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이 대한민국 고등고시(행정 사법 외무)의 메카 '신림동 고시촌'의 반백년 변천사를 공개했다.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보고서를 통해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14년 한 해 동안 신림동에 관한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를 실시하고, 보고서 '신림동 : 대학동, 청운의 꿈을 품은 사람들'을 냈다. 보고서의 내용을 따라 신림동을 가보자. 

▲ 자하동 전경. <사진=서울역사박물관>

 󰡔 ‘돼지막’에서 ‘풀옵션 원룸’이 되기까지 

 초기 고시원은 무허가 하숙집에서 출발했다. 별칭으로  '돼지막'이라고 불렀다.  1970년대 초반, 책상 의자 침구만 있는 1평 가량의 방 1칸에는 난방연료로 연탄이 아닌 나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신림동 고시촌에는 일명  풀옵션 원룸이 들어서 고시원을 비롯한 '1인 가구'의 발달사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다.(사진 1~3)  신림동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고시촌을 형성, 전문적인 학습공간으로 거듭나며 고시원을 비롯 고시텔, 오피스텔, 원룸 등 다양한 주거상품들을 대거 공급해왔다.

▲ '돼지막' 하숙집 외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청운의 꿈'을 안고 공부에 매진하던 고시생들은 고시 제도 변화에 대응하고 점차 정보 교류와 스터디가 활성화되자  '고시사찰', 즉 절간보다 '신림동 고시원'으로 향했다. 1975년 서울대학교 이전으로 인근에 고시생들이 많아져 용이한 정보수집, 저렴한 생활비 등으로 지방이나 다른 대학 학생들까지 모여들었다. 
▲ '돼지막' 하숙집 내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고시생 중심에서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2000년대 후반 로스쿨 제도 도입 및 사법고시 폐지 예정 등 국가고시 제도가 변화하면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주거지를 찾아오는 직장인 등으로  구성원이 바뀌는 추세다.  이번 조사에서는 새로운 구성원 중 하나인 외국인 유학생(카자흐스탄, 여, 20대)이 고시원에 실제로 거주하며 ‘고시원 생활일기’를 통해 인류학도로서 ‘1인 가구’에서의 경험을 솔직하게 풀어냈다. 
▲ 하숙집에서 밥을 먹는 서울대생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초기 겨우 책만 볼 수 있을 정도의 기본 요건만 갖추고 있었지만 현재는 전국에서 ‘1인 가구’가 제일 많은 신림동 고시촌은 세탁기, 냉장고, 침대, 에어컨, 화장실까지 갖춘 풀옵션 원룸에 이르기까지 주거 여건 스펙트럼이 넓어져 베드타운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성원도 다양화되고 있다. 

▲ 밀집한 고시원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 ‘녹두거리’의 상징, 유일한 사회과학서점 '그날이오면'

 ‘녹두거리’는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서울대생들의 대표적인 학사주점인 '녹두집'에서 이름이 유래하여 신림9동에서 가장 먼저 큰 길로 조성되고 상점들이 밀집했다. 이 녹두거리 입구에 서울대 앞 유일한 사회과학서점인 '그날이오면'이 있다.

▲ '그날이오면'서점 전면. <사진=서울역사박물관>
 
1988년 개업한 '그날이오면'은  '관악세대'(이전, ‘동숭동세대’) 서울대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방문하는 서점이었다. 책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단체 공지를 할 수 없는 무선호출기를 대신하여 각종 모임의 공지와 변동사항을 알리는 역할을 했던 메모판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서점 앞을 들렀다. 
▲ '그날이오면' 서점 내부. <사진=서울역사박물관>
1990년을 전후로 하여 거리투쟁을 벌이는 학생운동에 협조하고 금서를 판매한다는 이유로 압수수색을 당하고 건물 임대료가 상승하는 등 여러 악조건이 종합되면서 녹두거리의 '열린글방', '전야'등 사회과학서점들은 문을 닫았다. '그날이오면'도 그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남아 녹두거리의 상징과도 같은 '그날이오면' 영업 위기 소식에 후원회가 결성되어 고비를 넘겼고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 가면 몸소 노동 운동에도 가담했고 25년째 '그날이오면'을 운영하는 ‘그날지기’ 아저씨도 만날 수 있다.
▲ 녹두거리의 자주관악제. <사진=서울역사박물관>

 녹두거리에는 이제 하나 남은 빈대떡 가게, '황해도빈대떡'이 있다.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북적였던 1992년부터 시어머니에게 배운 황해도식 빈대떡 조리법으로 2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운영해오고 있다. 여러 빈대떡집들이 생겨났다 사라졌지만 ‘콧대 높은’ 고시생들의 희극과 비극을 지켜 본 그녀는 가히 녹두거리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벼슬산’인 관악산 기슭의 자하동 출신 토박이, 의성 김씨

 자하동은 현재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가 들어선 관악산 기슭에 있었다.   자하동은  조선 정조~헌종 연간 시 · 서 · 화의 이른바 자하삼절(紫霞三絶)로 이름을 떨친 신위(申緯)가 어렸을 때 살던 곳으로 그의 아호 자하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자리해 온 자하동에는 60여 가구 중 50가구가 의성 김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1973년 정부 당국에 의해 자하동 의성 김씨 집성촌 주민들은 현재 신우초등학교 인근의 신림동 산 72-1번지 ‘서울대 철거민단지’ 혹은 약수암 인근으로 이주하였다.

 신림동 고시촌 내 원신새마을금고 이사장 김운기 씨는 의성 김씨이다. 1954년 자하동에서 태어나 1967년 마을 뒤편에 관악컨트리클럽이 들어서고 1970년에 서울대학교 이전 계획이 발표됨에 따라 현재의 대학동으로 이주하여 오늘날까지 마을의 토박이로 살아가고 있다.

▲ 관악산 성주암에 오른 김운기 씨. <사진=서울역사박물관>.

 그가 소장한 1970년대 자하동의 옛모습과 관악컨트리클럽의 초기 모습이 담긴 사진들과 구술생애사를 통해 대학동의 지역사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나는 관악산 자하동 서울대학교 있는 데에서 태어났지. 신위, 자하 선생 이름을 따서 자하 마을이라고 불렀어. 고등학교 시절 토요일에는 관악산 올라가서 통기타, 야외 전축 가져가서 트위스트 추고 그러면서 놀았고. KCC 관악컨트리클럽 골프장 생겼을 때는 사람이 모자라니까 잔디도 깎고 캐디도 여러 번 나갔어. 이후에 정부에서 서울대학교 들어온다고 하니까 반강제로다가 우리 동네까지 흡수해서 만들었지." (김운기, 남, 6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