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與猶堂)과 사의재(四宜齋)를 아시나요? 여유당은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정약용(1762-1836) 생가에 있는 서재 당호이고, 사의재는 전남 강진군에서 18년간 유배살이 한 정약용이 처음 거처한 동문 밖 주막집 방 이름이다.
1800년 6월28일에 개혁군주 정조(1752-1800)가 붕어하자 정약용은 애통해 하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 뒤집어 질 것을 예감한 정약용은 남양주 생가에 내려가서 서실 이름을 여유당 與猶堂이라 하고 형제들과 함께 지냈다.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내가 노자(老子)의 말을 보건대, “여[與]여 !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유[猶]여 !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 고 하였으니, 아, 이 두 마디 말이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닌가. 대체로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뼈를 에듯 하므로 매우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건너지 않으며, 사방의 이웃이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자기 몸에 이를까 염려한 때문에 매우 부득이한 경우라도 하지 않는다.

정약용은 겨울 냇가를 건너듯이, 사방의 이웃이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매사를 조심했다.
이랬음에도 불구하고 11세로 즉위한 순조 대신 수렴청정한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1801년 1월10일에 사학(邪學, 천주교) 엄금(嚴禁)을 하교하여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실은 집권세력인 노론 벽파의 남인과 시파에 대한 숙청이었다.
2월8일 새벽에 남인 정약용은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문초를 받고 19일 만에 풀려났다. 이어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 둘째 형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귀양을 갔다.
9월15일에 ‘황사영 백서 사건’이 또 터졌다. 황사영은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깨알같이 쓴 백서(帛書)를 가지고 청나라에 가려다 잡혔다. 그런데 백서에는 천주교 포교를 위해 서양의 군함과 병사들이 조선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는 과격한 내용도 있었다.
황사영은 큰 형 정약현의 사위였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다시 끌려 왔다. 혐의가 없어 목숨은 건졌지만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도착한 정약용에게 거처를 내 줄 이가 없었다. 고맙게도 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토담집 방 한 칸을 내주었다.
1802년 초봄에 주막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아전의 자식들이 정약용에게 배우러 찾아왔다. 황상, 손병조 등 네 사람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그러면서 그도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1803년 겨울에 다산은 토담집 공부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었다. 사의재기(四宜齋記)를 읽어보자.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 때 거처하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외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단정히 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말이 많다면 빨리 그쳐야 한다.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으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의 이름을 ‘사의재’라고 하였다. 마땅하다[宜]라는 것은 의롭다[義]라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과 학업이 쇠퇴하여 가는 것이 슬퍼지므로 자신이 성찰하기를 바랄 뿐이다.
때는 가경(嘉慶) 8년 (1803, 순조 3) 겨울 12월 신축일 초열흘임. 동짓날이니, 갑자년(1804, 순조 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 날 '주역' 건괘(乾卦)를 읽었다.

사의재는 ‘네 가지를 마땅히 하여야 할 방’이다. 방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생각과 용모와 말과 몸가짐’ 네 가지를 흐트러짐 없이 하여 학업으로 다시 출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하여 다산은 18년 유배 중에 ‘목민심서’ ‘경세유표’등 수 백 권의 책을 냈다.

 

글.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