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92년 전 아우내 장터에서 18세 어린나이로 일본의 총검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목 놓아 외치다 순국하신 '유관순 열사'  순국 92주기 추모제를 28일 오전 11시 천안시 병천면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서  천안시(시장 성무용)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회장 류근창) 주관으로 개최한다고 27일 밝혔다. 

이날 추모제에는 신영교 대전지방보훈청장, 성무용 천안시장, 최민기 천안시의회의장, 안홍순 광복회 부회장, 기념사업회원, 유족, 일반시민, 학생 등 1000여 명이 참석한다.

 추모제는  천안시장의 추념사, 대전지방보훈청장・시의회의장・광복회장(부회장 대독)의 추모사에 이어 헌화 및 분향, 흰돌합창단의 아우내 노래 합창, 천안 천남중학교 강효정 학생의 추모의 글 낭독, 유관순 노래 합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올해 최초로 제1회 유관순 음악제가 개최될 예정이다. 한국음악협회천안시지부와 유관순음악제추진위원회가 공동 주관하고 대전지방보훈청 등 3개 기관단체가 후원하는 가운데 사적관리소 야외특설무대에서 12시부터 열린다.  또한 천안시동남구문화원이 주관하고 대전지방보훈청 등 3개 기관이 후원하는 가운데 제38회 학생 백일장 및 사생대회가 유관순열사기념관 일원에서 개최되어 열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더욱 함양하는 계기로 삼을 계획이다.

유관순 열사(1901.12.16~1920.9.28)는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갈전면(葛田面, 現川面) 아우내(川)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열사는  1916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고등과(高等科) 1학년 3학기 때에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맞이하였다.

3월 5일 남대문(南大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강제 명령으로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곧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하였다. 열사는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趙仁元)과 김구응(金球應)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의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원군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한 시위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전 9시,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시위중의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열사는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하여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열사는  시위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갔다. 시위군중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하였고, 일부 흥분한 청년들은 파견소의 뒤로 돌아가서 전화선을 끊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 내로 들어가 숨어 버렸고, 시위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없이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응원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 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발포하고 칼로 쓰러뜨렸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오후 4시경, 유관순 열사는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김병호, 김용이 등 40여 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소산(小山)과 헌병 상등병 주곡(湊谷) 등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열사는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公州檢事局)으로 송치되었다.

열사는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났다.  열사의 가족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사였다.
열사는 후에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경성(京城)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7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열사는 옥중에서도 어윤희(魚允姬)·박인덕(朴仁德)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