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우리글이 5,000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쟁투해왔다. 지금도 싸우고 있다. 다만 냉전(冷戰)이라 아는 사람만 안다. 한글날을 앞두고 우리말과 우리글이 5000년의 한반도 역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는지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말글 쟁투사를 다룬 책이 나왔다.

김흥식 저 '한글전쟁'(서해문집).

우리말의 쟁투는 8차에 걸쳐 일어났다. 제1차 전쟁은 한자(漢字)의 침투에서 비롯됐다. 한자가 한반도 지배층의 언어가 되면서 벌어진 전쟁, 1차 휴전협정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하여 차자표기법(箚子表記法,  한자를 차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던 방법)이 성립한다.

제2차 전쟁은 한글의 탄생과 함께 발발한다. 한글전쟁 선전포고는 최만리의 상소로 시작된다. 하지만 왕권의 뒷받침이 된 한글을 누가 막겠는가. 한글의 승리로 귀결되고 한글이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 김흥식 저 '한글전쟁'. <사진=서해문집>.

한글이 서서히 조선을 점령해간다. 마침내 선조는 국문유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피난하여 간 선조는 백성에게 한글로 쓴 교서를 내렸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왜적에 협조하는 자가 많았다.  선조는 일반대중이 쉽게 알 수 있는 한글로 쓴 교서를 내려 포로가 된 백성을 회유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이 교서를 보면 백성들 사이에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한글은 쟁투에 돌입한다. 제3차 전면전. 한글 문학이 등장하고 한글은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곧바로 식민지 시대 제4차 전면전이 기다리고 있다. 참 운명이 가혹하다. 일제의 압제하에서 우리말 우리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광복으로 한글은 평온한 세상을 맞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전쟁의 시작이었다. 한글 전용전쟁이다. 한글 전용과 한자 혼용, 한글 기계화 문제 등 한글을 둘러싼 전쟁은 치열하고도 길었다. 한자를 배우지 않은 한글 세대가 등장하며 한글이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일 때 핵폭탄이 떨어졌다. 영어다.

지금 한글은 영어라는 핵폭탄을 맞았다. 영어는 권력으로 군림한다. 경제적 이익이 막대하다. 그래서 영어를 환영하는 이들이 많다. 한글은 이대로 영어에 굴복할 것인가. 한글을 지켜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한글전쟁 표지. <사진=서해문집>.

영어와의 전쟁을 보는 저자는 문자 전쟁, 문화 전쟁임을 갈파한다. 

"오늘도 대한민국에서는 한글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냉전(冷戰), 즉 저 밑바닥에서 적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며 싸우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서 열띤 전투가 벌어지는 열전(熱戰) 중이다. 한글전쟁은 그 본질이 문자(文字) 전쟁이요, 문화(文化) 전쟁이다. 그리고 무력을 동원하는 전쟁과 그 형태는 다르다 해도 목표는 마찬가지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한글전쟁은 수천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벌어진, 무력을 동원한 무수한 전쟁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전쟁일지 모른다."

 하와이어가 완전히 사라지는 데는 200년 이상이 걸렸다. 반면에 대한민국에 영어가 본격적으로 흘러들어온 시기를 멀리는 1945년 이후, 가까이는 본격적인 서구적 산업화가 시작된 1970년대로 상정한다면 이제 고작 50~7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향후 100년 이상 영어의 침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후에도 우리말이 남아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 오히려 특이한 생각이 아닐까.

 저자는 한글 전쟁의  역사를 박제화하지 않고 바로 눈앞에서 꿈틀거리며 독자가 감각하도록 과감하게 펼쳐 보인다. 한자에서 영어까지 외세어와 싸우고 내부의 사대주의자와 한판 승부를 벌이며 쓰러져도 일어나는 우리말 우리글의 5000년 쟁투사를 이 책은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로써 공기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주듯 한국인은 우리 말글로 사고하고 표현하며 기록해 스스로를 이어감을 증명한다. ‘당신은 한글 없이 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제 당신은 한글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는 이 책이 독자에게 던지는 살아 있는 우리 말글의 화두다.

■지은이 김흥식

이 책을 쓴  김흥식은 1990년 출판사를 세우고 출판의 길을 걷고 있다. 그가 세운 출판사 서해문집은 인문사회·역사·고전 분야의 책을 주로 출판한다.  특히 역사와 고전을 좀 더 사람들과 가깝게 만드는 일에 주목해 왔다. 그 결과 우리 고전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으로 평가받은 ‘오래된 책방’ 시리즈를 비롯해 ‘서해클래식’ 등을 기획, 출간했다.

그 또한 저자로서 많은 책을 펴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책을 좋아하는 자신의 독서편력을 바탕으로 정말 자신을 깜짝 놀라게 했던 지식들을 모아 펴내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외 그가 관여해 출간한 책으로는 '한국의 모든 지식'(지음), '1면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1, 2, 3'(기획), '징비록'(옮김), '1910년 오늘은'(엮음),  '조선동물기'(엮음) 등이 있다.

최근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담은 1인 독립잡지 '산책'을 통해, 책에 대한 넘치는 사랑과 출판계 독설 비평, 내맘대로 서평 등을 거침없이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