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作

 이순신 장군께서는 임진왜란의 매우 급한 상황에서 어렵사리 짬을 내어 여수에 계신 어머님을 찾아뵌다. 갑오년(1594) 정월 11일이다. ‘어머님께 가니 아직 주무시고 계시어 일어나지 않으셨다. 웅성대는 바람에 깨셨는데, 기운이 가물가물해 앞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 하니 다만 애달픈 눈물을 흘릴 뿐이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데 착오는 없으셨다.’ 

 이제는 기력이 쇠하여져만 가는 늙은 어머님과 그 어머님 보이기에 민망하여 자신의 백발을 뽑는 50세의 아들의 만남이다. 두 분은 밤이 이슥하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셨으리라. 다음날, 아침상을 물리고 장군은 이승에서는 다시는 못 만나 뵈올 1박 2일 만남의 작별 인사를 올린다.

 아침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하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으로 탄식하지 아니하셨다. (난중일기)

 8월 29일, 경술국치 101년을 맞이하기 전에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영원히 가슴에 새길 그 어머님과 그 아들의 대화이다.
 

 그로부터 약 270여 년 후인 1870년대부터 일본의 조야는 말끝마다 이미 ‘동양 평화’를 들먹인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조류 속에 미국으로부터 개항을 당하였고, 점차 국가적 적자가 누적되었다. 필사적으로 살 길을 찾는 일본에는 조선침략 책략인 정한론(征韓論) 역시 동양 평화가 그 명분이나 사실인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년 침략의 재판이다.
 

 정한론(征韓論)의 대표적인 정신적 지주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다. 그의 두 제자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초대 총리, 네 번의 총리 역임)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 일본군 근대화의 주역, 두 번의 총리 역임)이다. 동지이자 라이벌인 두 사람은 일본정부를 대변한다면 또 한 명의 당시 일본 제일의 논객으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4년생)가 있다. 일본의 가장 고액권인 1만 엔권 초상의 장본인으로 우리가 세종대왕을 존경하듯이 일본인은 그를 존경하고 있다. 1860년 미·일통상조약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사절단으로 도미하여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때까지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고 많은 서양 서적을 가지고 귀국하여 《서양사정》 등을 저술한다. 이 책들은 일본의 여성들도 길을 가면서 읽을 정도의 대단한 국민적 베스트셀러가 되고 1882년 《시사신보(時事新報)》 주필이 되어 일본의 민권과 국권의 신장을 주장한다. 조선의 김옥균 등, 친일 개화 정치가들도 그의 입김 어린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은 요마 악귀의 지옥국’ 이라고 칭하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탈피하여 서구에 편입하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학설로 주장함으로써 두 얼굴의 수많은 제국주의 추종자들을 양성한다.
 

 일본의 ‘낭인(浪人)’이란 떠돌이 사무라이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은 메이지유신으로 일본 내 입신출세가 불가능해지자, ‘일본의 대륙 팽창’을 주장하며 조선이나 중국으로 건너가니 대륙 낭인(大陸浪人) 또는 지나 낭인(支那浪人)이 된다. 중국 신해혁명에 뛰어들고, 만주 마적의 두령이 되어 만몽국 건설을 시도하고, 기자나 문필가로 대륙 팽창 여론 전파에 나서기도 한다. ‘천우협’이라는 낭인단체는 조선의 동학 농민군을 지원하려고 시도했고,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흑룡회는 조선의 매국단체인 일진회를 조종해서 한-일 병탄의 숨은 주역이 되었다. 그들은 정한론이 대두된 1873년부터 조선을 병합한 1910년까지 공식 라인에 앞서 스스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메이지유신 이후 태평양전쟁 때까지 그들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애국지사나 재야 정치인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므로 100년 전 일본의 한국 병탄은 일본제국주의 정권과 군부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관·군·민의 총체적이고도 끈질긴 합심 프로젝트이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37년간 ‘정한론’ 이 지도자들에 의하여 범국가적인 시책이 되어 무르익어 조선 병탄이라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조선의 대신들과 조야는 과연 무슨 정책을 폈는가?

 중국 일변도의 모화사상에 따른 쇄국정책과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이 있었고, 매국 대신들의 경쟁적인 ‘일본 빌붙기’와 ‘부정부패’로 결국 나라를 잃고 만다. 대한제국의 대신들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럽게도 나라를 판 돈을 주지육림과 화투판에서 날리니 부패의 극치이다. 

 ‘해풍부원군 윤택영, 황후궁대부 윤덕영, 중추원 고문 이지용, 심상익 등은 작일 하오 6시에 화월루에서 질탕히 연회를 벌리고, 10시에 동대문 안 광무대로 가서 또 한 번 놀았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5일 자)

 윤택영의 별명은 ‘채무왕(債務王)’ 으로 많은 돈을 호화생활에 탕진한 결과 300만 원의 빚을 지으니, 당시 서울 시내 고급주택 한 채에 1만 원씩 하던 때이다. 허랑방탕한 생활로 나라를 팔은 돈과 가산을 탕진한 조선 귀족은 윤택영 외에도 조민희, 민형식 등 33명에 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일말의 가책도 없이 연일 삼삼오오로 모여서 주연(酒宴)과 화투판을 벌인다. 

 "총리대신 이완용 씨 집 산정에서 모모 관인이 모여 화투판을 벌이고 노름을 한다는 말은 이미 게재하였거니와 다시 들은즉 그때 노름하던 사람 중에 박의병 씨가 3천 환을 잃고, 이완용 씨의 종질 이용구 씨가 5천 환을 얻었다더라." (신보, 1909. 3. 4.)
 

 당시 순사 월급이 250환이었으니 하룻밤에 순사월급 200년에 달하는 돈을 따고 잃은 것이다. 총리대신 이완용도 견인증(牽引症: 근육이 쑤시고 아픈 증상)을 잊기 위해 문객들과 화투를 쳤다. 그것도 시정의 도박꾼들이 아닌 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대신들이 매일 하는 짓이었으니 어찌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취침 전에 식혜를 드신 후 갑자기 돌아가신다. 고종황제의 시신 상태는 몹시 처참하여 팔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바지를 찢어야만 했고, 이가 빠져 있고 혀가 닳아 있었다. 목과 복부엔 30cm가량의 검은 줄이 길게 나 있었다.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의 일기) 그날 밤, 고종을 호위해야 할 궁성 총책임자는 총리대신 이완용이었다.
 

 우리는 36년간의 필설로 이루 다할 수 없는 일제의 압제를 받고 결국 1945년, 유엔에 의하여 가까스로 나라를 되찾게 된다. 패전국이 된 일본의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항복문서에 사인을 한 날 일기를 쓴다.

 “일본은 졌다. 그러나 조선이 이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조선인들의 머리에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지 교육을 심어 놓았다. 조선인들은 선조들의 찬란한 업적을 잊고 100년 이상 노예처럼 서로 헐뜯고 증오하며 분열할 것이다. …중략….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서기 2011년(단기 4344년), 지금의 대한민국 언론은 ‘부패공화국’이라는 자조서린 표현을 서슴없이 쓰고 있고, 모든 국가 시책은 남북으로, 동서로, 여, 야로 쪼개지고 갈라지고 있다.

 최근에는 ‘복지시책’으로 나라가 갈리니 극심한 ‘비 복지상태’ 가 되어간다. 이제 또 다시 400년 전, 100년 전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베 노부유키의 망령이 되살아오는 비극의 전야제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에 효(孝, 인간사랑), 충(忠, 나라사랑), 도(道, 지구사랑)의 홍익 중심 가치를 바로 세워야 할 일이다. 바로 한민족의 국학정신인 것이다.

 그것만이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 내는 길이다. 

                                        (사)국학원 원장(대), 한민족 역사문화공원 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