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올 해의 격언인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옛 것을 익혀 오늘에 되살리는 것,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중요한 지혜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뜻을 갖고 있는 한자 성어로는 두 가지가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논어』「위정편」에 나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과 조금은 낯설기도 한 『연암집』권1 「초정집서」에 나오는 ‘법고창신’이 그것이다. ‘온고이지신’은 그저 옛것이 좋다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지만 ‘법고창신’은 옛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고, 새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다는 것이 아니다. 옛것과 새것에는 각각 긍정과 부정의 뜻이 함께 들어 있으므로 옛것과 새것 중 어느 한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조화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옛 법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근본이 없는 창조는 있을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 이야기이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다시 한 번 빛나는 순간이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고창신’의 지혜로 올 한 해를 마무리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법고창신’ 해야 할 근본은 무엇인가? 그 답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간 역사는 오래된 미래이다. 우리의 미래를 바르게 설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한국사에서 고조선을 뿌리 역사라고 하고, 우리 역사의 첫 출발점이라고도 한다. 문헌 고증과 출토 유물을 통한 고고학적 발굴성과 그리고 끊임없는 연구 결과, 고조선은 역사적 실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추세이다. 물론 중국과 일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국가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역사를 왜곡해 왔던 것이 사실로 판명되고 있다. 한국사에서 고조선이 그 실체가 분명하게 있다면 그 이후에 전개되는 역사 과정도 설명이 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것이 이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고조선은 기원전 24세기에 건국되어 기원전 3~4세기에 이르러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연나라와 대치하고 있었다. 연나라 소왕 때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2,000여리를 일시적으로 빼앗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물론 일시적인 상황이지만 이로 인하여 고조선의 세력은 약화되고 급기야 와해 및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동안 고조선을 중심으로 그 영향 하에 있던 수많은 거수국들이 독립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구심점을 잃은 거수국들은 이합집산을 반복하게 되었고, 이렇게 약화된 틈을 타 중국 한족들의 거센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고대 한민족들은 지금의 요서지역에서 요동지역으로, 요동지역에서 만주 및 한반도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를 윤내현 교수는 ‘열국시대’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열국(列國)’이란 열 개의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거수국들이 일제히 독립하면서 수많은 국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기자조선과 관련된 내용이다. 기자조선을 막연한 허구로 치부하기에는 관련 문헌과 유물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상서대전』과『사기』에 나타난 내용을 정리하면, "기자는 중국 은나라 왕실의 후예였다. 그의 이름은 서여로, 기(箕)땅에 봉해져 자(子)라는 작위를 받은 제후였기 때문에 기자라 불렸던 것이다. 후에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에 의해 석방되었는데, 기자는 비록 주왕에게 간쟁하다가 투옥되었지만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을 섬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조선’으로 망명한다. 무왕은 그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책봉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기록은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내용이다. 기자가 망명했다는 사실은 기자의 망명 전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기자조선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기자가 무왕에게 조선의 제후로 봉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무왕의 신하가 아니었다는 『사기』의 기록처럼, 조선이라는 지역은 무왕의 지배 아래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또한 기자가 조선의 제후가 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는 광대한 고조선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모든 역사를 자국 위주로 서술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들이 마치 기자가 조선 전체를 지배했던 것처럼 기술하고, 그 후로 조선왕에 대해서는 무조건 기자의 후손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이는 천하를 모두 중국인들이 다스린다는 그들 특유의 중화중심의 천하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사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고조선의 대부분은 여전히 단군의 후예들이 다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동안 기자는 한국사에서 배제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역사 교과서에서 그 내용이 빠진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위만은 어떠한가? 위만은 기자조선의 준왕을 내쫓고 위만국의 왕이 되었다는 인물이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한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나라 때 노관을 연왕으로 삼으니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노관이 한나라를 배신하고 흉노로 도망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왕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했다. “한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 위만은 되돌아서서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왕은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만이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는 점이다. 최남선은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며 이를 “위만의 도둑질”이라고 보았으나, 이병도는 위만을 패수 이북 요동 지방에 토착한 조선인 계통의 유민이라고 주장하였고, 이것이 현재의 통설이 되었다. 이병도가 위만을 조선인 계통의 유민으로 보는 근거는 , 그가 망명할 때 “북상투에 오랑캐 옷”을 입었고, 준왕이 요지인 국경수비대장을 맡길 정도로 신임했다는 점, 그리고 나라를 차지한 후에도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사기』ㆍ『삼국지』에서 분명히 “연나라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위만이 ‘북상투’와 ‘오랑캐 옷’ 만으로 조선인으로 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후한서』「동이열전」에 따르면, “옛날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배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경유해 마한을 공격해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왕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준왕의 도주로가 중요한 것은 기자조선 멸망 당시의 도읍지, 곧 최후의 도읍지가 어디인가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한사군의 위치와 연계가 되기 때문에 정밀한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삼국유사』「마한조」에, “위지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 왕 준이 궁인들과 좌우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의 한 지역에 이르러 개국하고 이름을 마한이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며, 최치원은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마한은 고구려”라는 최치원의 말은 준왕이 도주한 지역이 현재의 평안도 지역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준왕이 위만에게 내준 지역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반도 서쪽지역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위만조선을 방치할 경우 주변 이민족의 통제가 불가능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한나라는 기원전 흉노와 남월에 대한 정벌이 일단락되자 이듬해인 기원전 109년 가을 수륙양군을 동원해 조선을 침공했다. 누선장군 양복은 제병 7천 명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발해를 건너 왕검성을 공격하였으나 우거왕이 이끄는 조선군에 패해 10여 일을 산중에 숨어 있어야 했다. 좌장군 순체는 요동 지역의 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고조선의 패수 서군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위만조선은 한의 수륙양군을 모두 패전시킬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자 조선 내부에도 분열이 발생하였다. 조선 상 노인, 상 한음과 니계상 참, 장군 왕겹 등이 오랜 전쟁에 지친 나머지 강화로 돌아 선 것이다. 이들이 강화로 돌아선 데는 한나라의 이간책과 우거왕의 왕권강화에 대한 반발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더 이상의 전쟁을 원치 않았던 한음ㆍ왕겹ㆍ노인은 한나라로 도망갔다. 그리고 니계상 참은 우거왕을 살해한 후 성을 들어 항복하려 하였으나 대신 성기가 우거왕을 대신해 장렬히 싸우는 바람에 실패했다. 강공보다는 회유가 효과적임을 확인한 한나라는 다시 내부분열을 시도했다. 결국 대신 성기는 살해되었고 성은 함락되었다. 이로써 기원전 108년 여름, 1년 이상을 끌어 온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고조선 지배층의 내부 분열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에 따라 결과는 한나라의 승리였지만 한나라는 항복한 조선의 항신(降臣)들을 제후로 봉한 반면에 좌장군 순체는 기시(棄市)했고, 누선 장군 양복도 주살되어야 마땅하나 속전(贖錢)을 받고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승리한 한나라 장수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는데, 패배한 위만조선의 지배층은 모두 후로 봉해졌다는 것, 결국 고조선의 항신들이 제후로 봉함을 받은 지역은 오늘날의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이르는 지역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개의 경우 항복한 인물들에게 항복한 그 지역을 봉지로 주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은 위만조선의 영토를 한나라가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는 명목상 승리를 거두었을 뿐 위만조선의 영토까지는 차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면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의 산동 반도 지역까지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 25사 지리지를 연구하신 분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 25사에 많은 위사(僞史)가 삽입되어 있어 고대 지명과 그 위치가 잘못되어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고조선이 붕괴 후 분열되면서 많은 거수국들이 독립하여 열국들이 생겨났고, 이러한 열국들 또한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기자조선을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이 준왕을 축출하고 위만조선을 건립하자 동일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던 열국들이 만주나 한반도 등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에 위만조선이 한무제에 의해 멸망하고 그 자리에 한군현이 설치되자 요서지역에 있었던 열국들이 또 한번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동, 만주, 한반도,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게 되면서 역사서에 등장하는 열국들의 위치와 종족 계통의 혼란이 있었다. 고조선이 붕괴되면서 각 거수국들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열국시대로 전개되는데, 이러한 열국도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나뉘어 졌다. 우선 부여 계통으로 부여(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백제 등이 있었고, 진계의 계통으로는 예맥, 동예, 옥저(북옥저, 동옥저), 말갈, 낙랑, 삼한 등이 있었다. 부여계 중에서 고구려는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향후 동북아지역의 패권다툼을 할 정도로 급부상하였다. 특히, 말갈은 고구려의 구성원이면서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해서 대진국(발해)을 건국하는 주체이기도 하였다.

 대진국(발해)을 건국한 후 대조영은 동생 대야발을 시켜 고조선의 역사서인 『단기고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것은 진계 계통의 말갈이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사 전개과정들이 의도적으로 누락이 되었거나 왜곡된 형태로 전해짐에 따라 역사의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연속성 없는 역사 탓에 고조선의 실체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역사의 공백없이 자연스럽게 스토리 텔링이 가능하다면 역사의 실체적 진실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썩은 흙과 풀이 거름이 되어 새로운 생명의 양분의 되어 주듯이 오랜 역사는 밝혀야 할 진실은 남아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법고창신’의 지혜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단기 4346년 12월 03일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