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 문명의 꽃을 피운 고조선,
중국에 치수법 가르친 기록있어

우리민족 최고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선생은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고자 낡은 책장을 뒤적이며 자료에서 사라진 것은 찾아 끼워 넣고, 빠진 것은 채우며, 거짓기록을 세세히 비교하고 판별하며 조선상고사를 되살리고자 했다.

조선의 발원지는 우리 고어(古語)로 풀어보면 지역과 지명이 확인된다. 예로 왕의 성씨를 ‘해(解慕漱)’로 함은 태양에서 그 뜻을 취하고 왕호(王號), 불구래(弗矩內:불구내)도 태양의 빛(光輝:불그스름함)에서 따왔으며 환(桓國)도 광명(환함)에서 붙인 이름이다. 해가 뜨는 불함산(不咸山:현 백두산)을 바라보고 밝은 신(해)이 쉬고 잠자는 곳이라 하여 사람들은 밝다는 의미로 ‘조선’이라 불렀다. 후세에 이두자(吏讀字)로 ‘朝鮮’이라고 썼다.

환함을 숭배한 조선족은 태백산(백두산)수림은 광명신(해)이 잠자고 쉬는 곳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각지로 흩어져 살면서도 태백산을 본떠 주변수림(樹林)을 신단이란 뜻의‘수두’로 부르고 제를 올렸다.

적이 쳐들어오면 각 수두부락들이 연합해서 물리치고 그 때 가장 공이 큰 수두를 최고의 ‘신’자를 붙여’신수두’라 불렀다. 삼한사(三韓史)의 소도(蘇塗)나 신소도(臣蘇塗)는 수두와 신수두의 음역이다. ‘진단구변국도’ 에 震壇(진단)의 ‘震’도 ‘신’의 음역이고 ‘壇’은 수두의 의역(意譯)으로 단군(檀君)은 곧 ‘수두 하느님’이다.

따라서 많은 단군들 중에 왕검은 신수두였다. 선사(仙史)에도 ‘평양은 선인(仙人)왕검이 도읍했던 곳이다’라 했고 위서(魏書)에도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는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왕검(王儉)은 이두문으로 임금이다. 수두 신을 이용하여 태백산에서 나라를 세우고 역대 제왕칭호와 경성(京城) 명칭을 임금이라 했던 것이다.

그 후, 불교와 유교가 성하면서 선교가 쇠퇴하며 기록마저 유실되니 상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국 굴원(屈原)의 초사(楚辭)나 사마천의 사기,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오제(五帝), 오월춘추(吳越春秋) 등, 오히려 중국사서에 우리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예로 우리 고기(古記)에는 ‘단군왕검이 아들 부루(夫婁)를 보내어 도산(塗山)에서 하우를 만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오월춘추에는 ‘당요 9년에 홍수가 져서 요가 하우(夏禹)에게 물을 다스리라고 명하였다. 우가 백마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꿈에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가 나타나 구산(九山) 동남쪽에 있는 도산(塗山)에 신서(神書)가 있으니, 세 달 동안 재계하고 이를 내어보라고 했다. 우가 금간옥첩(신서)을 얻어 오행의 원리를 알아 홍수를 다스렸다. 이에 주신(州愼)의 덕을 잊지 못하여 정전(井田)과 법률 및 도량형의 제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은 당시 5部(동·남·서·북·중)를 남(藍)·적(赤)·백(白)·현(玄)·황(黃)으로 불렀다. 현이(玄夷)는 바로 북쪽 현부로써 단군왕검의 아들, 부루(夫婁)가 창수사자로 임명되어 도산에서 삼신오제교(三神五帝敎)의 한 부분인 오행을 전하고 치수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금간옥첩을 보냈으니 조선은 문자를 읽고 익힘이 이미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고 주신의 덕을 기려 세운 법으로 조선은 무게, 길이, 부피를 통일해서 질서도 잡혔으며 조세법이 통용된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사서에 조선을 ‘주신(州愼), 숙신(肅愼), 직신(稷愼), 식신(息愼)’으로 번역되어 있으니 주신은 바로 조선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역사서보다도 그들의 흔적으로 더 큰, 조선의 전개상황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