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는 시비를 걸면서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19년 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힘으로 조선을 침공했던 악몽이 떠올라 몹시 씁쓸하다. 그 당시 1, 2차 진주성 전투로 진주 목사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관계는 원수지간이 된다. 오죽하면 - ‘모쿠사의 목’ (김시민 목사)을 일본으로 가지고 오라- 는 명령을 내렸겠는가?

그러나 이 명분 없는 살육의 전쟁을 피하고자 일본의 한 유능한 젊은 장수가 있었다. 22살의 일본의 ‘사야가(沙也可)'장군은 조선 땅에 상륙한 지 1주일 만인 4월 20일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과 김응서(金應瑞)에게 다음과 같이 귀화하려는 마음을 바친다.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 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 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후략)” 투항한 ‘사야가’장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의병, 관군과 함께 벌인 78회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사야가의 모하당 문집에는 그가 이순신 장군에게 보내는 답신도 적혀 있다.
"하문하옵신 조총과 화포,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조정에서 내린 공문에 따라 벌써 각 진에 가르치는 중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기어코 적병(왜군)을 전멸하기를 밤낮으로 축원하옵니다." 종전 후 그는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한다. 

그가 바로 조선의 높은 문물을 보고 항복한 일본의 장군 모하당 김충선(慕夏堂 金忠善 1571~1642)이다. 그는 진주와의 악연을 끊고 한가족이 됨으로써 한일간의 새로운 평화의 길을 트고 회복하고자 진력하였다.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은 모래(沙)에서 나온 금(金)이라는 뜻으로 선조가 성을 하사하니 사성 김씨의 시조가 되고 본관은 김해 김씨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삼란공신’이 되었음에도 나라가 주는 녹을 받지 않는다. ‘신하로서 당연히 한 일에 무슨 대가가 필요하냐?“는 올곧은 마음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결혼을 하니 서른 살이 되는 해(선조 36년)이다. 조정은 여진족을 막기 위해 내방소를 설치하고 그에게 북방 경비를 맡기니 10년간 빈틈없이 지켜낸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북쪽 땅이 짓밟혔다는 소식을 듣자 66세의 나이에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달려가던 중 조정에서 항복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춘추의 대의도 끝났구나."하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경상도 달성군 우록에 터를 잡아 후학을 가르치며 살다가 72세로 세상을 떠난다. 우록동 삼정산에 부인과 나란히 묻히고 지증추 부사, 병조판서에 추증된다. 뺨 붉은 22세의 젊은 청년 왜장 ‘사야가’는 ‘김충선’ 장군이 되어 조선의 땅에 뼈를 묻고 지금도 후손들이 번창하고 있다. 그가 흠모한 것은 힘으로 빼앗음이 아니라 평화이었고 비참한 전란 중에도 발견되는 조선인의 높은 효충도 정신이었으니 바로 국조 단군의 홍익정신이었다.

임진왜란 첫해, 1592년 6월 5일 용인전투에서 단 1천 명 기마대로 약 5~10만 명으로 추산되는 조선 근왕병을 대패시킨 ‘와키자카’는 ‘히데요시의 7본 창’이라고 불리 우는 명장이다. 그는 전형적인 사무라이로 명예를 중요시하고, 차를 좋아했으며, 함부로 살생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수하로 만든 유능한 장수였다. 이순신장군 보다 8살 연하인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년 - 1626년)는 1592년 7월 8일 견내량을 필두로 이순신 장군을 세 번을 만나 그때마다 패하게 된다. 와키자카 역시 전쟁일기를 쓰고 있었다. 피아간에 이름난 일본의 용장이 이름 없는 조선 제독에게 세계 해전사에 남을 대패를 하니 어찌 남다른 소회가 없겠는가. 견내량(한산대첩) 대패의 충격에 6일간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했다고 자인한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이었을 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며칠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 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 런지 의문이 갔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근대 일본 해군에 쓰시마 해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의 러시아의 발트함대를 무참하게 패배시킨 ‘도고 헤이하치로 (東鄕平八郞 1848.1.27~1934.5.30)’ 제독은 천하가 인정하는 명장이다. 그러한 그가 이순신 장군을 스승처럼 존경하고 높게 평가하는 것은 잘 알려졌다.

러일 전쟁 승전 후 도고 제독이 세계적인 영웅이 되어 있을 즈음, 미국 해군사관학교 4학년 임관 후보생들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인터뷰 과정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때, 도고 제독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조선의 수군을 지휘한 이순신 제독입니다."라고 대답 하였다. 학생들이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해 묻자, "이순신은 해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독이며 이순신과 비교하면 자신은 하사관도 못 된다."라고 겸허하게 대답했다. 적의 장수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아 절대적인 약세에서 최대의 승리로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은 ‘도고’는 이순신의 가장 충실한 제자가 아닐 수 없다.

평생을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김구 선생은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높은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중략)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국조 단군의 홍익철학에 근거한 코리아의 ‘뇌교육’을 전 국민이 배우도록 하였다. ‘홍익인간 이화세계’ 야 말로 일본뿐 아니라, 중국, 미국, 러시아, EU, 남미 등 모든 나라가 존경해 마지않는 21C의 문화대국의 기본철학이다. 왕인박사가 백제의 높은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하자, 일본인들이 왕인박사를 지금까지 흠모하고 있다.

국조 단군의 홍익철학을 바탕으로 한 한민족의 높은 문화의 힘이 전파된다면 저들도 독도라는 작은 섬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일본 국민에게 한국의 드라마와 가요를 사랑하는 한류라는 외적 분위기와 150여 군데의 일본 내의 단 센터의 설립으로 정신적인 문화 전파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얼마 전 정부는 개천절을 요일제로 바꾸려 하다가 정신이 올바른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자 놀라서 철회한 바가 있다. 우리가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올바로 세울 때 일본의 국회의원들도 자신의 잘못을 알고 스스로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리하여 제2, 제3의 올바른 일본인, ‘사야가’ = ‘김충선’ 장군이 나타날 것이다.

이것만이 독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는 본질적인 해답이다. 

                                                  사) 국학원 원장(대), 한민족 역사문화공원 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