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7만년 역사 71]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조선(朝鮮) 제20대 고홀(固忽) 천왕(天王)의 역사 -

[은(殷)나라의 조공(朝貢)]

서기전1380년 신유년(辛酉年)에 은나라가 사절을 보내 사례하였다.

이때는 은나라 19대 왕인 반경(盤庚) 시절인데, 반경이 수도를 박(亳) 즉 은(殷)에 두어 나라이름을 은(殷)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박(亳)은 처음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가 수도로 삼았던 곳이며, 제곡고신씨의 아들 설(契)이 상(商)에 봉해진 이후 서기전1766년에 은나라 시조 성탕(成湯)이 박(亳)을 수도로 삼았다가, 후대에 홍수로 인하여 상(相), 경(耿, 또는 刑), 비(庇), 엄(奄)으로 옮겼다가 반경이 다시 안양(安陽)의 서쪽이 되는 소위 은허(殷墟)라 불리는 박(亳)을 수도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 단군조선에 사절을 보내어 사례한 은나라 왕은 후기 은(殷)나라를 시작한 반경(盤庚)이 되는 것이다. 반경은 서기전1402년부터 서기전1374년까지 재위하였다.

[북흉노(北匈奴)의 반란]

서기전1377년 갑자년(甲子年)에 북흉노(北匈奴)가 변방에서 어른 노릇을 하므로 군사를 보내 물리쳤다.

북흉노는 흉노의 북쪽 지역의 부족을 가리키는데, 서기전2177년 이후 흉노의 시조가 된 열양(列陽) 욕살(褥薩) 색정(索靖)이 사면(赦免)되어 약수(弱水) 지역에 봉해진 이후 흉노의 세력이 불어난 것이 되고, 약 800년이 지난 서기전1377년경에 이르러 북쪽의 흉노 부족이 흉노는 물론 흉노 부근의 주변을 장악한 것이 되며, 이 북흉노가 질서를 어지럽히므로 단군조선 본국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북흉노를 진압한 것이 된다.

[해가 무지개를 뚫다]

서기전1370년 신미년(辛未年) 가을에 하얀 태양이 무지개(虹)를 뚫었다.

하얀 태양(白日)은 밝게 빛나는 태양, 해를 가리키는데 가을이라 하늘이 맑아 하얀 태양이 되는 것이며, 이 해가 하늘에 뜬 무지개를 뚫고 지나갔다라는 것이다.

하얀색은 원래 해의 빛깔을 가리키는 색으로서, “해”라는 말 자체가 “희”라는 말과 어원이 같은 것이 된다. 빛의 삼원색이 합쳐져 이루는 색이 하얀색이다.

무지개는 물이 하늘에 떠서 띠처럼 지어진 것이라는 “물지개”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며 수증기 같은 자디잔 물방울에 의하여 태양의 빛이 산란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되는데, 태양이 이 무지개를 뚫고 지나갔다라는 것은 태양이 무지개가 져 있던 곳을 통과하였다는 것이 된다.

즉 하늘에 일정지역에 수분이 있어 태양에 의하여 무지개가 져 있던 상태에서 태양이 점점 무지개가 있던 곳을 지나 통과하였던 것이 되는 것이다. 이는 낮에 태양이 운행하는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관찰된 것이 된다.

[은(殷)나라 서울 부근 시찰]

서기전1353년 무자년(戊子年)에 천왕께서 서남쪽으로 행차하여 은(殷)나라 서울에 이르러 다음달에야 돌아왔다.

이때 은나라의 왕은 제20대 소신(小辛)에서 제21대 소을(小乙)로 넘어가던 시기가 된다. 이때 은나라 서울은 박(亳)으로서 서기전1402년에 은나라 제19대 왕인 반경(盤慶)이 수도로 삼았는데, 서기전1766년에 은나라 시조 성탕(成湯)이 수도를 삼은 곳이기도 하여 중경(中京)에 해당하는 중박(中亳)이 되며, 지금의 안양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소위 은허(殷墟)라고 불리는 곳이다.

고홀 천왕이 아사달에서 서남쪽으로 행차하여 은나라 서울인 박(亳)의 근처에 이르렀고 약 한달쯤 지나 아사달로 돌아왔다는 것이 된다.

[영고탑(寧古塔) 이궁(離宮) 건립]

서기전1345년 병신년(丙申年)에 영고탑(寧古塔)을 개축하고 이궁(離宮)을 지었다.

이궁(離宮)은 별궁(別宮)이 되는데, 천재지변이나 전쟁 또는 화재 등 변고가 있을 때 임시수도로 삼은 곳이 된다.

영고탑은 동만주(東滿州)에 위치하며, 위치적으로 대진국(大震國, 발해)의 초기 수도 부근에 있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 진한(眞韓)의 이궁으로는 상춘(常春)의 신경(新宮)과 개원(開原)의 장당경(藏唐京)과 영고탑(寧古塔)이 있는 것이 된다. 상춘은 서기전1285년부터 후기 단군조선의 수도가 된 곳이고, 장당경은 서기전425년부터 말기 단군조선의 수도가 된 곳이기도 하다. 영고탑은 다른 이궁과는 달리 그냥 이궁(離宮)으로 남았던 것이 된다.

[구한(九桓) 지도]

서기전1341년 경자년(更子年)에 공공(共工) 공홀(工忽)이 구한(九桓)의 지도(地圖)를 제작하여 바쳤다.

공공(共工)이라는 직책은 글자로 보더라도 건설 또는 공사와 관련되는데, 공홀(工忽)이 공공의 직을 수행하면서 단군조선의 전체 지도를 제작한 것이 된다.

단군조선은 구한(九桓)의 나라이며, 구한(九桓)은 서기전1797년에 시작된 한국(桓國)의 구한(九桓)이기도 하며 구족(九族)이라 하기도 하고,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는 구이(九夷)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桓國)시대는 구한(九桓)으로 이루어진 나라로서 12분국(分國)을 거느린 시대였다. 이 12분국을 12한국(桓國)이라 하는 것이며, 구한(九桓)을 다스린 임금을 한인(桓因)의 9형제라 하여 9황(黃)이라고도 한다. 9한(桓)에 봉해진 9개국에 다시 3국(國)이 더해져 모두 12국이 되는 것이며, 이들의 중심나라인 중앙조정이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땅이 되는 흑수백산(黑水白山)의 땅이 된다.

이리하여 구한의 지도는 지금의 파미르고원의 동쪽에 위치한 한배달조선의 영역을 그린 지도가 되는 것이며, 고대중국에 해당하는 은(殷)나라도 물론 단군조선의 영역 안에 포함되는 것이 된다. 은나라는 역사상 9이(夷)의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사방(四方)의 4이(夷)로 구성되는 나라이다.

[태자(太子) 소태(蘇台) 즉위]

서기전1338년 계묘년(癸卯年)에 세상이 아직 평안하지 못한데 고홀(固忽)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太子) 소태(蘇台)가 즉위하였다.

세상이 아직 평안하지 못하다는 것은 당시 단군조선의 정세가 조금 혼란스러웠다는 것인데 아마도 제후들이나 욕살들의 군사적 행동에 질서가 흐트러져 천왕의 명령이 잘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서기전1289년에 개사원(蓋斯原) 욕살 고등(高登)이 서기전1291년에 은나라 제22대 무정(武丁)이 점령한 바 있던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서북의 땅을 군사적으로 차지하여 강성하게 되었으며, 이때 고등이 소태 천왕께 우현왕(右賢王)으로 봉해 줄 것을 청하였고, 천왕은 이를 위태롭다하여 허락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고등이 거듭하여 청하므로 마침내 허락하여 두막루(豆莫婁)라 부르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천왕의 명령이 고등의 요청을 묵살할 수 없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단군조선의 정세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귀방과 서북의 땅은 당시 단군조선의 서남쪽 또는 서쪽에 해당하며 단군조선의 봉군후국(封君侯國)인 구려(句麗)와 몽고리(蒙古里) 그리고 한국시대부터 자치세습의 조공국인 선비(鮮卑) 등의 땅이 되는데, 우현왕(右賢王)의 우(右)는 곧 서방(西方)을 나타낸다.

두막루(豆莫婁)라는 말은 “큰마루, 큰머리”를 이두식으로 표기한 글자가 되는데, 서기전108년에 졸본(卒本)의 천자(天子)이던 한(汗)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동명(東明)이라 칭하며 위씨조선을 멸망시킨 한(漢)나라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북부여를 부흥시킨 고두막(高豆莫)의 두막(豆莫)이 곧 “큰마루, 큰머리”를 표기한 것으로 두막루(豆莫婁)의 약자가 된다.

-조선(朝鮮) 제21대 소태(蘇台) 천왕(天王)의 역사 -

[은(殷)나라의 조공]

서기전1337년 갑진년(甲辰年)에 은나라 왕 소을(小乙)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하였다.

소을(小乙)은 은나라 제21대 왕으로 서기전1353년부터 서기전1325년까지 재위하였는데,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의 천왕이 즉위하니 지방 천하의 제후인 왕(王) 즉 천자(天子)로서 조공을 바쳐 예(禮)를 갖춘 것이 된다.

[우사(雨師) 소정(小丁)이 번한(番韓)에 봉해지다]

서기전1333년 무신년(戊申年)에 우사(雨師) 소정(小丁)을 번한에 보(補)하였다.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우사(雨師)의 직을 수행하던 소정(小丁)을 번한(番韓)에 봉하도록 소태 천왕께 임명하도록 권한 데에 따른 것이 된다.

즉, 서기전1333년에 번한(番韓) 해모라(奚牟羅)가 죽자 그 아들을 세습하게 하지 않고, 지모(智謀)가 뛰어났던 고등(高登)이 단군조선 조정(朝廷)의 우사(雨師)이던 소정(小丁)을 번한(番韓)에 봉하도록 소태 천왕께 청을 올려 이룬 것이 된다.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귀방(鬼方) 등 단군조선 땅을 침범하다]

서기전1291년 경인년(庚寅年)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永支) 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고 조공(朝貢)을 바쳤다.

무정(武丁)은 은나라 제22대 왕으로서 서기전1325년부터 서기전1266년까지 재위하였으며, 무정은 무(武)라는 이름 글자에서 보듯이 전쟁을 일삼은 왕이 된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단군조선이 은나라 무정 8년에 해당하는 서기전1286년경에 아사달(阿斯達)을 수도로 한 단군조선이 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이때는 단군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라 서기전1285년에 색불루(索弗婁) 천왕이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서 즉위하여 후기 단군조선을 시작한 것이 된다.

제왕운기에서 말하는 은나라 무정 8년은 연대기적으로 맞지 아니하며 오히려 3년상을 치른 것을 고려하면 무정 38년이 된다. 즉 서기전1325년에 은나라 왕 소을(小乙)이 죽고 무정이 3년상을 치르고 서기전1323년에 정식 즉위하여 38년째인 해가 서기전1286년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왕운기에서 은나라 왕족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의하여 조선(朝鮮)에 봉해진 해가 되는 서기전1122년은 단군조선 1212년이 된다.

또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나이가 1908세라 적은 것은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426년까지로서 아사달시대와 백악산아사달 시대를 합한 기간이 되며, 서기전425년부터 시작된 장당경(藏唐京) 시대 이전이 되는 것이다.

귀방(鬼方)은 서남방(西南方)이나 북방(北方)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의 방향으로 보면 서남방이 되고, 은(殷)나라의 방향으로 보면 북방이 된다. 즉 여기서 귀방은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서남방이 되는 태원(太原) 북쪽 지역이 된다.

귀방 부근에 색도와 영지가 위치하는 것이 되는데, 태원의 북쪽에 색도(索度)가 위치하고 태원의 동쪽 넘어 즉 태항산(太行山) 동쪽이자 고죽국의 수도인 고죽성(孤竹城)의 서북쪽에 영지(永支)가 위치하는 것이 된다. 특히 영지(永支)는 단군조선 번한(番韓)의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이기도 하며, 춘추시대에 이지(離支)라고도 기록되는 곳이다. 고죽국의 수도였던 고죽성은 춘추시대에 무체성(無棣城)이라고도 기록되고 있다.

[개사원 욕살 고등(高登)의 은나라 정벌 등 군사적 행동]

서기전1291년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병사를 일으켜 귀방(鬼方)을 정복하고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永支) 등의 나라를 침범하니, 서기전1289년 임진년(壬辰年)에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몰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멸망시겼으며, 은나라 무정의 군사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索度)에 이르러 병사를 보내어 불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이때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西北)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해졌다. 이에 여러차례 소태 천왕께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右賢王)으로 봉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태 천왕이 이를 위태롭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서 서북의 땅은 귀방, 색도, 영지 등의 서북의 땅을 가리키며, 태원(太原)의 북쪽에 위치한 구려(句麗)의 서부지역과 몽고리(蒙古里)와 선비(鮮卑) 등의 땅이 된다.

[상장(上將) 서여(西余)가 은나라의 북박(北亳)을 습격하다]

서기전1289년경 상장(上將) 서여(西余)가 고등(高登)과 함께 은(殷)나라가 정벌하였던 색도(索度)를 역공하여 정벌한 뒤, 이어서 몸소 은나라의 북박(北亳)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여기의 북박(北亳)은 박(亳)의 북쪽에 있는 곳으로 은나라 제12대 왕인 하단갑(河亶甲)이 수도를 정하였던 상(相)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의 수도는 서기전1402년경 후기 은나라를 시작한 반경(盤庚)이 수도로 삼은 박(亳)이며 지금의 안양(安陽) 서쪽에 위치한 은(殷)이라는 땅으로서 소위 은허(殷墟)라고 불리는 곳으로 중박(中亳)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일군국(一群國)과 양운국(養雲國)의 조공]

서기전1289년 일군국(一群國)과 양운국(養雲國) 두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

일군국(一群國)은 숙신(肅愼)의 땅 수밀이국(須密爾國)에서 서쪽 또는 서북으로 5만리나 떨어진 나라인데, 직선 거리로 따지면 일군국은 지금의 북유럽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된다.

양운국(養雲國)은 바이칼호의 서쪽이자 알타이산 북쪽에 위치한 나라가 된다.

일군국과 양운국은 서기전3897년 이전의 한국(桓國) 시대의 12한국에 속하는 나라로서 자치세습국이 되어 대를 이어 배달나라와 단군조선을 섬긴 것이 된다.

[상장(上將) 서여(西余)가 번한(番韓) 소정(小丁)을 죽이다]

서기전1289년경 상장(上將) 서여(西余)가 은나라의 북박(北亳)을 습격한 뒤, 병사들을 탕지산(湯池山)에 주둔시키고 자객을 보내 번한(番韓) 소정(小丁)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 등을 함께 싣고 돌아왔다.

즉 상장 서여가 번한 소정을 자객을 보내어 살해한 것이 된다. 아마도 천왕의 권세가 약해진 시기에 번한 자리를 차지할 욕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실재역사로 보아 상장 서여는 해성(海城)의 욕살(褥薩)이 되었던 것이며, 서기전1285년에 제22대 색불루 천왕에 의하여 번한(番韓)에 봉해진 인물이 된다.

탕지산(湯池山)은 역사상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이 있는 곳으로 단군조선 번한(番韓)의 요중(遼中) 12성에 속하는 탕지(湯池)에 있는 산이며, 지금의 난하 중하류 지역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난하 동쪽 바닷가 지역에 또한 번한 요중 12성의 하나로서 번한의 동서남북중 5경(京) 중에서 동경(東京)에 해당하는 험독(險瀆)이 위치하고 있다. 험독은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자리가 될 것이다.

[고등(高登)이 모반(謀叛)을 일으키다]

서기전1287년 갑오년(甲午年)에 고등(高登)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開城)에 웅거하면서 소태(蘇台) 천왕에게 항거하였다.

개성(開城)은 개원(開原) 즉 개사원(蓋斯原)에 있는 개사성(蓋斯城)이다. 고등은 개사원 욕살 출신이다. 개사원에 장당경(藏唐京)이 소재하며 개사성 부근에 장당경이 있는 것이 된다. 장당경은 단군조선 초기부터 존재한 이궁(離宮)에 해당한다.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고등(高登)을 토벌(討伐)하러 가다]

서기전1287년에 고등(高登)이 모반(謀叛)을 일으키자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군대를 일으켜 고등을 토벌하고자 하여 홍석령(紅石嶺)의 경계지점에 이르렀는데, 소태 천왕께서 고등을 용서하여 우현왕(右賢王)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토벌을 멈추었다.

[개사원 욕살 고등(高登)이 우현왕(右賢王), 두막루(豆莫婁)로 봉해지다]

서기전1287년 고등이 모반을 하고 있던 중 우현왕(右賢王)으로 봉해 줄 것을 거듭 청하므로 소태 천왕이 마지못하여 이를 허락하고 두막루(豆莫婁)라 부르게 하였다.

우현왕은 단군조선의 오른쪽 즉 서쪽을 맡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두막루(豆莫婁)는 큰마루(大宗), 큰머리(大頭)라는 의미의 이두식 표기가 된다.

소태 천왕이 고등을 우현왕으로 봉하자 모반자 고등을 토벌하러 갔던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토벌을 멈추고 되돌아 온 것이 된다.

[우현왕 고등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右賢王)이 되다]

서기전1286년 을미년(乙未년)에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이 죽고 그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고등의 아들은 우현왕이 되어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 되고 손자(孫子)가 대를 이은 것이 된다.

고등은 고구려에서 시조로 받들며 제사를 모신 인물인데, 서기전1285년 가을 9월에 제22대 색불루 천왕이 장당경(藏唐京)에 고등왕(高登王)의 묘(廟)를 세웠다. 장당경은 곧 개사원(蓋斯原)에 있는 이궁(離宮)이 된다.

색불루는 서기전1285년부터 후기 단군조선을 시작한 인물로서 서기400년경 신라시대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符都誌)에서는 약칭 부루(夫婁)로 기록되기도 하는데, 임검씨(壬儉氏) 시대가 약 천년으로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1286년까지 1048년이며, 부루씨(夫婁氏) 시대가 서기전1285년부터 서기전426년까지 860년이며, 구물(丘勿) 천왕으로 시작되는 읍루씨(浥婁氏) 시대가 서기전425년부터 서기전238년까지 188년으로 부루씨 시대와 읍루씨 시대를 합하면 1048년이 되어 천왕 자리가 이어진 것이 합 2096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서기전238년부터 서기전232년 북부여에 공식적으로 접수되기까지 오가공화정(五加共和政) 6년을 합하면 단군조선의 역년은 2102년이 된다.

[기수(奇首)로 봉해진 서우여(徐于餘)와 우현왕 색불루, 마한 아라사의 반대]

서기전1286년에 소태 천왕이 해성(海城)에서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禪讓)하고자 하며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보고 서우여를 봉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니,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천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도 사람을 보내어 소태 천왕께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는 것을 중지토록 간하였으나, 소태 천왕은 고등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한 아라사와 우현왕 고등은, 소태 천왕이 해성의 욕살 서우여를 살수(薩水)의 기수(奇首)로 봉하고 선양하려 하는 것을 극구 반대한 것이 되는데, 소태 천왕은 이러한 청을 끝내 물리친 것이다.

기수(奇首) 서우여(徐于餘, 西余)를 일명 기자(奇子)라고 하는데 성명이 한서여(桓西余)가 되며, 은(殷)나라 왕족으로서 기(箕) 땅에 자작(子爵)으로 봉해진 기자(箕子) 는 성씨가 자씨(子氏)로서 성명이 자서여(子胥餘)이며, 둘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아마도 서여(西余), 서여(胥餘) 또는 서우여(徐于餘)가 아마도 수유(須臾)와 같은 말로서 잠시, 잠깐이라는 뜻을 지닌 말로 보인다.

서기전1286년에 단군조선의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가 기수(奇首)로 봉해졌다 얼마 안되어 폐하여지고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서기전1160년경 기(箕) 땅에 자작(子爵) 즉 기자(箕子)로 봉해진 자서여(子胥餘)가 서기전1119년에 주(周) 무왕(武王)의 신하가 되지 않고 자작(子爵)의 봉작을 버리고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망명하여 단군조선의 기후(箕侯)가 되었던 것이다. 소위 단군조선의 기후국(箕侯國)을 수유국(須臾國)이라고도 한다.

서우여는 해성(海城)의 욕살(褥薩)인데, 욕살이 되기 이전에는 상장(上將)을 지낸 것이 된다. 즉 서우여가 고등과 함께 은나라를 정벌한 공적(功績)이 있는 상장 서여(西余)라는 인물인 것이며, 아마도 그 공적으로 해성의 욕살에 봉해진 것으로 된다.

[우현왕 색불루의 군사혁명과 마한 아라사의 토벌]

서기전1286년에 우현왕 고등의 손자인 우현왕 색불루가 소태 천왕께 서우여에게 선양(禪讓)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간청하다 듣지 않자,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부여(夫餘)의 신궁(新宮)에서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였다.

이에 마한 아라사는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海城)에서 싸웠는데 전쟁에 지고는 전사(戰死)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마한 아라사는 색불루의 반역행위를 용서하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러 갔던 것이며, 해성(海城)에서 색불루의 군사와 전쟁을 하다가 사망한 것이 된다.

부여의 신궁(新宮)은 백악산아사달에 있는 궁궐로서 서기전2049년에 신경(新京)이라 불려지던 상춘(常春)에 있으며, 서기전1984년 상춘의 구월산(九月山)의 남쪽에 건립된 것이다. 구월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의 다른 표기가 되는 이두식 표기이다.

상춘의 백악산은 녹산(鹿山)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색불루 천왕이 수도를 정한 백악산아사달은 서기전1285년부터 서기전426년까지 880년간 후기 단군조선의 수도가 된다.

[우현왕(右賢王) 색불루(索弗婁)의 천왕 즉위와 소태 천왕의 선양(禪讓)]

서기전1286년에 우현왕(右賢王) 색불루(索弗婁)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부여(夫餘)의 신궁(新宮)에서 천왕으로 즉위하고서 사람을 보내 오므로, 소태 천왕은 선양(禪讓)하지 아니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를 전하고, 은퇴하여 아사달(阿斯達)에서 평민(平民)으로 살면서 생을 마쳤다.

색불루 천왕이 백악산(白岳山)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불가하다고 고집을 피우니,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 등이 조칙(詔勅)을 받아 그들을 설득하였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마침내 따랐다.

옥책과 국보는 단군조선 중앙조정(中央朝廷)의 국보급 귀중품을 가리키며 특히 천왕의 권한을 상징하는 국새(國璽)를 포함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선양은 진정한 선양이 아니며, 군사력을 내세운 강압적 선양에 해당된다. 즉 군신(君臣)의 도(道)가 무너진 것이 된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군신(君臣)은 없어지고 부자(父子)관계만 존재하였다는 식으로 임금의 대가 164년간 끊어진 취지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서기전1285년부터 서기전1122년까지 164년은 엄연히 색불루(索弗婁) 천왕의 대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며, 색불루 천왕은 자신이 선대 단군의 자리를 계승하였음을 하늘에 제(祭)를 올려 고(告)하였고, 그 뒤로 단군조선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므로, 164년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오해에 따른 것이 된다.

제왕운기는 은나라 기자(箕子)가 주무왕(周武王)에 의하여 조선(朝鮮) 땅에 봉해진 것을 단군조선 땅 전체에 봉해졌다는 취지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되어 역사적 오류가 심하다. 이는 이미 춘추필법(春秋筆法) 나아가서 역사날조 방식으로 이어져 온 고대중국의 역사기록으로 말미암아, 후세인(後世人)들이 진실한 역사적 자료를 보지 못하여 역사지식에 한계가 있는 데서 기인한 것이 된다.

[기수(奇首) 서우여(徐于餘)의 서인(庶人) 강등과 군사적 반항]

서기전1286년에 소태 천왕은 옥책과 국보를 색불루에게 전하여 선양하고서, 이전에 살수(薩水)지역의 기수(奇首)로 봉했던 서우여(徐于餘)를 폐하여 서인(庶人)이 되게 하였다.

이로써 서우여는 기수(奇首)도 아니며, 이미 해성(海城)의 욕살(褥薩)로 아닌 그냥 평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우여는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자 몰래 좌원(坐原)에 돌아와 군사를 일으켰으며, 이에 색불루 천왕의 신하이던 개천령(蓋天齡)이 토벌하러 가서 서우여와 전쟁을 하다가 전사하였다.

이러하자, 색불루 천왕이 몸소 삼군(三軍)을 이끌고 서우여(徐于餘)를 토벌하러 갔으며, 이때 먼저 사람을 보내어 서우여를 비왕(裨王)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며 다시 설득하니, 이에 서우여가 따르므로 전쟁을 그치고 서우여를 천왕(天王)의 비왕(裨王)인 번한(番韓)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후기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시조는 서우여(徐于餘) 즉 전기 단군조선의 종실(宗室)인 한서여(桓西余)이다.

[소태(蘇台) 천왕의 아사달(阿斯達) 은거]

서기전1286년에 우현왕 색불루에게 천왕 자리를 선양한 소태 천왕은 아사달에 은퇴하여 일반인으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아사달은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1286년까지 전기 단군조선의 수도이다. 이후 서기전426년까지 상춘(常春)인 백악산아사달이 후기 단군조선의 수도가 된다. 상춘은 고구려의 초기 수도로서 눌현(訥見)이라는 곳이며, 지금의 장춘(長春)이다. 눌현(訥見)은 한자로 읽는다면 눌견으로 읽는 것이 맞으며, 이두식으로 “늘봄(常春)”이라는 말을 나타낸 이두식 표기가 된다.

[고죽군자(孤竹君子) 백이숙제(伯夷叔弟)의 은거(隱居)]

서기전1286년 소태 천왕이 강압을 받아 색불루 천왕에게 선양하고 아사달에 은퇴하자, 고죽국(孤竹國)의 군자(君子)이던 백이(伯夷)와 숙제(叔弟)도 나라를 버리고 동해(東海)의 물가로 피하여 살면서 밭갈기에 힘쓰며 자급자족(自給自足)하며 살았다.

고죽국(孤竹國)이라는 나라이름은 글자대로 외로운 대나무의 나라가 아니라, 이두식 표기로서 “곧 대 나라” 즉 “곧은 대나무 나라”로서 절개(節槪)가 곧은 나라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동해(東海)는 고죽국(孤竹國)의 동해로서 지금의 발해만이 된다. 고죽국은 지금의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등을 중심으로 하여 발해만 서쪽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데,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 이후에 봉해진 나라로서 하(夏)나라 이전부터 존속한 나라이며, 서기전1766년 은(殷)나라 시조 탕(湯)이 하나라를 멸하고 은나라를 시작할 때 고죽국의 임금이던 묵태씨(墨胎氏)가 은탕의 즉위를 축하하였던 것인데, 백이와 숙제는 묵씨(墨氏) 또는 묵태씨(墨胎氏)가 되는 것이다. 한편, 제자백가 중 한 사람인 묵자(墨子)도 그 성씨가 묵씨로서 고죽국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서기전1286년 당시 고죽국에는 군자(君子)가 셋이 있었던 것이 되는데, 백이(伯夷)와 숙제(叔弟)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형제가 된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중간 형제에게 양보하여 군(君)의 대를 잇게 하고 동해 물가로 피하여 숨어 살았던 것이다.

맏이 이름에 백(伯)을 쓰고 막래 이름에는 숙(叔)을 쓰며 가운데 형제의 이름에는 중(仲)을 쓰는데, 고죽국의 백이와 숙제 사이에 있는 형제는 중(仲)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백이(伯夷)라는 이름은 고대중국에 흔히 사용되던 이름이라고 보면 될 것이고, 숙제(叔弟)는 그냥 보통명사이기도 하다.

서기전1134년경 주(周)나라 태공 여상(呂尙)이, 주문왕(周文王)의 3년상(年喪) 중에 있던 주무왕(周武王)이 행차하던 앞길을 막고 주무왕이 불충(不忠)과 불효(不孝)를 짓고 있다며 충효(忠孝)에 관하여 설파하던 백이와 숙제를, 의인(義人)이라 하며 두 노인(老人)을 부축하게 하였다는 고사(古史)를 보면, 서기전1211년생이며 서기전1073년까지 139세를 살았던 강태공은 이때 약 78여세가 되어 노인이나 다름없었는데, 백이와 숙제는 서기전1286년에 최소한 15세라 하면 이미 167세를 넘는 나이가 되어 강태공보다 약 90세정도가 많았던 것이 된다.

여기서 군자(君子)는 공자가 말한 도(道)를 지키는 군자(君子)라는 의미보다는 군(君)의 아들(子)로서, 고죽국(孤竹國)의 임금인 고죽군(孤竹君)의 아들(子)로서의 뜻이 된다.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으로서 일반제후국보다는 그 지위가 높은 나라이다. 즉 군(君),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순으로는 군(君)이므로 제일 윗자리가 된다. 단군조선의 본 임금은 천왕이니 단군조선의 제후가 되는 그 아래 군후(君侯)들은 각각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이 되는데, 고죽국의 임금은 곧 천군(天君)이 되는 것이다.

고대중국의 임금을 천자(天子)라 하는데, 곧 중앙 즉 천상(天上)의 나라가 되는 배달조선의 제후가 되는 지방 즉 천하(天下)의 왕(王)이 된다. 고죽국의 임금은 천군(天君)이며 은나라의 임금은 천자(天子)로서 위계질서를 따진다면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그리하여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등 고대중국의 기록처럼 고죽국은 은나라의 제후국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은(殷)나라는 단군조선의 일반제후(一般諸侯)가 되는 자국(子國, 子爵國)에 해당되는 것이다.

[수도 녹산(鹿山) 개축]

서기전1285년 병신년(丙申年) 1월에 색불루 천왕이 명하여 녹산(鹿山)을 수축(修築)하게 하고, 마침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였다.

녹산(鹿山)은 상춘(常春, 지금의 長春)에 있으며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 있는 산이다. 수축(修築)이라 함은 개축(改築)과 같은 의미로서 기존의 건물을 보수(補修)한 것이 되어 이미 녹산에는 궁궐이 있었던 것이 된다.

즉, 후기 단군조선의 수도는 백악산아사달인데, 녹산(鹿山)에 있는 기존의 궁궐을 수축하였다는 것이 되는 바, 상춘에 백악산아사달이라 불리는 곳이 있어, 그 안에 백악산(白岳山)이라는 산이 소재한 아사달이라는 지역이 있으며, 이 백악산아사달의 땅 안에 궁궐을 수축한 녹산(鹿山)이 있는 것이다.

상춘(常春)은 서기전2049년에 신경(新京)이라고 불린 지역이며, 서기전1984년에 이 상춘 땅 안에 있는 구월산(九月山)의 남쪽 기슭에 이궁(離宮)이 되는 신궁(新宮)을 건립하였던 것이고, 구월산(九月山)이 곧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서 아사달이라고 불린 것이 된다.

그리하여 상춘에는 대표적인 산으로 가장 높은 산이며 밝은산, 밝산의 이두식 표기가 되는 백악산(白岳山)이 있으며, 그 산줄기에 아사달산 즉 아침산(朝山)이라는 뜻의 구월산(九月山)이 있고, 이 구월산 줄기에 궁궐이 있는 나즈막한 산으로서 사슴같이 생긴 모양의 녹산(鹿山)이 있는 것이 된다. 즉 서기전1984년에 건립한 구월산 남쪽 기슭의 신궁(新宮)이 있는 산이 녹산(鹿山)이 되는 것이다.

[은나라 무정(武丁)이 예를 올리다]

서기전1285년 은(殷)나라 무정(武丁)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은나라 왕 무정은 제22대 왕으로서 서기전1325년부터 서기전1266년 사이에 재위하였는데, 이름에서 보듯이 전쟁을 즐긴 인물이 된다.

무정은 서기전1291년에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서남방이자 번한(番韓)의 서방 즉 태원(太原)의 북쪽과 동북쪽에 위치한 귀방(鬼方)을 정벌하고 이어 색도(索度), 영지(永支) 등을 침공하였다가, 색도와 영지 등의 전쟁에서 당시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과 상장(上將) 서여(西余)에 의하여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고 조공을 하였으며, 이후 서기전1289년에 개사원 욕살 고등이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켰고, 이 당시 상장 서여는 은나라의 북박(北亳)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서우여를 번한에, 여원흥을 마한에 봉하다]

서기전1285년에 천왕이 서우여(徐于餘)를 번한(番韓)에 봉하고, 여원흥(黎元興)을 마한(馬韓)에 봉하였다.

서우여(徐于餘)는 전기 단군조선의 천왕의 종실(宗室)로서 한씨(桓氏)가 되고, 여원흥은 웅녀군(熊女君)의 후손이다. 웅녀군은 웅녀인 임금이라는 말로서, 서기전3897년경 배달나라 초기에 한웅천왕이 가르침을 주자 따르므로 백성으로 받아들인 웅족(熊族)의 여성 임금이다. 서기전2800년경 이 웅녀의 후손에 여(黎)가 있어 단허(檀墟)에 봉해지고, 여원흥은 이 여씨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배달나라의 웅족(熊族)에서 웅씨(熊氏), 고씨(高氏), 강씨(姜氏), 여씨(黎氏), 공손씨(公孫氏), 희씨(姬氏) 등이 나왔다. 즉 배달나라의 제후가 되는 염제신농씨와 황제헌원씨가 모두 웅족 출신이며, 단군조선 초기에 마한으로 봉해진 웅백다(熊伯多)는 웅씨(熊氏)로서 웅족의 후손이며, 후기 단군조선의 천왕이 된 색불루(索弗婁)가 고씨(高氏)로서 웅족의 후손이며 이때 마한(馬韓)에 봉해진 여원흥은 여씨로서 웅족의 후손인 것이다.

[조서(詔書)를 내리고 천제(天祭)를 지내다]

서기전1285년 봄 3월에 조서(詔書)를 내려 가로되, “며칠 전에 아사달에 사람을 보내어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를 전하게 함으로써 전(前) 천왕께서 선양(禪讓)토록 하였노라. 이제 비록 호칭을 세습하여 존귀하게 되었으나, 그 해내산천(海內山川)은 이미 그 이름이 장부에 실렸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예(禮)는 당연히 나라의 법전(法典)에 있나니, 가히 남용할 것이 아니로다. 반드시 옛 실례를 따름으로써 정성과 공경을 다할 것이로다. 이제 마땅히 제사를 올리고 신(神)을 맞이함에, 먼저 가서 택일하여 목욕재계하고, 신(神)의 영역을 살피고 청소하여, 희생(犧牲)과 폐물(幣物)을 깨끗이 마련하고, 삼신(三神)께 올려 보답할지어다” 하셨다.

이에 천왕께서 7일을 택일(擇日)하여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향(香)과 축문(祝文)을 여원흥에게 주어, 16일에 이르러 이른 아침에 삼한(三韓)의 대백두산(大白頭山)의 천단(天壇)에서 공경하게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으며, 천왕은 몸소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서 제사를 올렸다.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는 나라의 천왕권을 상징하는 귀중품으로서 특히 국새(國璽)를 포함한 것이 된다.

선양(禪讓)은 평화적으로 적임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넘겨준다는 의미인데, 역사적으로 진정한 선양은 그 기록이 거의 없는데, 이때 소태 천왕께서 색불루 천왕에게 한 선양도 소위 군사혁명(軍事革命)에 해당하는 강압적 선양이 된다.

우리 한국의 역사상 최초의 선양은 서기전1286년에 일어난, 소태(蘇台) 천왕이 우현왕(右賢王) 색불루(索弗婁)에게 한 선양이 되는데, 이러한 역사사실에서 “소태맞는다”는 말이 유래되었다고도 보인다. 소태는 쓴 맛을 뜻하는 말인데, 옛날에는 애기 젖을 뗄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즉 소태맞는다는 말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즉 거의 강제적으로 포기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된다.

이미 단군조선 시대에는 법전이 있었던 것이 된다. 그리하여 국토의 지명이 장부에 기록되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예법(禮法)이 나라의 법전(法典)에 모두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신(神)을 맞이함에는 먼저 택일(擇日)하여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신(神)의 영역인 제단(祭壇)을 말끔히 청소하였던 것이 된다.

희생(犧牲)으로는 주로 소(牛), 양(羊)을 사용하였다. 희생(犧牲)이라는 글자에 소(牛)가 들어 있어 소가 주로 희생동물로 사용된 것이 나타난다. 또 희생양(犧牲羊)이라는 말이 있듯이 소 대신 양이 희생으로 올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목욕재계(沐浴齋戒)는 택일하여 행하였는데, 계불(禊祓)이라는 의식으로서 그 유래는 서기전7197년경 한국(桓國) 시대 초기부터 제사장(祭司長)을 겸하던 임금에 의하여 행해진 것이 된다. 즉, 전기 한국시대에는 황궁씨(黃穹氏)가, 중기 한국시대에는 유인씨(有因氏)가, 후기 한국시대에는 한인씨(桓因氏)가 각 계불의식을 행하며 마고성(麻姑城) 낙원시대로 회복한다는 복본(復本)의 서약(誓約)을 실천하였던 것이 된다.

색불루 천왕은 향(香)과 축문(祝文)을 마한(馬韓)에 봉해진 여원흥(黎元興)에게 하사하여 3월 16일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지내게 하였던 것인데, 마한 여원흥이 이른 아침에 단군조선 삼한(三韓)의 중앙에 위치한 대백두산(大白頭山)의 천단(天壇)에 올라 천제(天祭)를 올리도록 하였던 것이다. 대백두산(大白頭山)은 당시의 태백산(太白山)으로서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이 된다.

당시 색불루 천왕은 몸소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는데, 백악산아사달은 상춘(常春)에 있고 제천단(祭天壇)은 아사달산이 되는 구월산(九月山)에 있었던 것이 된다. 상춘은 지금의 장춘(長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