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 | 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장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10년, 망국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러자 양반 사대부들 사이에 두 조류가 형성된다. 하나는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 매국의 조류이고, 다른 하나는 이에 저항하는 항일 애국의 조류였다. 항일 애국의 조류에 몸을 실었던 사람들은 그해 겨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그 조류에 합류한 집안이 이회영 일가다. 이회영 6형제는 가노들을 해방하고 전 재산을 팔아 온 가족과 함께 횡도천을 거쳐 유하현 추가가에 도착했다. 이회영 일가는 전답과 가옥을 판 40만 원(현시가 600억 원 추정)의 거금으로 1911년 추가가와 합니하 등지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1920년 폐교될 때까지 3천 5백여 명의 독립군 기간요원을 배출하였다.

이들이 후일 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만주 무장투쟁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택한 망명과 항일의 대가는 혹독했다. 이회영은 생활고로 두 딸을 중국 고아원에 보내야 했고,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은 북경에서 비지로 연명하다가 영양실조로 죽었다. 조선 말 영의정의 양자였던 그가 망명을 택한 대가는 이국땅에서 홀로 굶어 죽은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남의 집 종가 자손들이 좋은 집 두고 뭐 때문에 타국에 가서 고생하며 그 좋은 재산 다 털어먹었는가?’라고 비웃었다.

반면 또 한 조류였던 친일 매국의 사람들은 ‘나라를 판 대가’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아 대대로 호의호식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이 나라의 왕족들과 집권명문가 출신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3백 년간을 집권한 노론 명문가들이 그들이었다. 집권세력이 앞장서서 나라를 팔아먹는 그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조선사 편수회 출신 해방 후 학문권력 장악… 독립운동사 연구금지

1945년 나라는 해방되었다. 온전한 나라였다면 친일 매국의 사람들은 숨을 죽여야 했을 것이고, 항일 애국을 한 사람들이 이 땅의 주역이며 지도자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해방 후 정국에서 항일 애국의 길을 택했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반면 친일에서 친미로 변신한 친일 매국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친일파에서 반공투사를 자처하였다.

‘도둑이 매를 드는 세상’이 된 것이다. 반민특위까지 해체되면서 이 땅은 더 이상 ‘친일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가 된 것이다. 해방 후 우리 역사는 어찌 되었는가? 해방 후 공간에서 ‘한국사’는 부재였다. 민족사학을 주장하던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미 유명을 달리하였고, 사회주의 학자들은 북으로 올라간 상황에서 이 땅에 남은 친일파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민족사의 비극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 부류들이었다.

국혼부활 ·정신적 광복이 우리의 사명

그 중심에 한국사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조선사편수회’의 편수관 출신들이 있었다. 이들이 해방 이후의 학문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을 때 일제 식민사관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때문에 해방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대부분의 역사학도에게 한국독립운동사는 일종의 금기 영역이었다. 한 나라가 숱한 고초 끝에 독립을 쟁취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면 가장 먼저 공 있는 자에게 상을 내리고 죄 있는 자에게 죄를 묻는 논공행상과 함께 독립을 쟁취한 역사를 기술한 독립운동사 연구가 우선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표면상 현대사는 객관성을 갖기 어렵다는 명분에 의해 독립운동사는 철저하게 외면되고 말았다. 그들이 독립운동사 연구를 금지시켰던 실제적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 한국 경제의 성장력은 국제사회가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력의 제고에 맞추어 나라의 품격, 즉 국격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국격은 경제력만으로 이룰 수 없다. 이에 걸맞은 나라 정신, 곧 국혼이 바로 설 때 우리 국가의 위상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이며, 그 국혼은 바로 우리 역사의 회복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나라는 찾았으나 역사는 찾지 못한 우리 민족, 현재 우후죽순 격으로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는 이런 정신적 가치를 사장시킨 채 물질적 성취만 추구한 결과다.

또다시 맞는 광복절, 이제 우리에게는 정신적인 광복이 필요하다. 역사의 부활, 국혼의 부활을 통해 정신적 광복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시대적 사명이라 할 수 있다.

<국학신문 8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