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한글’은 한문 문헌이 담지 못한 다양한 전통문화를 품고 있다. 옛한글은 조선 상층 남성층뿐만 아니라, 여성과 하층민의 비공식적인 문화를 표현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상층 남성은 경우 《논어언해》 같은 옛한글 번역서를 통해 유학에 입문했으며 한글 시조·가사 등을 통해 노래하였다. 《두시언해》와 같은 시집의 한글 번역은 중국의 고급문화를 조선에 완전히 수용하는 국가 차원의 번역 프로젝트였다. 이는 옛한글이 상층 남성의 학술·문화 수단이었음을 보여준다.여성은 주로 옛한글로 의사소통을 하였는데, 이 속에 포함된 사적인 내용은 공식 기록
광개토대왕릉비의 해석을 놓고 지금까지 한·일 양국 간의 논쟁은 팽팽했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일부 문장을 들어 야마토왜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해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而爲臣民’을 ‘신묘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