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그립 구나."

대중가요인 "꿈꾸는 백마강"의 첫 소절이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가졌던 백제가 너무나 허무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후로 백마강은 오늘까지도 꿈꾸고 있는 듯하다.

올 여름에 작은 딸과 함께 부여의 백제 유적지를 다녀왔다. 부여는 옛 사비성 지역으로 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다. 그러한 유서 깊은 부여에 와 보니 모든 것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이야기가 살아있는 우리 역사, 그 중심에는 부여가 있었던 것이다. 부여는 지금의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이래로 123년 동안 백제의 왕도였다. 백제의 성왕은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여기서 백제가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부여계통임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기와마을이었다. 백제시대 때 기와를 구웠던 곳으로 오얏골(瓦峰)이라 하였으며, 2008년 마을 회의에서 주민들의 뜻에 따라 기와마을로 마을 이름을 변경하였다고 한다. 기와마을답게 지금도 땅을 파 보면 기와 파편들이 수없이 나온다고 하니 운 좋으면 1500여 년 전의 백제 기와를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부여 기와마을. 백제시대 때 기와를 구웠던 곳으로 오얏골(瓦峰)이 이곳이다.

 
기와마을에 도착해서 여장을 풀고 부여박물관으로 향했다. 부여박물관에는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후에 나타난 유물들을 전시한다. 그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백제금동대향로’ 와 백제인의 미소라고 할 수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 이다. 

▲ 부여박물관에서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발견하다.

저녁식사 후에 궁남지로 향했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 35년(서기 634년)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신라의 안압지(서기 674년)보다도 40년이나 빠른 것이다. 왕궁의 남쪽에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 궁남지는 연못이라기보다는 계절마다 다른 느낌이 연출되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무왕이라면 우리는 신라의 선화공주와의 사랑의 전설인 ‘서동설화’를 떠올리게 된다. ‘서동설화’를 배경으로 만든 향가가 ‘서동요’이다. 그런 무왕이 만든 궁남지에는 온갖 연꽃들이 바다와 같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연꽃 무리는 ‘연꽃 바다’와 같고, 바람결에 춤추는 연꽃은 마치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과 같았다. 연꽃 물결 한 가운데에 정자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그 정자의 이름이 ‘포룡정’ 이다. 궁남지는 야경이 더 멋있는 곳이다. 연꽃들이 조명을 받아 다시 태어나고 있었고, 온갖 조명과 연꽃이 만나 부여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 사랑의 하트가 그려진 궁남지의 야경.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2인용 자전거를 타고 기와마을 한 바퀴를 돌았다. 인근에 백마강 수변공원이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향했다. 백마강변에 도착하니 저 멀리 백마강의 시퍼런 강물이 보였고, 주위에는 온갖 야생화들이 우릴 반기듯 활짝 피어 있었다. 그 사이로 산책길이 마련되어 있었다. 백마강변의 산책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너무나 황홀했다.

  그렇게 산책을 다녀와서 백제 떡을 만들었다. 백제 떡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었다, 우리가 흔히 ‘인절미’라고 알고 있는 떡이었다. 인절미에도 스토리가 있었다. 조선 인조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이었던 인조는 난리를 피해 지금의 공주로 내려 왔었다. 그때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찹쌀로 빚은 떡에 콩고물을 묻혀 먹기 좋게 잘라 진상을 하였다. 마침 시장했던 터에 임금은 그 떡을 맛있게 먹었다. 먹어보니 정말 절미 중에 절미였다. 그때서야 임금은 이 떡을 누가 바쳤느냐고 묻자 신하들이 공주지역에 사는 임씨라고 하였고, 임씨가 만들어 임금님께 바친 떡이라고 '임절미'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발음이 편하게 하기 위해 ‘인절미’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공주가 과거 백제 땅이었으므로 공주나 부여지역에서는 ‘인절미’를 ‘백제 떡’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 백마강 수변 공원.

점심식사 후 마지막 일정으로 찾아간 곳이 부소산성이었다. 백제의 마지막 왕도, 부소산성, 그 이름만 들어도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남겨져 있을 것 같았다. 부소산성으로 올라가기 전에 삼충사를 먼저 방문했다. 그곳에는 백제의 세 충신을 모셨다.  황산벌에서 백제를 위해 마지막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셨던 계백 장군과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백제를 향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던 성충과 흥수의 영정과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었다. 부소산에는 부소산성이 있는데, 백제의 왕성을 방어하는 산성이었다. 그곳에서 천년의 숨결, 백제를 만날 수 있었다. 부소산성 입구에서 구드래 나루터까지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부소산성 입구 - 삼충사 - 영일루 - 군창지 - 반월루 - 백화정 - 낙화암 - 고란사 - 황포돛배 - 구드래 나루터

부소산성 길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숲길이 이어지고 그 숲 속에는 7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백제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특정한 공간을 걷는 것이 아니라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듯 걷고 있었다. 동일한 공간이건만 그 옛날 백제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1500여 년이 지나 그 백제의 후예들만이 그 길을 걷고 있다. 걷노라니 오래된 고목과 바위에는 백제 혼이 서려 있었고, 그래서 그 숲길에는 백제정신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숲길 따라 걷다보면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하듯 백제의 숨결이 느껴졌다.

낙화암 정상에는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에서 백마강을 내려다보니 망국의 설움을 겪은 백제 여인들의 넋이 서려있는 듯 했다. 낙화암에서 10여분 걸어 내려오면 ‘고란사’라는 절이 있다. 고란사에서는 ‘고란초’라는 신비한 약초가 있다. 그리고 고란 약수에 대한 전설도 있는데, 고란 약수 한 모금만 마셔도 3년이 젊어진다고 한다. 백제왕들은 고란 약수를 즐겨 마셨는데, 고란 약수가 틀림없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약수에 고란초 잎을 한 잎씩 띄워오도록 분부하였다고 한다. 고란사 약수는 깊어 1m가 넘는 긴 국자 모양의 기구로 물을 떠서 마신다.  물맛이 아주 시원하고 좋았다.

고란사에서 나루터로 내려오면 드디어 백마강에 다다른다. 백마강은 금강의 별칭으로 부여에서 그렇게 부르고, 때론 우리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유래는 썩 유쾌하지 못하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의 무용담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이 부소산성을 공격할 때 안개가 자욱해 강을 건너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때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제의 의자왕은 낮에는 사람으로 밤에는 용으로 변해 있어 안개가 걷히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용을 낚아 올리자 짙은 안개가 걷히고 백제를 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여를 감돌아 흐르는 금강을 백마강으로,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강 가운데 바위섬을 조룡대(釣龍臺)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계룡산으로 몽진을 가고, 죽기를 결심한 백제의 여인네들은 백마강에 몸을 던지게 되었고 이곳을 타사암(墮死巖)이라 불렀으나, 훗날 백제의 궁녀와 여자들을 미화하여 낙화암(落花巖)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낙화암에 몸을 던진 궁녀가 삼천에 이른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은 삼천의 궁녀가 아니라, 숭고한 죽음을 선택했던 백제의 여인들과 궁녀가 많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강변에 유난히 반짝이는 금모래 빛은 숭고한 죽음을 택한 백제 여인들의 혼이 아닐까?

낙화암을 돌아 구드래 나루터로 향하는 황포돛배를 탔다.

'구드래'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백제시대 때 ‘구드래’ 포구는 오늘날 말하면 국제항이었다. 아마도 일본에게 선진 문물을 전해 주었던 왕인, 아직기 박사도 일본을 떠나기 전 이곳 구드래 포구를 출발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 왜인들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렀고, 지금도 일본 지명으로 남아있다. 일본 말에 ‘구다라나이(くだちない)’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뜻은 ‘시시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원래 ‘백제가 없다’라는 말이었고, 이 말을 풀이하면 ‘백제 것이 아닌 것은 시시하고 좋지 않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백제의 선진문화를 동경했던 고대 일본인들의 백제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표현으로 고대 백제인들의 문화 수준이 가히 짐작되는 부분이다.

▲ 백마강의 황포돛배.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의 관문이자 큰 나루터인 구드래 나루터, 성왕 때인 서기 538년에 웅진에서 이곳 사비성으로 천도해 터를 잡고 백제는 이후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다.

구드래 나루터에 도착하여 다시 백마강을 바라보았다. 백제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백마강은 부질없는 인간사에는 관심이 없는 듯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백제 멸망의 원인은 무엇일까? 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진실은 무엇일까?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와 그 위대한 정신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제는 더 이상 계백의 충직한 죽음과 낙화암과 삼천 궁녀의 비통함 그리고 백제의 슬픔은 온데 간 데 없고, 이천 년을 이어온 백제의 위대한 유산만 우리 마음속에 남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저 멀리 백마강이 말없이 흐르고 있다.

천년의 숨결로 만든 ‘금동대향로’, 천년의 미소가 살아있는 ‘마애삼존불’, 천년의 꿈이 흐르고 있는 ‘백마강’을 통해 백제가 이루고자 했던 대제국의 꿈과 이상을 되살려야 할 몫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남겨진 사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