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선희 교수 (상명대학교)


 고대 한국인은 어떤 옷을 입고 살았을까? 고조선 복식형태를 그대로 계승한 부여사람들의 일상적인 옷차림을 중국 사서에서 살펴보자. 실크 속옷에 코발트색 모직물 겉옷을 입고 흰 담비코트를 걸쳤다고 한다. 당시 부여는 공작새처럼 털이 길고 코발트 빛 깃털을 가진 ‘갈지’라는 새를 닭처럼 키워 털갈이 때 빠지는 깃털로 모직물을 만들었다. 그 위에 가볍고 아름다운 담비코트를 걸친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멋진 모습이다.
우리나라 역사는 정치사 중심이어서 생활사를 잘 알지 못하는데다 사료가 사라져 고대 생활사가 거의없다. 거기다가 학자들의 식민사관적 시각은 자기문화를 애써 외면하며 우리 역사와 문화 기원을 한결같이 중국과 북방민족에서 전래된 것으로 연구해 왔다. 이러한 학문 폐단을 보고 동북지역의 복식을 유적지 탐방과 고대 사서를 비교 검토하고 세분화해서 지역으로 나눠 비교해 고대 한국의 독자성을 확인했다.
서기 전 1000년에 만들어진 고조선 모직물이 길림성 성성초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고조선은 가죽과 모직 등 의류가공과 직조기술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섰고 수준도 높아 이웃나라에서 앞다퉈 수입했다. 한 고조 유방이 건국 초 국가의 빈곤으로 상류층의 고조선 모직물 수입을 금하자 밀수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사서 사기, 한서, 후한서 등을 참조하면 고대 한국은 이미 4,700여 년 이전에 양잠이 성했고 고유의 실크를 생산하여 고구려에서는 누구나 누에고치실을 여러 색으로 물들여 화려한 문양의 옷감인 금(錦)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고구려벽화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우리 고유의 문화를 중국 등에서 전래한 것으로 보는 시각 고쳐야


바지는 북방민족, 치마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고조선부터 계승해 온 민족 고유의 복식이다. 소매 폭과 그 고유한 선, 옷 여밈은 물론, 특히 옷고름은 우리만의 특징이다. 옷감을 짜는 방직기를 보면 중국의 사직기(斜織機)는 경사도가 매우 가파른 데 비해 길림성 집안현 벽화와 평안남도 용강군 벽화 ‘기직도(機織圖)’의 베틀은 지금의 안동 베틀과 같이 수평이어서 우리 고유의 기계가 계속 전승되었음도 알 수 있다.
갑옷 역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고조선시대에 독자적으로 생산했다. 고구려는 뼈, 가죽, 청동, 철갑으로 물고기 비늘 모양의 갑옷을 생산했던 고조선의 기술을  계승했다. 같은 시대 중국 진시황릉의 유물로 보면 가죽갑옷밖에 없고 한 무제 때 이르러 철제갑옷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청동기와 철기가 매우 발달해 얇고 가벼웠으며, 겹쳐지게 붙여 갑옷을 오므리고 펼쳐는 비늘식이라 무척 자유롭고 간편하여 보호는 물론 사용하지 않을 때는 포개서 몇만 명의 갑옷도 쉽게 보관했다. 고구려 때는 말 갑옷, 귀막이, 등자도 매우 발달해 중국보다 2~300년 앞섰다.
비교연구를 상세히 해보면 그동안 중국이나 북방민족의 영향에 의해 이루어져 한반도 쪽으로 유래됐다고 알려진 대부분의 문화현상이 실제로 아시아 중앙에 있었던 고조선 등 우리 민족이 창조해낸 독창적 문화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연구로 고조선과 이를 계승한 고구려의 사회 경제 수준을 바르게 파악하고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