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시대는 우리 역사의 시원이 된다. 그래서 우리 역사를 말할 때 항상 가장 먼저 거론되고 있고, 또는 거론되어야만 하는 단군 조선의 역사는 나무로 비유하자면 뿌리요, 물에 비유하자면 샘이다. 이것은 개천절 노래에도 나온다.
그런데 너무 오래된 역사이다 보니 남아있는 문헌이나 사료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선입견을 버리고 찾아보면 고조선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 주는 문헌과 사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출토 유물로 보면 좀 더 확실해 진다. 그래서 직ㆍ간접적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담은 문헌 및 사료들과 출토 유물에 대한 발굴 성과를 상호 보완적으로 살펴보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갖게 된다. 고조선 시대의 화폐와 고조선의 강역에서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는 명도전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지를 파악해 봄으로써 그러한 역사적 견해를 좀 더 명확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출토 유물로는 빗살무늬토기와 미송리 토기와 같은 토기류, 비파형동검이나 세형동검 같은 청동검, 고인돌과 돌무지무덤과 같은 무덤 유적, 다뉴세문경이라는 잔줄무늬 청동거울 등이 있는데, 이러한 유물들의 출토 지역을 통해 고조선의 강역을 추정할 수 있다. 이렇듯 고조선의 강역과 관련해서 고조선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을 살펴 보면 중국의 하북성과 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의 동북삼성, 내몽고자치구 및 한반도 전역이다.

여기서 특히 칼처럼 생겼다고 해서 ‘명도전(明刀錢)’이라고 불리우는 고대 청동 화폐도 고조선관련 주요 유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명도전의 출토 지역이 위의 고조선 강역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및 중국학자들은 여전히 연나라 화폐라고 주장하고 있고,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도 고조선과는 무관한 연나라 화폐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명도전을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청동 도자(刀子)를 본떠서 만든 도자형 동제화폐로 중국 하북성과 한국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전국시대 초기 도전(刀錢)인 첨수도(尖首刀)에서 전화된 것으로 연(燕)나라 때 주조된 화폐이며, 표면에 명(明)자 또는 역(易)자 비슷하게 표시되어 있어 명도전이라 불린다. .....특히 우리나라의 유적이 대체로 청천강 이북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연나라 세력의 동방 진출과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위 백과사전의 정의도 대명제는 “명도전은 고조선이 아닌 연나라 화폐”라는 것이다. 명도전은 중국 전국시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범위에 걸쳐 유통된 화폐라는 점에서 당시의 교류 양상을 엿 볼 수 있는 1차 자료가 된다. 이 때문에 국내외 학계에서는 명도전을 주목하고 다각적인 각도에서 그 의미를 규명하고자 하였으며, 명도전의 명칭, 기원, 유통시기, 사용자 등과 관련하여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명도전이 전국시대 중기 이후에 주조되었고, 주로 중국의 북경, 하북성, 산서성, 내몽고자치구 동남부, 요령성, 길림성 서남부, 한반도 서북부 일대에 유통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아직 명도전에 관한 접근이 폭넓게 이루어 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국내학계와 중국학계가 안고 있는 몇 가지 한계와 방법론적인 문제점이 작용하였다. 첫째는 명도전이 현재의 중국과 북한이라는 두 나라에 걸쳐 분포하여 접근이 쉽지 않았고, 둘째는 역사적으로 전국시대의 연 및 고조선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어서 자국사의 관점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명도전 외에도 우리 민족의 첫 고대 국가인 고조선에서 화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폐를 사용했다는 것은 고조선이 시장 경제 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치윤의『해동역사 』를 보면 수유국 흥평왕 원년인 기원전 957년 자모전(子母錢)이라는 주조 화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이러한 기록은 고조선에서 화폐를 사용했다는 것을 뜻한다. 고조선의 8조 법금 중 “도둑질한 자는 노예로 삼는데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하고자 하는 자는 50만전을 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 당시에 화폐를 사용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고조선 화폐는 명도전이다. 명도전은 칼 모양의 화폐로 명(明)자가 새겨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명도전에 대해 국사교과서에서는 연나라, 제나라에서 사용한 청동 화폐라는 설명이 있다. 화폐는 인류가 경제 활동에 적응한 일종의 산물이기 때문에 유통지역의 정치, 경제, 지리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화폐가 특정한 형태의 생업경제에서 나타나는 생활필수품에서 유래하였음은 이를 방증한다.
농경구 모양의 포전은 농경이 발달한 황하 중류 유역에서 사용되었고 손칼 모양의 도폐는 주로 북방 목축경제가 발달한 지역에서 유통되었다. 이들 화폐는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포전과 도폐의 사용 권역이 구분되어 있었고 분포 범위도 요하를 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이르면 한 국가에서 여러 종류의 화폐를 혼용해서 사용함에 따라 유통권도 더욱 확장되었다. 같은 형태의 화폐가 당시 동북아시아 전체에서 유통되었을 것임은 명확하며 명도전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명도전은 1920년대 일본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요령성 부근에서 발굴되어 시대적 상황과 그들의 사관에 의해 요령성 일부 및 한반도 서북부까지 세력을 뻗친 국가, 즉 연나라의 화폐로 지금까지 인지되어 왔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한 시기를 거쳐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 하북성 및 요령성 그리고 동북삼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이르렀었다는 이론의 발전이 있는 지금에도 우리는 명도전이 춘추전국시대의 고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연나라와 제나라의 화폐였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 지역에서 출토된 명도전은 고조선에서 통용된 연나라 화폐로 볼 수 있는가 이다.
여기서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가 아닌 이유를 밝힐 수 있다면 당시의 역사지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명도전은 고조선의 화폐라는 명제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가 아닌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고조선의 강역 범위 내에 명도전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연나라 지역에는 일부 출토는 되지만 고조선 지역에 비하면 아주 경미한 수준이다. 더군다나 황하 이남에는 전혀 출토되지 않고 있다.
두 번째, 시장경제이론에 부합되지 않는 명제라는 것이다. 경제의 법칙은 고대나 지금이나 규모와 방식만 달라졌을 뿐 물건을 사고파는 데 대체수단으로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만약 고조선에서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이 사용되었다면 고조선의 경제는 연나라의 경제에 예속되었어야 하고 연나라는 명도전을 찍어내는 일만으로도 고조선의 모든 재화를 구매하고 통용시킬 수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 고조선의 청동 주조 기술이 주변국에 비하여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청동기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나 세형동검 같은 동검을 보더라도 중국의 동검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고, 특히 다뉴세문경(잔줄무늬 청동거울)을 보면 불과 지름 21㎝ 정도 되는 크기 안에 0.3㎜ 간격으로 무려 가는 선 약 1만 3000개를 새겨 넣었다. 현대기술로 복원을 시도했으나 아직도 복원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정밀한 청동 주조 기술을 가진 고조선 사회가 명도전이라는 화폐 주조 기술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전혀 성립이 안 되는 가정이다.
네 번째, 한나라가 고조선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면 고조선 강역 중 어딘 가에서는 한나라 화폐인 ‘오수전’이 출토되어야 한다. 하지만 전혀 출토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연나라가 한반도 서북부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면 연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의 화폐인 ‘반량전’은 최소한 요서 및 요동, 만주지역에서 출토가 되어야 하나 전혀 출토되지 않는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다섯 번째, 명도전의 출토 수량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연나라는 기원전 323년부터 기원전 220년이라는 약 100년의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연의 존속 기간 동안에 통용되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명도전이 요서 및 요동, 만주 전역에서 가마니로 발굴되어 굴러다닌다. 2,000여 년 전 화폐가 기념품 가게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한화로 1000원 정도에 팔렸다. 연나라가 경제대국이 아닌 한 당시 기준으로 2000여 년 전부터 내려왔던 고조선의 화폐경제를 100년 동안에 바꾸기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라는 주장은 의외로 중국인 학자로부터 나왔다. 중국 고고학자인 중국사회과학원 장보취안(張博泉) 교수가 2004년 후반 『북방문물』 이라는 학술지에서 그의 논문「 명도폐연구속설(明刀幣硏究續說)」에서 원절식 명도전은 고조선의 화폐라고 발표하였던 것이다. 결론은 명도전은 고조선에서 고조선 경제를 위해 만들어 사용한 고조선 화폐라는 것이다. 장교수의 논문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만주 지역에는 3종의 화폐가 있었다. 즉 첨수도, 원절식 도폐, 방절식 도폐가 그것이다. 첨수도는 끝이 뾰족한 것이고 원절식은 몸체가 둥근 형태이고, 방절식은 몸체가 각진 형태로 된 것을 말한다. 이들 화폐 가운데는 첨수도는 고죽 또는 기자관련 족이고 원절식은 (고)조선의 화폐이며 방절식은 연나라 화폐이다."
결국 중국 고고학자인 장교수가 진정으로 주장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원절식 명도전은 기자조선의 화폐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자조선이 요서에서 요동으로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요동에서도 원절식 명도전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도전과 관련한 많은 논쟁과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결과 및 고고학적 발굴성과 등을 통하여 ‘고조선 영토에서 출토되는 명도전은 연나라 화폐다.’ 라는 명제는 ‘참’일 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 논리로 ‘고조선 영토에서 출토되는 명도전은 고조선 화폐다.’라는 명제가 ‘참’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검증이 필요함도 알게 되었다. 명도전처럼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풍부하게 출토되는 유물은 우리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고조선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으므로 명도전을 비롯한 고조선의 화폐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그러한 연구 결과에 따라 우리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단기 4346년 10월 03일

 
학교법인 한문화학원 법인팀장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