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달래 화전 <사진출처=국립민속박물관 세시풍속 사전>

 

오늘은 선조들이 예로부터 설,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로 꼽았던 한식(寒食) 이다. 이날의 특징적인 세시풍습은 조상의 묘를 살피고 이날 불을 피우지 않으며 찬 음식을 먹는 것이다.

동지로부터 105일 째 되는 날로 음력절기가 아니며, 보통 음력 2월 또는 3월에 들고 양력으로는 보통 4월 5~6일경이니 식목일 무렵이다. 날씨가 따뜻해져 봄볕이 완연해지는 때로 농가에서 볍씨를 담그고 봄 밭갈이를 하며 한 해 농사를 시작한다.

또한 한식과 식목일은 예나 지금이나 1년 중 산불이 가장 많이 나는 시기였다. 2002년에는 하루 동안 63건의 산불이 일어났으며, 올해는 크게 줄었으나 예년에는 평균 30건이 넘는 산불이 발생했다. 2004년에는 낙산사 원통보전(圓通寶殿)을 비롯해 고향당, 무설전, 요사채, 범족각 등 주요보물이 소실되는 화재를 겪기도 했다. 한식날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은 것은 산불을 경계한 측면도 있다.

한식은 새 봄,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면서 돌아가신 조상을 섬기는 풍속이다. 탄생과 새로움을 맞이하기 위해 죽음, 옛것과의 헤어짐을 준비하는 멋스런 절기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본다.

한식의 세시풍습

옛 어른들은 미리 익힌 음식을 마련하여 한식날을 보냈다. 절기음식으로는 찹쌀가루을 반죽한 위에 진달래 등 봄꽃을 얹어 화전을 부쳐 먹고 역시 진달래꽃으로 담근 두견주를 마셨다. 싹이 막 움튼 쑥을 캐서 쑥떡을 만들어 조상님께 먼저 올린 후 가족끼리 나눠 먹기도 했다.

한식은 무엇보다도 조상을 기리는 날이다. 나라에서 종묘와 각 능원(陵園)에서 제향하고 민가에서는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서 묘 둘레에 나무를 심는다. 이때 무덤이 헐었으면 떼(잔디)를 올려 단장을 하는데 이를 개사초(改莎草)라 한다.

요즘도 한식을 전후한 주말이면 각지에 흩어져 사는 형제자매 친척들이 모여 조상 묘를 찾기도 한다. 1995년 한 언론사의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가 한식날 성묘객을 위해 시외 공동묘지로 운행하는 버스 30개 노선을 연장 운행했다.”고 하니 추석 못지않게 인파가 붐비는 절기였나보다. 그러나 2005년 주5일 근무제 도입과 함께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면서 식목일이면 붐비던 한식 성묘인파도 많이 줄었다.

한식의 기원

한식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춘추시대 진(晉)나라 문공이 왕위를 둘러싼 정쟁을 피해 망명길에서 극심하게 굶주렸을 때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 대접했던 개자추( )에 얽힌 설화이다. 문공이 즉위한 후 작은 공을 세운 자들이 득세하고 자신이 소외되자 개자추는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에 은둔했다. 뒤늦게 문공이 등용하고자 했으나 개자추가 세상에 나오기를 거부했다. 문공은 그를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질렀으나 끝내 불에 타 죽었다. 충신 개자추를 기리기 위해 불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하나는 원시 사회에서 모든 생명은 주기적으로 갱생해야 하는데 오래된 불은 생명력이 없고 인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 매년 새로 불을 만들어 사용했던 고대의 개화(改火) 의례에서 유례 했다는 설이다. 풍년이 들고 나라에 나쁜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해마다 봄이 되면 새로이 불을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이 설이 보다 유력하다. 한식은 옛 불의 소멸과 새 불의 점화까지의 과도기인 셈이다.

우리 역사상 한식을 지낸 기록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

우리 역사상 언제부터 한식을 지냈을까? 신라 때 최치원이 지은 <계원필경>에 전사한 장수들을 한식 때 위로하는 제문(祭文)이 들어있다 하니 이미 신라 시대부터 지내온 절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9대 명절에 속하는 큰 명절로 관리에게 성묘를 허락하고 죄수의 형벌을 금하기는 금형(禁刑)을 했다. 고려 문종 24년(1070년)에는 한식과 연등 날짜가 겹치니 연등을 다른 날짜로 바뀌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한식은 4대 명절로 지켜졌다. 한식에 관한 많은 시가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수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세종 13년 (1431)에 “한식 사흘 동안 이른 아침 바람이 잘 때 불을 때어 음식을 익히는 것을 허락하고 주야로 일체 불의 사용을 금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매년 임금이 내병조에서 바친 버드나무를 마찰하여 일으킨 불을 궁중에 있는 관청과 대신의 집에 나누어주는 풍습도 있었다.

민간의 풍습을 살펴보면 강원도에서는 풍성한 열매를 기다리며 과일나무의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넣는 과일나무 장가보내기를 한다. 또한 한식날 날씨로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한식에 날씨가 좋고 바람이 잔잔하면 시절이 좋고 풍년이 들며 어촌에서는 고기도 잘 잡힌다. 그러나 폭풍이 불고 큰비가 내리면 반대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