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0일 대한민국 새 대통령 취임은 시대의 변화를 상징한다.  유례 없는 국정농단과 촛불집회, 10년 만의 정권교체에 한국 사회는 연일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바야흐로 리더십 혁명의 시대, 지시와 통제만으로는 조직을 이끌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2천 년 중국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황제 5인의 리더십과 25가지 실행법을 다룬 도서가 출간되어 이목을 끈다.

 

 중국을 통치한 위대한 황제는 어떤 자질을 갖추었을까? 특히 격변기를 거쳐 천하를 통일하거나 흔들이는 나라를 안정시킨 황제에게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변화가 빠르고 예측하기 힘들수록 옛 사람의 지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고의 지도자를 만드는 실행력 리더의 품격』(미다스북스 간)은 저자 신동준 21세기 정경연구소 소장이 '위대한 황제에게 배우는 리더십 총서' 『최고의 지도자를 만드는 통찰력 리더의 비전』에 이어 펴낸 완결편이다. 저자는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인물로 거론되는 10명의 제왕을 선정한 뒤 그들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중국사를 통사적으로 접근했다. 

 

위대한 황제 5인이 갖춘 리더의 품격

 

신간 『리더의 품격』은 원태조 칭기즈칸, 원세조 쿠빌라이칸, 영락제 주체, 강희제 현엽, 건륭제 홍력에 이르기까지 존중과 배려,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으로 망설임 없이 시대를 걸었던 황제 5인의 삶과 교훈을 소개한다.
최적의 방법을 찾고 계획적으로 조직을 이끄는 ‘칭기즈칸’의 전략적 품격, 조직원끼리의 충돌을 포용하는 ‘쿠발라이칸’이 세운 융화의 품격, 블루오션을 발견하는 리더십을 배울 수 있는 ‘영락제’, 균형적 리더십으로 이상의 품격을 갖춘 ‘강희제’, 차별 없는 공정함으로 대표되는 ‘건륭제’의 품격 등 다양한 사례구성으로 독자들에게 현인의 가르침과 독서의 즐거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특히 ‘리더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핵심적인 질문에서 출발, 올바른 리더의 사례와 함께 실질적인 적용단계까지 제시한다.

 

전략에 뛰어난 칭기즈칸

 

초원에서 일어나 몽골제국을 세운 원태조 칭기즈칸은 전략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몽골이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칭기즈칸의 권력과 책략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는 전략적으로 먼 곳의 적과 동맹해 가까운 적을 공격하는 것을 중시했고, 적을 많이 만드는 것을 피했다. 적의 사정을 면밀히 살핀 후 포위하고 먼 거리에서 기습하고, 거짓으로 물러나는 척해 적을 유인하고 움직이는 중에 적을 섬멸하는 등의 전술을 썼다.”
칭기즈칸의 리더십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리더의 품격. <사진=미다스북스>

첫째, 최고의 기동력을 갖춘 군사조직을 들 수 있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들 역시 칭기즈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둘째, 유연한 무기사용을 들 수 있다. 칭기즈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셋째, 유능한 참모들을 들 수 있다. 칭기즈칸에게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주었다.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는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웠다. 금나라 신하였던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하는 물품이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

 

칭기즈칸 사후 몽골제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고비사막 남쪽의 막남한지 총독 쿠빌라이칸이 스스로 대칸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원(元)이라 하였다. 그는 칭기즈칸을 원태조로 추증하고, 수도를 새로 건설했다. 지금껏 몽골인에게 없었던, 중국의 지방행정제도와 중앙관제 등을 들여와 국가로서의 기반을 탄탄히 했다. 또한 능력이 특출하면 한인, 색목인, 가톨릭교도 등을 가리지 않고 발탁했다.

“쿠빌라이는 어려서부터 한족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성인이 된 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천하 명사들과 교유했다. 귀천을 막론하고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는 명사를 모두 예우했다.” 그는 다양한 인재를 임용해 적당한 권력을 나눠주고 능력을 다하도록 했다.
그러나 몽골인으로서의 정체성 역시 중요시했다. 이로써 원제국은 온전한 ‘몽골의 세계정부’가 되었다. 쿠빌라이칸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융화하였다. 융화의 품격을 갖추었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개척하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주체는 명태조 주원장의 네 째 아들로 11세에 연왕으로 봉해진다. 태자 주표가 급서하고 그 아들이 명의 2대 황제가 되자 정난지역을 일으켜 영락제로서 보위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를 뿌렸다는 비난을 받지만, 영락제는 주원장이 다져놓은 탄탄한 기반 위에서 명 사상 최고의 성세를 이룬다.
그의 개혁정책은 중앙집권을 시작으로 여태껏 외면받았던 환관들을 이용해 천하의 구석구석을 감찰했다. 그는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개척정신으로 명나라를 통치했다. 그는 다섯 차례 북벌을 단행하였다. 해상으로 눈을 돌려 대선단을 꾸려 바다로 보냈다. 그의 치세 때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넓은 지역을 제국의 판도 안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쿠빌라이 때 이뤄졌던 세계제국의 성세가 주체의 처세 때 재현된 셈이다. 이로 인해 명나라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발전했고 명실상부한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는 개국 초기에 ‘군강신약’의 기반을 확고히 다져 놓았다. 덕분에 명나라는 3백 년이나 유지되었다. 주체의 묘호가 청 가정(嘉靖) 17년 성종(成祖)로 격상된 것은 그가 이룩한 생전의 위업이 후대인에 의해 새삼 재평가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개척군주였다.

 

강희제, 청의 황금시대를 열다

 

청나라 강희제는 8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친정하기 시작하면서 실권을 장악한 그는 보정대신을 몰아내고 반란을 진압하여 강력한 황권을 확립한다. 또한 정복왕조의 영원한 과제였던 한족과 만주족 사이의 균형을 잡았다. 그의 치세 이후 한족과 만주족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졌다. 강희제는 한인을 포섭하는 일련의 정책을 과감해 실시했다. 중앙 정부의 6부에 한인 관료를 만주족과 같은 수로 임명해 균형을 맞추면서 황실의 고위직 세습을 금했다. 이러한 융합은 청이 300년 동안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특히 강희제의 치세에 러시아와 중국 최초의 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으면서 명실상부한 세계의 일원으로서의 청의 기반을 다져놓았다. 그는 재위 61년 동안 청의 안팎을 탄탄히 다져놓음으로써 후대의 황금기를 제시했다는 평을 듣는다.
강희제는 문무를 진흥하여 청나라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강희제로부터 시작된 안정된 중국 지배는 뒤를 이은 옹정제와 건륭제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들 3 황제의 130여년의 치세는 ‘강건성세’라는 태평성대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젊은 시절 즉위한 건륭제는 선대로부터 강대한 국력과 상당한 국부를 물려받아 청나라의 황금기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초기에 민중을 안정시키고 내정에서 세력다툼을 근절하는 등 내치에 힘썼다. 후기에는 준가르부, 위구르 등을 정복하며 외정에 박차를 가했다. 10번의 원정에서 모두 승리하여 원나라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다. 문화적으로 고증학이 발전하여 ‘사고전서’ 등이 편집되었다. 또한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였으며, 거꾸로 청의 문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넉넉한 재정을 믿고 사치한 까닭에 건륭제 치세 말년에는 민중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리더의 품격』은 총 2권의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작인 『리더의 비전』의 맥락을 이어받아 전 중국사를 걸쳐 가장 위대하고 현명했던 황제 5인의 삶과 역사, 그리고 리더십을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