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육성을 듣는 공부란 나 스스로 몸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몸을 통해서 직접 자연의 법칙이 쉬지 않고 우리 몸에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가 어머니, 아버지가 만날 때부터 전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양이 만나는 것입니다. 수많은 남녀 중에 어떻게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만났는가. 아버지는 제주도 사람이고 어머니는 서울 사람인데 어떻게 만난 것인가. 그때부터 여러분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 깊게는 어머니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쭉 시작을 거슬러 마디마디 끊으며 올라가 보면 우리의 몸은, 우리의 피는 단군 할아버지에 이르게 됩니다. 단군 할아버지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고조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고조할아버지가 안 계신 것은 아닙니다. 틀림없이 있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나도 못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그런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큰 조상을 단군 할아버지로 하는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늘과 땅의 조화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만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부모님은 천지 부모님이고, 그 다음 부모님이 사람입니다. 모든 만물의 부모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만물을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만물을 창조한 것은 하늘과 땅인 것입니다.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그런데도 종파에 갈리고, 이데올로기에 갈리고 청군, 백군에 갈려서 착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부터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한 그룹의 사람들을 청군, 백군으로 가릅니다. 가르기 전에는 모두 같은 그룹의 멤버들입니다. 갈라서 팔씨름을 시킵니다. 팔씨름에 지는 사람은 4층에서 떨어져야 하는 것으로 규정을 만듭니다. 그것은 하늘이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이 정한 것입니다. 청군 백군 가르는 것도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지면 떨어져서 죽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금방 달라집니다. 그 시간부터 서로 적이 됩니다. 그것이 파입니다. 팔에서는 하나인데 손목에서부터 갈라지고, 몸에서는 하나인데 팔은 둘로 갈라지고, 머리는 하나인데 머리카락은 수없이 갈라집니다.

하늘은 가르는 법이 없습니다. 하늘은 머리카락 따로 만들고 눈 따로 만들지 않습니다. 사람이 갈라놓은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관념이 생깁니다. ‘나는 청군이다’ 관념입니다. ‘나는 홍길동이다’ 홍길동이라는 관념입니다. 나는 홍씨 가문이다, 박씨 가문이다. 관념으로 인해서 그 관념에 들어앉아서 그 전에 무엇이었는지를 보지를 못합니다. 같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종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같은 단군의 자손이지만 고구려, 신라, 백제로 갈라져 싸우다 보니 지금도 호남, 경남 하면서 지방색이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류는 관념의 노예가 되어 세계는 분쟁과 전쟁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관념에서 해방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선악과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악과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과일입니다. 내가 경주 이씨입니다. 종씨를 몰래 불러, 당신만 특별히 주는 것이라고 사탕 한 알을 손에 꼭 쥐어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감동을 합니다. 나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사탕을 똑같이 나눠줍니다. 그러면 감동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주면 감동하지 않습니다.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안 주는 것을 준 그 사탕 한 개의 의미는 똑같이 나눠 가진 천 개의 의미보다 큽니다. 그렇게 인간은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관념입니다.

성인이 나올 때 종교를 만들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종파에 가두려고 나온 분이 아닙니다. 관념의 노예가 되게 하기 위해 나온 분이 아닙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모세가 있기 이전에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 때문에 예수님은 미친 사람으로 몰려 돌을 맞은 것입니다. 관념으로 볼 때 아버지는 목수이고, 예수님의 나이가 서른 살을 갓 넘었는데, 모세가 있기 전에 있었다는 것이 절대 용납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미치기만 한 것이 아니고 도력까지 생긴 것입니다. 능력이 있으니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랍비들에게는 커다란 위험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더 크기 전에 죽이자고 의논을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볼 때는 죄지은 사람 같지 않습니다. 선량하게 보였습니다. 빌라도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대중의 뜻에 맡기기로 하고, 살인 강도범과 비교해서 누구를 살릴 것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빌라도 생각으로는 틀림없이 예수를 살리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유대교의 진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강도 한 사람, 살인자 한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종파가 깨지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려놓으면 유대교라는 기존 종파가 타격을 받을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가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관념에서 해방될 때 성인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다 더 이상 다니지 못한 이유는 ‘원수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그 후 10년이 넘어서야 그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도 모든 성인의 말씀이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모악산에서의 공부를 마친 어느 날 ‘내 몸이 내가 아니라 내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깨닫고 보니 우리가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도 특별한 성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라는 관념에서 벗어난 분이실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직한 사람이 바로 볼 수 있도록 알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양보해라’ ‘착해져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가 양보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바르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깨닫게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두가 나라고 알면 다 보호합니다. 쌍놈이고 양반이고 도둑놈이고 없습니다. 도둑놈도 자기편은 서로 아낍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무조건 ‘착해라’ ‘양보해라’ 하는 것은 위선인 것입니다.

문제는 시야를 좀 넓게 해주자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관념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라는 이름이 있기 전에는 그냥 사람입니다. 사람은 하나인데 그 이름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집도 등기를 내면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것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집이 무너질 때는 나를 피해서 무너져야 하는데 안 그렇습니다. 땅이나 집을 나 혼자 내 것이라고 했을 뿐, 집이 무너질 때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사정이 없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