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9시경 남해 노량 관음포의 찬 바다 위에서 54세의 이순신 장군께서 돌아가신다. 이에 앞서 조ㆍ명수군의 사령관인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은 이순신 장군을 설득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미 죽어버렸고, 전쟁도 이쯤 하면 되었으니 순천 예교성에 묶어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를 풀어주자는 말이다. 그 말인즉 ‘진린’이 ‘고니시’의 뇌물을 받았다는 뜻이다. ‘고니시’는 원래 일본의 거상 출신으로 비즈니스에 능한 왜장이다. 그는 이순신 장군에게도 뇌물을 주고 제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가 거절당한 바 있다. 우군이자 상관인 ‘진린’의 설득에도 이순신 장군은 “장수 된 자, 어찌 화친을 논하리오.” 하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무안해진 ‘진린’은 고집을 거둔다. 그러나 이미 ‘고니시’로부터 함선 세 척에 말, 창, 칼 등 뇌물을 가득 받은 터라 왜군 4명을 태운 쾌속선 ‘고바야부네’ 한 척을 풀어준다.

▲ 이락사. <사진=장영주>

이 사실을 보고받은 이순신 장군은 곧 사천, 부산포에 있는 왜 수군이 연합하여 순천을 틀어막고 있는 조ㆍ명 수군의 뒤를 치러 올 것임을 안다. 과연 왜군은 명장으로 유명한 사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고성의‘ 타치바나 무네토라’, 부산포의 ‘테라자와 마사시게’, 남해의 ‘소 요시모토’ 등이 정예병으로만 선발된 500척을 동원하여 노량을 향하여 필사적으로 달려온다. 조ㆍ명 수군을 격파하고 고니시를 구출하여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장군께서도 촌각을 다투어 18일 밤 10시경 함대를 급히 노량으로 물리신다. 전투개시 2시간 전인 자정에는 기함에 물을 떠놓으시고 소략하게 천제를 올린다. 마지막 전투임을 각오하시고 이 전투에서는 목숨을 내 놓으실 것을 하늘에 고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되셨다.

예교성을 빠져 나갈 유일한 바닷길을 틀어막아선 채 기어이 ‘고니시’와 왜군을 섬멸하려는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이순신 장군과 남의 나라, 남의 전쟁에 파견되었으니 적당히 공을 세우고 재물을 챙겨 귀환하려는 ‘유정’과 ‘진린’의 명나라 군대는 애시당초 전투에 임하는 마음이 달랐다. 또, 같은 조선수군의 장군일지라도 ‘이순신’과 ‘원균’의 전투에 임하는 평소의 태도 또한 달랐다. 두 사람의 마음이, 곧 철학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가?

‘가덕도 전투’는 원균과 이순신이 조선수군의 사령관으로서 똑같이 치른 전투이다. 1597년 2월13일. 가덕도에서 나무하던 아이 1명이 왜군에게 맞아 죽고 5명이 끌려가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순신 장군은 ‘곧바로’ 공격을 개시한다. 그 공격으로 왜군 14명이 죽고 17명이 다치자 왜군은 이튿날 조선의 포로들을 곧장 돌려보낸다. 이순신 장군의 기백에 눌린 왜군은 모두 전멸당하는 공포에 질렸던 것이다. 자신의 직계 부하인 조선 수군도 아니고, 조선의 어른들도 아닌 아이들까지도 끝까지 보호하신 ‘조선백성’에 대한 이순신 장군의 마음의 힘이다.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전투를 피하던 조선수군 사령관 ‘원균’은 조선의 최고사령관인 ‘권율’에게 부하들 앞에서 볼기를 맞는다. 놀라고 격분한 원균은 준비도 없이 무작정 부산포로 진격한다. 거세어진 파도에 숨어 요리조리 도망치면서 힘을 빼는 왜군은 잡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 물을 얻으러 가덕도에 정박한다. 이때를 타 왜군이 기습하자 400명의 조선수군과 원균은 허겁지겁 달아난다.
1597년 7월4일의 일이다. 이 작은 전투에서 왜군은 막강했던 조선수군의 갑작스런 전력 약화를 알아차렸다. 결국 며칠 뒤인 7월 16일 ‘칠천량 전투’에서 원균은 왜군의 치밀한 전략에 걸려든다. 이순신 장군께서 전력을 다해 기른 조선수군 2만 명과 원균 자신, 아들 ‘원사웅’이 속절없이 모두 주검이 된다. 이순신 장군이 그토록 아끼고, 함께 승리의 깃발을 휘날렸던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조선 수군의 주요지휘관들도 모두 죽는다.

이순신 장군께서 돌아가신 관음포에는 ‘이락사李落祠’가 있다. 그 안에는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다’는 ‘대성운해大星隕海’ 라는 현판이 걸린 비각이 있다. 이순신 장군께서 차가운 노량 관음포 앞바다에 별처럼 떨어져 목숨으로 지키신 우리 대한민국 의 상징은 태극기이다. 그 뜻이 하늘에 사무쳤는가!
장군께서 순국하신 지 304년 뒤, 같은 날인 서기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 아우내에서는 ‘유관순’께서 태어난다. 30년 뒤인 1932년 12월 1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일본 오사카에서 순국하신다. 17세의 소녀 유관순, 25세의 젊은이 윤봉길께서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버린다. 두 분 모두 우리나라의 상징인 ‘태극기’를 위해 돌아가신다. 태극기를 단 한번만이라도 마음껏 보고 싶어서, 태극기를 단 한번만이라도 자유롭게 흔들고 싶어서, 태극기를 영원히 가슴에 묻은 분들이다. 두 분뿐이 아니라, 수많은 남녀노소 유, 무명의 국민들이 태극기를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렸는가. 대한민국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거룩한 태극기 위에 터를 잡은 나라’이다.

2015년 겨울 대한민국. 서울시는 광화문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자는 중앙 부처 간의 약속을 ‘외국인과 젊은이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그러면서 세우려면 ‘서울시의 땅’이 아니라 ‘국가의 땅’에 세우라고 주장한다.

2015년 12월 16일. 이순신 장군께서 돌아가신 관음포 앞바다는 하늘은 맑았으나 삭풍은 살을 애이도록 시리고 파도는 으르렁거리며 흰 이빨을 세운다.
어디로 가려하는가?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사)국학원 상임고문, 한민족역사문화공원 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