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평에서 본대와 합류했다. 적의 기병을 섬멸하였으나 적의 포위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적은 우리를 완전히 포위한 줄 알고 공격하면 독립군은 천수평 계곡을 교묘히 빠져나가 저희들끼리 싸우다 자멸하기도 했다. 3일간 전투에서 적은 겁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형편이었다. 원인은 우리 독립군의 복장이나 모자가 일본군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첫 전투인 왈루거우봉(峯) 전투에서는 안개가 잔뜩 낀 가운데 무분별하게 일본군 저희끼리 싸워 죽기도 하였다.

(당시 독립군과 일본군의 복장이 떡갈나무 빛으로 흡사했으며 독립군을 훈련시켜 온 교관들도 일본군대에서 훈련을 받은 후 망명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훈련 내용이나 실제 전투에서 작전방법이 일본군과 다름이 없었다. 독립군은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 작전을 효과적으로 폄으로써 많은 전과(戰果)를 올릴 수 있었다.-박영석 교수)

우리는 기적적으로 포위를 뚫고 싸웠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싸웠다. 주민들에게서 주먹밥을 얻어먹고 싸웠다. 총탄이 비 오는 듯한 중에 치맛자락에 주먹밥을 던져주는 애국부인들은 독립군의 용기를 백배나 나게 했다. 독립군들이 잘 싸웠다는 것보다 부인들의 애국심이 청산리 전투에서 승전을 시킨 줄로 안다.

우리 군대는 왕청현을 향하여 퇴각하였고 부상병과 낙오병은 본대를 잃어버리고 돈화현 방면으로 갔다. 나도 낙오병이 되어 돈화현으로 갔다. 연길현 왕바버자라는 촌락에 낙오병 30여 명과 부상병 2명이 모였다. 이곳은 돈화현접경지역이었다. 그런데 적병이 여기도 온다는 정보가 있었다. 무기들을 이 지방군정서 지방국장에게 맡기고 돈화현으로 갔다.

나도 낙오가 되어 산에서 헤매다가 천수평에서 멀지 않은 화룡현 경성촌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양민들의 말이 “독립군들이 왕청현으로 간다고 합디다. 저기 산으로 가면 수백 명이 지나가서 산길이 났을 것이요.”라고 길을 가르쳐주며 “빨리 가면 만날 것이요.”한다. 부인이 밥을 한보자기 싸서주며 “우리가 먹을 아침밥인데 우리는 또 지어 먹을 요량하고 빨리 가라”고 한다. 참으로 눈물이 날만큼 감사했다.

산으로 들어서니 우리 군대가 지나간 길이 환하게 대로같이 뚫렸다. 얼마쯤 가보니 차츰 희미하게 행적이 사라졌다. 산산이 흩어져서 행적을 감춘 것이다. 산골짜기를 따라 내려가 보니 중국인 산막이 있다. 들어서니 중국인은 깜짝 놀라며 어서 가라고 한다. 방금 왜병이 와서 “독립군을 보았느냐고 묻기에 못 보았다고 하였다. 또 다시 올지 모르니 빨리 피하라”고 했다.

나는 또 산으로 올라갔다. 대삼림 고원지대였다. 동서남북을 분별할 길이 없었다. 계속 헤매다보니 왜적들이 노숙한 곳이었다. 군데군데 모닥불 놓은 자리가 십여 군데 있고 담배꽁초며 종이조각이 널려있었다. 또 헤매었으나 방향을 잡을 수 없다. 내 갈 방향은 본대가 있다는 안도현이다. 그런데 배가 고파 밥을 먹고 보니 목이 말라 죽겠다. 그러므로 물이 있음직한 곳을 헤매기 시작하였다. 고원지대에 무슨 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럭저럭 해가지고 어둠이 닥치면서 춥기 시작했다. 다니다 보니 아름드리나무가 바람에 뽑힌 우묵한 곳을 발견하였다. 나뭇잎을 모아다 쌓았다. 구덩이가 채워졌고 거기에 누었다. 푸근한 나뭇잎으로 몸이 더워진다. 얼마를 잤는데 깨어보니 달빛이 보인다. 달을 보고 갈 방향을 대강 알아내고 다리를 펴고 잤다. 그리고 일어나 동서를 분별하고 서쪽으로 자꾸 갔다.

큰 갈밭이 나타났다. 그리고 갈밭 한복판으로 길이 났다. 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반갑기 한이 없다. 그런데 길을 내려가다 보니 말 발자국이 났다. 오고 간 자국들이 났다. 이것은 반드시 왜놈의 기병이 다닌 자국인데 가야하느냐? 도로 산으로 들어가야 하느냐? 목은 말라 죽겠다. 해는 넘어서 간다. 밥도 다 먹은지라 배도 고프다. 이 갈밭을 지나가면 반드시 인가가 있을 듯하다.

마침내 찾아가기로 결심을 하고 갈밭을 지나오니 중국인 부락이 보인다. 앞으로 산 밑의 독립가옥을 찾아갔다. 다행히도 왜병은 어제 왔다갔다고 한다. 물과 밥을 줘서 먹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물으니 안도현이라 한다. 멀지 않은 곳에 네 동포의 집이 있으니 거기가서 자라고 한다. 그래서 동포의 집을 잦으니 의군부(義軍府)의 독립군 3명과 서로군정서 학생 2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