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7만년 역사 75]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조선(朝鮮) 제36대 매륵(買勒) 천왕(天王)의 역사 -

[흉노가 번한에 조공하다]

서기전703년 무인년(戊寅年)에 흉노(匈奴)가 번조선(番朝鮮)의 번한(番韓) 엄루(奄婁)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天王)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조공(朝貢)을 하고 돌아갔다.

흉노(匈奴)는 열양(列陽) 욕살(褥薩)로서 죄를 지어 약수(弱水)지역에 종신금고형(終身禁錮刑)에 처해졌다가 제후(諸侯)로 봉해진 색정(索靖)의 후손으로서 단군조선의 한 부족(部族)이 된다.

흉노가 단군조선 제36대 매륵(買勒) 천왕을 알현할 것을 번한(番韓)에게 간청하면서 조공을 바친 것인데, 이에 번한 엄루가 흉노를 신하로 삼고 조공을 받았던 것이다. 흉노는 원래 단군조선의 한 부족으로서 자치세습 제후국에 해당하였는데, 후대에 흉노가 독립을 하다시피하면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우다가 이때에 이르러 번한(番韓)에게 조공을 하면서 신하(臣下)의 나라로 속하게 된 것이 된다.

후대 전국(戰國)시대에 흉노의 왕으로는 서기전1120년 단군조선에 망명한 소위 기자(箕子)의 작은 아들 집안인 선우씨(鮮于氏)가 있고, 전국시대 말기에서 진한(秦漢)시대에는 소호금천씨의 후손이 되는 김씨(金氏)도 있었는데, 특히 흉노 휴도왕(休屠王)이던 김일제(金日磾)가 서기전110년경에 한무제(漢武帝)에게 투항하여 산동(山東)지역에 투후(秺侯)로 봉해졌으며, 그 후손들이 한(漢)나라에 염증을 느끼고 대거 한반도의 남부지역으로 건너와 서기42년에 6가야(伽倻)를 건국하는 세력이 되었다.

흉노(匈奴)는 서기전90년경까지도 한(漢)나라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지진과 해일]

서기전677년 갑진년(甲辰年)에 지진(地震)과 해일(海溢)이 있었다.

지진(地震)이 일어난 장소와 해일(海溢)이 일어난 바다가 어디인지는 불명하나, 단군조선의 중앙조정(中央朝廷)인 진한(眞韓)조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지진은 백두산 일대일 것으로 보이고, 해일은 바닷속의 화산활동 또는 육지의 함몰로 인하여 생기므로 진한의 남해(南海)가 되는 지금의 요동반도 남쪽이나, 동해(東海)로서 지금의 울릉도나 독도 부근에서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물론 진조선의 인근지역이 되는 마한이나 번한 지역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며, 당시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있던 곳으로서 삼도(三島)라 불리는 지금의 일본 땅일 수도 있는 것이 된다.

[다리가 8개 달린 송아지 출생]

서기전673년 무신년(戊申年)에 서촌(西村)에 있는 민가(民家)에서 소가 다리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여기서 서촌(西村)은 단군조선의 수도가 되는 백악산아사달을 기준으로 한 서촌으로서 상춘 궁전(宮殿)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 된다.

다리가 여덟 개 달린 송아지는 다리의 수가 다리가 4개 달린 보통 송아지의 곱절이나 되는데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서 이상현상이 발생한 것이 된다. 길조(吉兆)인지 흉조(凶兆)인지는 기록 자체에서는 알 수 없다.

[용마(龍馬) 출현]

서기전670년 신해년(辛亥年)에 용마(龍馬)가 천하(天河)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었다.

용마는 용(龍)처럼 신령스런 말을 가리키며, 천하(天河)는 하늘의 강으로서 당시 단군조선의 수도가 있는 강이며 위치상으로 지금의 송화강이 될 것이다.

용마(龍馬)의 등에 별무늬가 있었다는 것은 용마가 하늘의 기운을 타고난 말임을 나타내고 있다.

서기전3500년경 배달나라 한웅의 아들 태호복희(太皓伏羲)는 천하(天河)에서 하도(河圖)를 얻고서 8괘역(卦易)을 만들었다 하고, 후대에 하(夏)나라 시조가 된 우(禹)는 서기전2267년경에서 서기전2224년 사이에 낙수(洛水)에서 소위 낙서(洛書)를 얻었으며 소위 주문왕팔괘도(周文王八卦圖)가 여기서 나왔다 하는 바, 여기의 천하(天河)는 배달나라의 천하로서 지금의 황하(黃河)를 가리키고, 낙수(洛水)는 중원 땅에 있는 황하의 남쪽에서 합류하는 지류가 된다.

용마(龍馬)의 등에 새겨진 별무늬는 별자리 그림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서기전1935년에 천하(天河)에서 나온 신구(神龜)의 등판에 그려진 그림이 윷놀이판과 같았다라고 한 것과 상통한다.

원래 욫놀이판에 새겨진 28개의 점이 28수(宿)로서 별자리인 것이며, 북두칠성(北斗七星)이 회전하는 모양을 동서남북의 사방(四方)으로 나누어 펼친 그림이기도 하다.

윷놀이판의 그림은 곧 한역(桓易)으로서 조주석야(朝晝夕夜)의 4시(時), 7요일(曜日) 4주(週) 28수(宿), 주춘하추동(春夏秋冬)의 4계(季), 동서남북(東西南北)의 4방(方),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순환상생원리(循環相生原理)의 역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마고(麻姑), 한국(桓國), 배달나라(檀國),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정치행정제도(政治行政制度)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태호복희가 천하에서 얻었다는 소위 하도(河圖)는 태호복희 이전의 배달나라 초기에 사용되던 역(易)으로서 동서남북에 배당한 음양(陰陽) 및 수리(數理)가 된다. 즉 북쪽은 양1 음6, 남쪽은 음2 양7, 동쪽은 양3 음8, 서쪽은 음4 양9, 중앙은 양5 음10을 배치하고 있는 그림이 된다. 이 하도(河圖)에서는 방향의 순서가 북남동서중(北南東西中)으로 배정되고 있다.

태호복희가 창안하였다는 3연(連) 3절(絶)의 8괘역은 곧 태호복희8괘역으로서 건태리진곤간감손(乾兌離震坤艮坎巽)의 괘(卦)가 되는데, 처음 무극(無極)에서 음양(陰陽)의 태극(太極)이 나오고 이 태극에서 사상(四象)이 나오며 다시 8괘(卦)가 나온 것이 된다.

하(夏)나라 시조가 된 우(禹)가 낙수(洛水)에서 얻은 소위 낙서(洛書)는 이전의 배달나라 역(易)으로서 동서남북중과 북동 남동 남서 북서에 배당된 음양(陰陽) 및 수리(數理)가 된다. 즉 북쪽은 양1, 북동쪽은 음8, 동쪽은 양3, 남동쪽은 음4, 남쪽은 양9, 남서쪽은 음2, 서쪽은 양7, 북서쪽은 음6, 중앙은 5를 배치하고 있는 그림이 된다. 이 낙서에서는 1,3,9,7의 방향은 태양이 도는 방향이 되고, 2, 4, 8, 6,의 방향은 지구가 도는 방향이 된다. 이러한 수의 배치는 가로, 세로와 대각선으로 각 세가지 수의 합이 15가 되는 소위 마방진(魔方陣)이 된다.

낙서(洛書)에서 나왔다는 소위 주문왕팔괘도(周文王八卦圖)는 그 8괘의 배치가 태호복희 8괘역의 배치도와는 다른데, 북동쪽의 간괘(艮卦)와 남동쪽의 손괘(巽卦)의 방향만 일치하고 나머지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행방향의 태호복희팔괘역의 괘를 따르지 않고 방향을 틀어 놓은 것이 된다.

태호복희8괘역은 음양(陰陽) 사상(四象) 팔괘(八卦)의 역으로서 오행(五行)의 원리와는 바로 상통하지 않는 것이 되는데, 태호복희8괘역은 곧 음양(陰陽)이 분화되어 생긴 음양의 조합(調合)이 되는 것이며, 한편 주문왕팔괘역은 태호복희팔괘역의 8괘를 오행의 원리와 혼잡하여 적용한 것이 되는데, 소위 오행(五行)은 음양(陰陽)의 태극(太極)에서 나온 중(中)이 되는 물(水)의 소음(少陰)과 불(火)의 소양(少陽)에다 다시 중(中)이 되는 목금토(木金土)의 세가지가 합쳐진 다섯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 된다.

여기서 태호복희8괘역의 8괘는 건태리진곤간감손(乾兌離震坤艮坎巽)으로서 각 그 괘가 배치되는 방향이 수목화토금(水木火土金)의 오행(五行)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데, 이는 수목화토금이 원래 음양에서 나온 중(中)으로서 태호복희역으로 보면 소음과 소양과 다시 중에 해당하는 소음과 소양과 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 된다.

즉 오행(五行)은 오행성(五行星)의 기(氣)를 가리키는데, 음양(陰陽)에 해당하는 해달(日月)과 대비하여 중(中)에 해당하는 별(星)이 되기 때문이다. 태호복희8괘역의 건태리진곤간감손의 괘는 음양에서 다시 음양으로 분화된 사상(四象)에서 다시 음양으로 분화되어 불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태호복희8괘역은 음(陰)과 양(陽)에서 음음, 음양, 양양, 양음의 사상(四相)이 되고 다시 음음음(陰陰陰), 음음양, 음양음, 음양양, 양양양(陽陽陽), 양양음, 양음양, 양음음의 팔괘(八卦)8괘로 세분화된 것이 된다.

한편, 오행(五行)은 해달(日月)의 음양(陰陽)에서 생긴 별(星)이 중(中)이 되는데, 이 중(中)에서 나온 음양중(陰陽中)이 분화되어 생긴 중음(中陰), 중양(中陽)과 다시 중중(中中)에서 생긴 중중음(中中陰), 중중양(中中陽), 중중중(中中中)이 합해진 즉 중음, 중양, 중중음, 중중양, 중중중의 5가지 오행(五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음(中陰)은 물(水)로서 태호복희역에서는 음양음(陰陽陰)의 소음(少陰)이 되며, 중양(中陽)은 불(火)로서 양음양(陽陰陽)의 소양(少陽)이 되고, 중중음(中中陰)은 목(木)이며, 중중양(中中陽)은 금(金)이고, 중중중(中中中)은 토(土)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태호복희8괘역은 각 건태리진곤간감손 즉 하늘(乾), 화산(火山), 불(火), 벼락(震), 땅(坤), 산(山), 물(水), 바람(風)을 나타내며, 오행(五行)은 물(水), 나무(木), 불(火), 땅(土), 금(金)을 나타내어 서로 대응되는 성질을 지닌 요소는 물(水), 불(火), 땅(土, 坤)이 되는데, 그 배치되는 방향이 달라 일치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한편, 건(乾, 하늘)괘는 원래 태양(太陽)을 나타내는 괘로서 기(氣)의 원천이 되는데, 태호복희8괘역에서 건괘는 태양의 괘이기도 하다. 특히 태호복희팔괘역의 곤(坤)은 땅이라는 글자이나 태음(太陰)으로서 달(月)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 오행(五行)에서 토성(土星)의 기(氣)를 가리키는 토(土)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태호복희8괘역의 배치도를 바꾸어 오행의 방향과 혼잡하여 놓은 소위 주문왕팔괘도는, 간손(艮巽)괘 외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행(順行)의 역(易)도 아닌 것이 되고, 수화(水火) 외에는 오행(五行)의 원리에도 맞지 아니하는, 억지로 혼잡하여 끼워 맞춘 역(易)이 되어 순행역(順行易)의 반역(反逆)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삼도(三島)의 난(亂) 평정]

서기전667년 갑인년(甲寅年)에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槃命)을 보내어 해상(海上)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는데, 마조선(馬朝鮮)의 마한(馬韓) 궁홀(弓忽)이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戰船) 500척을 이끌고 가서 왜(倭)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하였으며, 12월에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협야후(陜野侯)는 협야(陜野)에 봉해진 제후(諸侯)를 가리키느데, 단군조선 후기에 지금의 일본 땅 구주(九州, 큐슈)에 협야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이며, 이곳에 단군조선의 장수이던 언파불합(彦波弗哈)이 서기전723년경에 웅습(熊襲)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제후로 봉해졌던 것이 되고, 이 언파불합의 아들이 배반명(裵槃命, 稻飯命)이 되는 것이다.

배반명(裵槃命)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도반명(稻飯命)과 동일인물이며, 언파불합의 장자(長子)로서 협야후를 세습하였던 것이 되고, 배반명의 막내 아우가 반여언(磐余彦)으로서 일본서기에서 서기전660년에 초대 천황(天皇)이라 기록된 소위 신무(神武)가 된다. 역사적으로 신무왕(神武王)은 서기전660년에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천황이라 참칭(僭稱)하며 단군조선의 질서에서 이탈(離脫)한 자가 된다.

삼도(三島)는 지금의 일본 땅의 세 섬을 가리키는데, 구주(九州, 큐슈), 본주(本州, 혼슈), 북해도(北海島, 홋가이도)가 된다. 그리고 본주의 남쪽에 사국(四國)이라는 섬이 있기는 하나 삼도에서는 별도로 칭하지 않은 것이 된다.

서기전667년 12월에 삼도의 반란이 협야후 배반명이 이끄는 군사에 의하여 진압이 되었으나, 이후 반여언(磐余彦, 神武)이 다른 형제들이 모두 사망한 것을 기회로 삼아 천황(天皇)을 참칭(僭稱)한 것이 되는데, 이러한 신무(神武)를 단군세기에서는 협야노(陜野奴)라 하여 반역자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신무가 다른 형제들을 모두 살해하여 바다에 빠뜨린 것으로 보인다.

[제(齊)나라의 단군조선 제후국 침공]

서기전665년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영지국(永支國),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고대중국의 기록에서 적고 있다.

서기전770년부터 주나라는 소위 춘추시대가 시작되는데, 서기전679년부터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패자(覇者)가 되어 서기전668년에 단군조선의 직할 제후국이던 서국(徐國)을 병합하고, 서기전666년에 위(衛)나라를 침공하고 서기전665년에 영지국(永支國)과 고죽국(孤竹國)을 침공한 것이 된다.

춘추시대의 첫 패자 제나라 환공이 19년인 서기전668년에 산동지역의 서산(徐山)을 수도로 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서국(徐國)을 병합하였다가 이후 부흥을 시도하자 서기전526년에 정벌하였던 것이며, 결국 서국은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 합려왕에게 망함으로써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이라는 긴 역사를 남긴 채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영지국(永支國)은 단군조선 번한(番韓)의 요중(遼中) 12성(城) 중 하나인 영지성(永支城)으로서 일개 성(城)에 지나지 아니하나, 고대중국 기록에서는 나라(國)로 기록되고 있어 제후국에 버금가는 세력을 갖춘 것이 된다. 보통 성(城)의 책임자인 성주(城主)는 주로 지방장관인 욕살(褥薩)이 되나 대부(大夫)에 해당하는 직(職)이나 제후(諸侯)가 봉해지는 경우도 있다. 제후가 봉해지는 경우는 국(國)이 된다.

고죽국(孤竹國)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며,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순(舜)임금이 서기전2284년경에 임의로 설치하였던 유주(幽州)를 폐하고 봉한 나라가 되는데, 서기전2224년에 시작된 하(夏)나라 이전부터 존속하여 서기전650년경에 연나라와 제나라의 침공으로 망한 것으로 되어 약1,600년을 존속한 나라가 된다.

[연(燕)나라 정벌과 제(齊)나라의 구원]

서기전653년 무진년(戊辰年)에 매륵(買勒) 천왕께서 군사를 보내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燕)나라를 정벌케 하였더니,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의 복병(伏兵)에 걸려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하고 물러갔다.

수유(須臾)는 서여(胥餘)라는 이름을 가진 은나라 왕족 기자(箕子)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즉 기자족(箕子族)을 須臾族(수유족)이라 부르는 것이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 주(紂)의 숙부인 자서여(子胥餘)가 은나라의 기(箕) 땅에 봉해진 자작(子爵)이라 하여 부르는 명칭이며, 서기전1120년에 단군조선 땅에 망명하여 이후에는 단군조선의 제후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고죽(孤竹)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고죽국(孤竹國)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 중앙조정인 진조선(眞朝鮮)이 기후국(箕侯國) 즉 수유국(須臾國)과 함께 연(燕)나라를 정벌하였던 것이며, 이에 연나라가 제(齊)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고 당시 패자(覇者)의 나라이던 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고죽국에 쳐들어 온 것이 된다.

이때 제나라 군사들은 고죽국 땅에서 복병(伏兵)전술(戰術)에 걸려 이겨 보지도 못하고 화해를 구하고는 퇴각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단군조선에서는 강태공(姜太公)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병법(兵法)인 육도삼략(六韜三略)의 원류가 되는 고도의 전략전술(戰略戰術)을 포함하는 병법(兵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된다.

제(齊)나라 환공(桓公) 시대의 고대중국 기록에서는 산융(山戎)의 임금을 말로(末路)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산융(山戎)은 위치상으로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던 구려(句麗)가 되며, 말로(末路)라는 글자는 당시 단군조선의 제36대 천왕이던 매륵(買勒)과 유사한 소리가 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산융(山戎)을 단군조선의 대칭(代稱)으로 사용한 것이 된다.

한편,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는 서기전651년 제나라 환공이 산융(山戎), 이지(離支), 고죽(孤竹)을 정벌하였다고 하는 바, 이 기록은 단군세기의 서기전653년 기사와 관련있는 것이 되는데, 서기전653년에 단군조선이 수유국(須臾國)과 합공으로 연나라를 정벌하자, 연나라는 당시 주(周)나라 제후국 중에서 패자(覇者)의 나라이던 제(齊)나라에 긴급을 알려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제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의 보필로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고죽국(孤竹國)에 쳐들어 왔다가, 계속하여 단군조선의 영지성(永支城)으로서 영지국(永支國)이라고도 불리는 이지(離支)와 구려국(句麗國)이 되는 산융(山戎)까지 쳐들어 왔다가 소득없이 물러간 것이 된다.

당시 제나라 환공이 관중과 함께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고, 고죽국의 수도가 되는 무체성(無棣城)의 서북쪽에 위치한 영지성(永支城, 離支)에 이어 산융(山戎)까지 들어갔다가 모랫바람에 후퇴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모랫바람은 곧 사막(砂漠)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당시 제나라가 침공한 것이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구려국(句麗國)의 사막지대로서 지금의 장가구(張家口) 북쪽의 내몽골지역이 되는 것이다.

[태자 마물(麻勿) 즉위]

서기전647년 갑술년(甲戌年)에 매륵(買勒)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 마물(麻勿)이 즉위하였다.

-조선(朝鮮) 제37대 마물(麻勿) 천왕(天王)의 역사 -

[방공전(方孔錢) 주조]

서기전642년 기묘년(己卯年)에 방공전(方孔錢)을 주조(鑄造)하였다.

방공전은 네모난 구멍이 뚫린 주화(鑄貨)가 된다. 이전에 주조한 원공패전(圓孔貝錢), 자모전(子母錢), 패엽전(貝葉錢) 등은 모두 구리나 구리합금으로 만든 동전(銅錢)이 될 것인데, 이 방공전은 쇠(鐵)로 만든 것이 된다.

특히 자모전(子母錢)의 대표적인 화폐로는 소위 명도전(明刀錢)이 있다.

후대의 소위 엽전(葉錢)은 거의 네모난 구멍이 뚫린 둥근 금속화폐인 원전(圓錢)이 되는데, 이때 주조된 방공전(方孔錢)이 후대에 나타나는 소위 방공전(方孔錢)의 시초가 되는 셈이다.

[모문국(毛文國)의 반란]

서기전639년 임오년(壬午年)에 모문(毛文)의 제후인 유례(有禮)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모문국(毛文國)이 어디에 소재하였던 것인지 불명이나, 주(周)나라의 북쪽으로서 서기전703년에 번조선(番朝鮮)에 조공한 사실이 있는 흉노(匈奴)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周)나라 공주를 천왕비로 삼다]

서기전637년 갑신년(甲申年)에 마물(麻勿) 천왕께서 주(周)나라 공주(公主)를 천왕비로 삼았다.

이때 주나라 왕은 제18대 양왕(襄王)으로서 이름이 정(鄭)이며, 서기전652녀부터 서기전619년까지 재위하였다.

천왕비가 된 주나라 공주가 마물 천왕의 정비(正妃)인지 아니면 계비(繼妃)나 후비(後妃)인지는 불명이다.

[거미와 뱀의 싸움]

서기전622년 기해년(己亥年)에 궁궐 동산에 큰 뱀이 들어와 죽었다.

궁액기(宮掖記)에 의하면, “궁궐 뜰안에 큰 거미가 있었는데 큰 뱀이 와서 거미를 잡아 먹으려 하자 이에 거미줄 아래 엎드려 위를 향해 입을 열고 독기를 토하였으며, 몇날이 못되어 뱀이 죽고 거미는 여전히 살아 있었는 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뱀의 배를 가르고 검사 해보니, 배 안에 큰 석웅황(石雄黃) 한 뭉치가 있는 것을 보고 거미가 복수하고자 뱀을 죽이는 유일한 독약인 석웅황을 구하여 묘한 계책으로서 먹여 죽인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궁액기라는 기록에 거미와 뱀의 싸움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면, 과연 신빙성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연못이 만들어 지고 샘이 솟다]

서기전609년 임자년(壬子年)에 성(城)의 북쪽 땅이 내려앉아 큰 연못이 되니, 큰 샘이 솟아나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 성(城)은 백악산아사달의 성(城)을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이다.

연못과 샘은 관련성이 많은데, 연못은 물길 따라 내려오는 물로 차기도 하지만 곳곳에 샘이 솟아 올라 연못을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연못과 샘이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단군조선 시대의 유물이 있는데, 곧 소위 명도전(明刀錢)이다. 즉 명도전에 가림토 글자로서 “ㅁ ㅗ ㅅ" 즉 “못”이라고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있는데, 이를 아래 철자부터 위로 읽으면 그 모습이 위로 샘솟는 모양으로서 “ㅅ ㅐ ㅁ" 즉 “샘”이라고 읽히는 글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ㅁ은 물방울 모양으로서 물을 뜻하며, 맨 아래 ㅅ모양은 샘물의 구멍을 뜻하는 것이 된다.

[용사(龍師) 황학노(黃鶴老)]

서기전599년 임술년(壬戌年)에 도인(道人) 황학노(黃鶴老)가 신술(神術)이 있어 풍력(風力)으로 40리를 오고가니 용사(龍師)라 하였다.

용사(龍師)란 용과 같이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도술(道術)을 부리는 사람을 부르는 것이 된다.

황학노(黃鶴老)라는 말은 성씨가 황씨(黃氏)이며 이름이 학노(鶴老)라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황학(黃鶴)처럼 신선(神仙)같은 늙은이(老)라는 명칭일 수도 있다.

풍력(風力)으로 40리를 오고갔다는 것은, 바람을 타고 40리를 다녔다는 것이 되는데, 풍력을 이용하는 비법(秘法)을 알고 있었던 것이 된다.

[신선(神仙) 양선자(養仙子)]

서기전597년 갑자년(甲子年)에 장백산(長白山)에 양선자(養仙子)라는 숨어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 160살에 이르렀어도 피부가 어린아이와 같았다.

장백산은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으로서 단군조선 시대에 태백산(太白山), 삼한대백두산(三韓大白頭山)이라 불렸다.

160살에 어린아이 피부를 가졌다는 것으로 보아 도(道)를 닦던 신선(神仙)같은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이 된다. 서기199년에 붕하신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은 서기23년생으로서 177세를 살았다고 기록되고 있어 또한 신선(神仙)이라 불릴 만하다.

[한웅, 치우, 단군왕검의 삼조(三祖)의 상(像)을 모시게 하다]

서기전591년 경오년(庚午年)에 천왕께서 사신(使臣) 고유(高維)를 파견하여 한웅(桓雄), 치우(蚩尤),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삼조(三祖)의 상(像)을 나누어 주어 관가(官家)에서 모시게 하였다.

한웅천왕과 치우천왕과 단군왕검을 삼조(三祖)로 모시고 이 삼조의 상(像)을 관가(官家) 즉 관공서(官公署)에 나누어 주어 모시게 하였는데, 아마도 마물 천왕께서 남쪽 순시를 하기 이전에 고유(高維)를 사자(使者)로 삼아 명령으로 시행한 것이 될 것이다.

다만, 번조선(番朝鮮)의 번한(番韓) 아갑(阿甲) 때의 일로서 아갑의 재위 기간이 서기전613년부터 서기전589년까지로 추정되나 정확하지는 아니한 바, 갑자(甲子)로 계산하면 60년 이전이 되는 서기전641년으로 제36대 매륵 천왕 때의 역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서기전641년 때의 일이라면 번한 아갑은 서기전663년부터 서기전649년까지 재위한 것이 된다.

한웅천왕은 서기전3897년 갑자년에 배달나라(檀國)를 세워 개국시조가 되며, 치우천왕은 서기전2706년에 배달나라 제14대 천왕으로 즉위하여 청구(靑邱)로 수도를 옮기고 12제후국을 평정함으로써 청구시대를 열었고, 단군왕검은 서기전2333년에 조선(朝鮮)을 세웠던 개국시조가 된다.

한인, 한웅, 단군왕검 또는 한웅, 치우, 단군왕검의 삼성(三聖) 상(像)을 모신 관가(官家)의 누각(樓閣)을 절(寺)이라 하는데, 원래 절(寺)은 공무(公務)를 보던 사람들이 시간에 맞추어 기도를 올리는 기도처(祈禱處)가 된다. 후대에 이 절(寺)에 불가(佛家)가 들어서서 본전(本殿)인 대웅전(大雄殿)에 석가부처를 모시고 삼성(三聖) 또는 산신(山神)을 대웅전의 윗자리인 북쪽이나 뒷 자리가 되는 곳에 따로이 삼성각(三聖閣), 산신각(山神閣)을 모신 것이 된다.

소위 명도전에 "절(寺)"이라는 소리로 읽히는 문자가 누각모양의 상형문자로 새겨진 것이 발견 되었는데, 원래는 "뎔" 또는 "델"이라는 소리로 읽은 것이 되며, 후대에 "뎔"은 구개음화되어 "절"이라 발음되고 "델"은 "데라"로서 지금의 일본식 발음으로 변한 것으로 된다.

[천왕께서 남쪽을 순수하다 기수(淇水)에서 붕하시다]

서기전591년 경오년(庚午年)에 마물(麻勿) 천왕께서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淇水)에 이르러 붕하시니 태자(太子) 다물(多勿)이 즉위하였다.

마물 천왕은 남쪽과 관련된 시호로 보이는데, 즉 마물의 마가 남(南)을 가리키는 말로서, 마물은 남쪽에 머물다는 뜻을 지닌 말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때 마물 천왕께서 순수하신 곳이 남쪽 지역이라 하였는데, 기수(淇水)가 어디에 위치하였던 강인지 불명이라 단정하기 곤란하나, 당시 단군조선의 수도이던 백악산아사달인 상춘(常春, 지금의 長春)의 남쪽이라면 지금의 요동반도와 압록강 유역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단군조선의 영역에서 동서의 중앙지역인 구려국(句麗國)을 기준으로 하면 그 남쪽은 바로 번조선의 서쪽에 위치한 고죽국(孤竹國) 땅이나 번조선의 남쪽으로서 산동지역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고죽국은 서기전651년경에 제(齊)나라의 침공으로 망한 것이 되어, 서기전567년에 제(齊)나라에 망한 래이(萊夷)라는 나라가 즉묵(卽墨)의 후예국(後裔國)으로서 고죽국(孤竹國)의 잔존세력이 되는 바, 결국 마물 천왕이 순시(巡視)한 남쪽지역은 산동지역이 될 것인데, 발해만 서쪽의 고죽국 땅을 이미 잃은 것이 되어 진조선(眞朝鮮)의 남해안(南海岸)인 지금의 요동반도 남단에서 배(舟)를 타고 래이(萊夷)나 그 주변 땅을 순수한 것이 될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당시 기수(淇水)가 산동지역에 있었다라고 단정하기 곤란한 점이 있어 상춘의 남쪽이 되는 지금의 요동반도와 압록강 유역에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한편, 여기에서 적은 기수(淇水)가 하남성(河南省)에 걸친 강이라면, 이때는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서기전632년 초(楚)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패자(覇者) 노릇을 하던 시기가 되는데, 거(莒)나라나 주(邾)나라 등이 존속하고 있던 때로서 주(周)나라 제후국이 아닌 단군조선의 직할 제후국으로서 소위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에 있던 강이 될 것이다.

[다물(多勿)은 태자(太子)인가? 태제(太弟)인가?]

다물(多勿)은 마물(麻勿) 천왕의 태자(太子)로 기록되고 있기는 하나, 88년 재위한 제25대 솔나(率那) 천왕은 11년 재위한 제24대 연나(延那) 천왕의 아우로서 태제(太弟)가 되며, 30년 재위한 제30대 내휴(奈休) 천왕은 34년 재위한 제29대 마휴(摩休) 천왕의 태제(太弟)가 되는 것으로 보아, 그 시호(諡號)에서 마물(麻勿) 천왕의 아우가 되는 태제(太弟)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마물 천왕의 56년 재위기간과 다물 천왕의 45년 재위기간을 고려하면, 다물이 마물 천왕의 태자(太子)였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다만, 마물 천왕이나 다물 천왕의 재위기간이 더 짧다라면 태제(太弟)였을 가능성이 더 농후해 지는 것이다.

-조선(朝鮮) 제38대 다물(多勿) 천왕(天王)의 역사 -

[정(鄭)나라 사람이 들어와 살다]

서기전581년 경진년(庚辰年)에 정(鄭)나라 사람 신도회(申屠懷)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살았다.

서기전268년경 공자(孔子)의 7세손이라 기록되는 위(魏)나라 사람 공빈(孔斌)이 지었다는 홍사(鴻史)의 서문에서 주(周)나라와 동이(東夷)가 1,000년을 넘게 우방(友邦)이었으며, 양국의 백성들이 오고감이 많았다라고 기록되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정(鄭)나라는 낙양의 동쪽에 있던 나라로서, 서기전800년경에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환공(桓公)을 봉한 곳이며, 서기전375년에 제33대 군을(君乙)이 한(韓)나라의 애후(哀侯)에게 망하면서 정(鄭)은 한(韓)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백학(白鶴)이 춤을 추다]

서기전576년 을유년(乙酉年)에 흰 두루미(鶴)가 궁궐의 안에 있는 소나무에 와서 살더니 음악소리를 듣고 내려와 춤을 추었다.

학(鶴)은 우아(優雅)한 자태를 지니고 있고 특히 하얀 학은 평화로움을 나타내는 새라 할 것인 바, 백학(白鶴)이 음악을 듣고 춤을 추었다는 것은 태평시대(太平時代)임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래(萊)나라가 제나라에 망하다]

서기전567년 갑오년(甲午年)에 산동지역에 있던 래국(萊國)이 제나라에 망하였다.

래국(萊國)은 래이(萊夷)라고 불리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데, 서기전650년경에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연합군에 망하였던 고죽국(孤竹國)의 후예국인 즉묵(卽墨)이라는 나라의 후신(後身)이 된다. 즉묵은 절묵(節墨)이라고도 한다.

[송(宋)나라 황노술의 딸이 태자궁(太子宮)에 살다]

서기전565년 병신년(丙申年)에 송(宋)나라 사람 황노술(黃老述)의 딸이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입국하여 태자궁(太子宮) 안에서 함께 살았다.

이때 태자는 두홀(豆忽)인데, 송나라 황노술의 딸이 태자의 후빈(後嬪)이나 시종(侍從)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표상술(表相述)의 상소]

서기전558년 계묘년(癸卯年)에 표상술이 아뢰기를, “새의 둥지를 뒤집어 놓으면 알이 떨어져 성할 까닭이 없고, 나라가 망한 속에서는 평안한 백성이 있을 수 없으며, 불이 타는 집과 물이 새는 배에서 근심을 같이 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고, 음식이 떨어져 여러날 굶주리면 병이 나리 않을 몸이 없을 것입니다. 국가는 천하의 큰 그릇이므로 만일 한번 기울면 사람의 힘으로 갑자기 바로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임금이 기울기 전에 힘쓰는 것은 앞으로 기울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밝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니, 천왕께서 이 마을 따라 국정을 밝히 살피셨다.

표상술이 지은 시(詩)가 있다.

외로운 등불은 싸늘한 바다의 밤을 밝히고,
가을비에 병법책만 읽네!
칼을 씻어 석벽에 거니,
우뢰소리 천지를 진동하도다!
(孤燈滄海夜 秋雨讀兵書 洗劍掛石壁 雷聲動天地)

위 표상술의 시를 보면, 단군조선은 병법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고대중국 역사에서 전쟁의 신(神)으로 받들어지는 배달나라 제14대 한웅(桓雄)이신 치우천왕(蚩尤天王)이 황제헌원과의 전쟁에서 백전백승한 전력(戰歷)과 서기전2470년경 출생한 인물로서 순(舜)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보필한 유호씨(有戶氏)가 하(夏)나라 우(禹)와 계(啓)와의 약30년에 이르는 전쟁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하였다는 전력(戰歷)만 보더라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것이다.

[진(晉)나라 김일선의 입조(入朝)]

서기전556년 을사년(乙巳年)에 진(晉)나라 사람 김일선(金日善)이 천문지리학(天文地理學)을 가지고 조정(朝廷)에 참여하였다.

진(晉)나라는 주(周)나라 춘추시대에 주로 황하 북부지역에 있던 나라로 진(秦)나라 동쪽이자 연(燕)나라 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서기전632년에 문공(文公) 시절에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춘추시대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나, 서기전653년에 한위조(韓魏趙)의 세나라에 망하였고, 서기전403년에 이 한위조 세나라가 나누어 다스렸는데, 이후 전국(戰國)시대라 부르게 된다.

조정(朝廷)에 참여하였다라는 것은 조정에 벼슬(官)을 하였다는 것이 된다.

[제(齊)나라 상인 노일명(老一明)의 조공]

서기전551년 경술년(庚戌年)에 제(齊)나라 상인(商人) 노일명(老一明)이 고급비단을 싣고와 천왕께 바쳤다.

서기전551년은 노(魯)나라 양공 22년으로서 노나라에서 공자(孔子)가 출생한 해가 된다. 공자는 서기전479년에 사망하여 72세를 살았다.

[초나라 사람 번석문의 망명]

서기전549년 임자년(壬子年)에 초(楚)나라에서 망명한 번석문(樊釋文)이 황금 40근을 가지고 입국하였다.

초(楚)나라는 주로 양자강 남쪽에 위치하여 주(周)나라 지역에서도 남방에 있어 비록 주나라의 제후로 봉해졌으나 줄곧 남만(南蠻)으로 취급당한 나라이기도 한데, 그 백성들은 주로 적족(赤族, 赤夷)으로서 한배달조선의 9족(族)에 속한다.

초(楚)나라는 주(周)나라 제후국 중에서 가장 먼저 왕(王)을 칭한 나라로서, 서기전741년에 웅거(熊渠)가 칭왕을 하였는데, 이 웅거의 성씨가 웅씨(熊氏)로서 배달나라 웅족(熊族)의 후손임을 보여준다. 웅족으로는 크게 웅씨(熊氏), 고씨(高氏), 여씨(黎氏), 공손씨(公孫氏), 희씨(姬氏) 등이 있다.

웅씨의 시조는 배달나라 천황비(天皇妃)가 된 웅녀군(熊女君)이 되고, 고씨의 시조는 배달나라 초기에 농사담당이 된 고시씨(高矢氏)가 되며, 여씨의 시조는 서기전2800년경 웅녀군의 후손으로서 단허(檀墟)에 왕검(王儉, 임금)으로 봉해진 사람이며, 공손씨의 시조는 유웅국(有熊國) 시조인 소전씨(少典氏)의 후손 중에서 나온 인물이 되고, 희씨의 시조는 공손씨의 후손인 황제헌원(黃帝軒轅)이다.

[태자 두홀(豆忽) 즉위]

서기전546년 을묘년(乙卯年)에 다물(多勿)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太子) 두홀(豆忽)이 즉위하였다.

다물이라는 말은 “되물리다” 즉 회복(回復)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후대 고구려 고주몽 성제(聖帝)의 연호가 단군조선 고토(古土)를 회복한다는 다물이다.

두홀(豆忽)은 “콩 고을” 또는 “큰 고을”이라는 뜻을 가지는 말이 된다. 즉 두(豆)가 콩을 가리키는 말이면 “콩이 많이 나는 땅의 고을”이 되고, 두(豆)가 “큰(大)”이라는 말을 나타낸 이두식 표기라면 “큰 고을”이라는 뜻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