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성씨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에는 성씨가 무려 30만 여개에 달한다. 우리나라 성씨가 300여 개 정도 된다고 했을 때 가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다. 그런데 일본의 성씨는 우리나라 성씨와 비교할 때 다른 점이 있다. 이것은 일본 성씨의 유래이기도 한데, 거처하는 장소에 따라 성씨가 부여된 것이다. 그러니 많을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일본 성씨 중 하나가 다나카(田中)이다. 밭 한 가운데 살고 있다고 해서 다나카로 한 것이다. 다나카는 일본 성씨 중 네 번째로 많은 성씨인데 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 성씨이기도 하다. 일본인 중 성씨가 유일하게 없는 사람은 그들의 왕인 일왕이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왕을 천황으로 받들면서 사람이나 갖는 성씨를 굳이 천황이 가질 필요가 없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잘못 알려진 일본 성씨의 유래가 기모노의 유래와 함께 왜곡된 일본의 성 문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 또한 왜곡된 정보이다. 일부 맞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일본의 모든 성씨가 그런 것은 아니다. 또한 세계사적으로도 거처하는 장소나 지명에 따라 성씨를 정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유대인의 경우도 그러하고, 미국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오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성씨도 ‘세탁하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는 문명국가에 살고 있다. 따라서 문명인으로서 올바른 정보가 무엇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 기준을 잃어버리지 않고 바른 정보를 취사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견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히 상고사나 고대사 등 오래된 역사일 경우 더더욱 그렇다. 이럴 때 우리는 문명인으로서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고자하는 노력과 함께 합리적인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일본인들의 성씨를 살펴보았지만 한국인들의 성씨는 그 유래가 어떻게 되는가? 나아가 한국인들의 기원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어떤 존재와 만나게 되는 가 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문제이다. 특히 한국 상고사와 결부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것에 대한 한국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 역사 교과서에 반영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역사교과서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한민족의 기원이 되는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고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신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그 이후 역사인 삼국시대, 마치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러한 삼국시대의 역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그 근거가 된다.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우리 역사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는데 『삼국사기』가 정통사서라면 『삼국유사』는 대안사서 쯤으로 이해된다. 즉, 이것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삼국시대의 역사를 말할 때 그 대표적인 근거가 『삼국사기』인 것이다. 이러한 『삼국사기』를 통한 한국고대사 인식 체계가 잘못되어 있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나마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는 『삼국사기』의 초기기록마저도 불신하고 인정하지 않는 논리라면 이것은 신화와 역사의 논쟁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역사 시간에 한국고대사 중 삼국시대의 역사를 어떻게 배웠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 출처나 근거도 모르고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을 그저 암기하곤 하였다. 고구려는 건국시조 동명성왕, 불교 도입과 율령 반포 소수림왕, 영토 확장한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 남하 정책과 평양 천도 장수왕, 살수대첩과 신집 5권 영양왕, 고구려 멸망 보장왕 등 28명의 고구려 왕 중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웠거나 기타 학습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은 고작 3분의 1도 채 안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백제는 건국시조 온조왕, 고대 국가로의 기틀을 마련한 고이왕, 최대 전성기를 누렸던 근초고왕, 불교를 도입한 침류왕, 서동요의 무왕, 웅진 천도 문주왕, 22담로 설치 무령왕, 사비 천도 성왕, 백제 멸망 의자왕 등 신라는 건국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유리 이사금, 석탈해 이사금, 내물 마립간, 불교 공인 및 율령반포 법흥왕, 순수비와 거칠부의 『국사』 진흥왕,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신라 최초 진골 출신의 왕 태종 무열왕, 삼국 통일의 위업과 대왕암 문무왕, 만파식적 신문왕, 신라 멸망 경순왕 등 백제와 신라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삼국시대 역사 중 건국시조를 제외하고는 일정한 연대까지는 역사 교과서에 전혀 언급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기존 역사인식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기존 역사 인식은 한국 고대사 인식체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현재 한국 고대사 인식체계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인 「백제본기」는 고이왕, 「신라본기」는 내물왕 이전의 기록을 부정하는 대신 중국 정사 중 『후한서』「동이열전」과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의 기록을 근거로 한국 고대사를 인식하고 해석하고자 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는 말갈관련 기록이 많다. 그런데도 기존 한국 고대사 인식 체계로 말미암아 말갈사도 중국사서의 기록에 따라 말갈이 기원전에 등장함에도 6세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나아가 말갈은 한국사의 한 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본 학계는 『삼국사기』초기 기록은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특히 츠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는『삼국사기』「백제본기」의 근초고왕(346~375)대의 기록부터 신용할 수 있다고 하였고,「신라본기」의 실성왕(402 ~417)대까지의 기록은 신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사의 반 이상을, 삼국시대 신라사의 ⅔ 이상을 인정하지 않는 주장이다. 한편, 1945년 이후 한국 학계에서는『삼국사기』「백제본기」의 고이왕 27~28년(260~261)과 「 신라본기」의 내물왕(356~402) 전의 기록들이 사료로서 신빙성이 없다고 본 이병도의 연구체계가 통설이 되었다. 이것 또한 백제사의 거의 반을, 신라사의 반 이상을 연구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따라서 그 동안의 한국고대사 연구는 『삼국지』「한전」과 같은 중국사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한국고대사 연구를 한국사서로 한 것이 아니라 중국사서로 하였기 때문에 그 출발부터 한계와 문제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기존 한국고대사 인식체계에서 제외했던『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삼국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정치적으로 성장해 갔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반면,『삼국지』등 중국사서에서는 해당 시대상과 중국과의 관계사 기록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때문에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보아야지 어느 일방의 사료만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한국고대사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중국25사의 관계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기 4346년 10월 22일

학교법인 한문화학원 법인팀장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