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오랜 고난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거듭되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항상 민족정체성을 지켜왔다. 외압에 눌리면서도 결코 동화되는 것을 거부했다. 우리 주변의 강자였던 말갈ㆍ여진ㆍ만주ㆍ몽골족 등의 행방을 살펴보면 한민족이 얼마나 강력하게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왔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고대부족국가 형성시기에 중국 한나라의 침략으로 국토심장부에 400여 년 동안이나 낙랑군의 식민 지배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고려시대 40년의 몽골(元) 지배, 조선전기 250년의 명나라 간섭, 병자호란 이후 260년의 청국 복속, 일제 36년 식민지배 등 가혹한 외세의 침탈과 지배를 받으면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냈다. 참으로 값지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의 원형질이 되어온 ‘민족’이란 접두어는 언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외세에 짓밟히고 강대국의 지배와 속박에 시달려온 우리에게 민족이란 용어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한민족은 고려가 몽골제국과 맞서 싸우면서 내부적으로 민족의식,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게 되었다. 무인정권 100년과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된 민족수난기에 도리어 안으로는 내적(內的)인 민족통합의 정신적 일체감을 자각하고 형성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단군을 국조로 하는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저술되고 불법(佛法)의 힘으로 외적의 격퇴를 바라는 <고려대장경판>이 만들어지는 등 민족적 역사(役事)가 진행되었다.  이인로의 〈파한집〉이 발간되고 이규보의 <동명성왕>도 저술되었다.

우리 사가들이 민족위난기(危難期)에 단군을 ‘국조(國祖)’로 인식하면서 민족적 일체성을 강조한 데 비해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를 구성하고 여기서 우리 역사의 왜곡 날조를 일삼았다. 특히 단군을 신화로 만들고 조선사의 첫머리를 한사군에서 시작함으로써 단군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삭제하여 일본의 역사와 대등하게 연조(年條)를 조작했다. 

심지어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같은 일본 관학자들은 단군신화가 불가(佛家)의 승려나 무격참위가(巫覡讖緯家)들이 날조한 이야기라면서 신화가 아닌 전설로 격하시켰다. 한국의 일부 친일 사가들이 이를 수용하기도 했다. 

일본은 최근에도 임나일본부설 등 역사 왜곡을 일삼으며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패권주의를 지향한다. 국내 일부에서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역사 왜곡에 화답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동북공정 프로젝트에서 고조선,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역사 왜곡을 일삼고 있어 우리 역사는 내외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올해는 일제가 청국과 ‘간도협약’으로 간도를 중국에 넘겨준 100주년이 된다.  그런데 얼마 전 이시하라 신타로 일본 도쿄도지사가 “북한은 중국에 통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망언을 했다. 일본의 망언과 영토침략, 역사 왜곡이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일본강점기 우리 애국지사들이 단군을 국조로 모시고 국민의 통합을 시도하면서 단군관련 종교가 번창하고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의 정신적 모체가 된 것은 바로 국가 위기에 단군을 민족주체로 여기면서 민족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민족이 강대한 외세에 대항하면서 민족국가를 지켜온 데는 면면한 민족정기와 역사정신이 국민 통합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고대시대 이래 일제 식민지시대까지 민족사학계에서는 ‘다물(多勿)’, 박은식은 ‘국혼(國魂)’, 신채호는 ‘낭가사상(郎家思想)’, 문일평은 ‘조선심(朝鮮心)’, 정인보는 ‘조선의 얼’, 함석헌은 ‘씨  ’이라 표현하지만, 의미하는 바는 모두 비슷한 우리 민족 고유의 홍익정신을 일컫는다. 

맹자는 ‘전사불망 후사지사(前史不忘 後事之師)’라 했다. 지난 일을 잊지 않음으로써 후일의 교사로 삼는다는 뜻이다. 일본강점기 우리 독립군사관학교는 ‘오수불망(吾讐不忘)’ 이란 교재로 독립군을 양성했다. “우리의 원수(일제)를 잊지 말자.”는 가르침이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