30세 되던 해에 요임금은 순을 등용하였다. 이로써 순은 아버지를 떠나 요임금의 사람이 됨으로써 완전한 불효자가 되었다. 이후 순은 자신의 야망을 키워갔다. 요임금은 순의 야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지 자신의 나라를 보존하기 위하여 순(舜)을 중히 여겼던 것이다. 요임금은 순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순(舜)에게 자신의 두 딸까지 주면서 사위로 삼기도 하였다.

유호씨는 큰아들 순(舜)이 환부(鰥夫)의 직책을 수행하지 아니하고 요(堯)에게 협조하여 등용됨으로써 근심이 더해졌다. 그래서 천사(天使) 유호씨(有戶氏)는 단군왕검 천왕(天王)에게 요(堯)의 소행(所行)과 순(舜)의 불효불충(不孝不忠)을 소상히 보고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