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7만년 역사 69]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조선(朝鮮) 제12대 아한(阿漢) 천왕(天王)의 역사 -

[외뿔 짐승 출현- 해치(해태)]

서기전1833년 무자년(戊子年) 여름 4월에 뿔이 하나인 외뿔 짐승(一角獸)이 송화강의 북쪽에 나타났다.

외뿔 짐승 즉 뿔이 하나만 달린 짐승을 일각수(一角獸)라 하는데, 양(羊)과 같이 생겼다 하여 외뿔양이라고도 한다. 이 외뿔양이 바로 해치(獬豸, 廌)이다. 원래 법(法)이라는 글자는, 물의 흐름을 따라 해치(廌)가 따라가는 모습을 조합한 회의문자(會意文字)로서 해치(廌)를 내포(內包)하고 있던 글자인데, 이 廌(치)를 생략하여 약자(略字)로서 法(법)이라 쓰게 된 것이 된다.해치는 고대중국의 순(舜)임금 시절에 신령스런 동물로 전하는데, 선악(善惡)을 구분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단군조선의 삼사오가(三師五加) 제도에서 선악(善惡)을 담당하였던 양가(羊加)의 업무와 직결된다, 그리하여 해치는 순임금 시절에 형벌(刑罰)을 담당하였던 고요(皐陶)라는 사람이 관직에 해치(廌)를 사용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후대 조선시대에도 법과 형벌을 관장하는 관청이 되는 사헌부(司憲府) 등에서 해치(廌)를 관모(官帽)나 관복(官服)에 새기기도 하였다.

한편, 경복궁 앞에 화기(火氣)를 죽이기 위하여 세운 소위 해태(海駘)는 현재 서울의 상징동물이기도 한데, 원래는 해치(獬豸, 廌)는 일각수(一角獸)인 외뿔양(一角羊)으로서 선악(善惡)을 구분하는 신령스런 동물이었으나, 해치(廌)를 법(法)이라는 글자에서 유추하여 물(水)과 관련된 해태(海駘)라고 인식함으로써 불을 진압(鎭壓)하는 신령스런 동물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 된다.

당시 송화강(松花江)은 속말(粟末)로 표기 되기도 하며 지금의 우수리강(牛首里江)에 합류하는 강으로서, 단군조선 전기의 수도가 되는 아사달(阿斯達)이 위치한 강이며, 그 북쪽에 외뿔 짐승이 출현하였다 하는 것이다.

외뿔 짐승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선악(善惡)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되는데, 원래 일각수(一角獸)가 순임금 시절에 관직에 사용한 상징적인 동물인 바, 순(舜)임금 나라의 땅을 이어 세운 하(夏)나라에 무슨 변고(變故)가 생긴 것을 알리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이는 서기전2224년에 선 하(夏)나라가 약400년이 지나면서 이때부터 망조(亡兆)가 나타난 것을 알리는 것이 된다.

[요하(遼河) 동쪽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

서기전1833년 가을 8월에 천왕께서 나라 안을 순수하시며 요하(遼河)의 왼쪽(左)에 이르러 순수관경비를 세우고 역대 제왕(帝王)의 명호(名號)를 새겨서 전하게 하였다.

요하(遼河)는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한 강이 아니라, 단군조선 당시에 요중(遼中)에 위치한 강으로서 후대에 소위 요수(遼水)라 하여 요동(遼東)과 요서(遼西)의 구분을 짓는 큰 강이 되는데, 원래 북류(北流)하는 황하(黃河) 하류에 합류하던 강이 될 것이며, 북경 부근을 흐르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가 된다.영정하(永定河)가 원래의 요수(遼水)로서 대요수(大遼水)가 되고 영정하 중상류 지역에 합류하는 강으로서 북동에서 서남으로 흐르는 강이 청수하(淸水河)로서 소요수(小遼水)이다. 대요수의 중하류 지역이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고죽국(孤竹國)의 영역이 되며, 대요수의 상류지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諸侯國)인 기후국(箕侯國, 소위 箕子國)의 북부지역이자 구려국(句麗國)의 서남지역에 속하게 되고, 소요수 지역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구려국(句麗國)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된다.

요하의 왼쪽은 곧 요하의 동쪽이 된다. 그리하여 순수관경비가 세워진 곳은 요하의 동쪽으로서 지금의 영정하 동쪽이 된다. 이 곳은 단군조선의 발해만 유역에 있었던 번한(番韓)이 위치한 지역이다. 즉 번한은 고죽국의 동쪽, 구려국의 남쪽, 진번국(眞番國)의 서쪽에 위치한다. 진번국은 진한(眞韓)과 번한(番韓)의 사이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으로서 지금의 요동반도 서쪽을 흐르는 요하(遼河)의 서쪽지역과 대릉하 동쪽지역이 된다. 진번의 남쪽에 임둔(臨屯)이 위치한다.

단군조선 시대 요하의 동쪽이 되는 번한 땅에 세워진 순수관경비의 유적을 보고 서기전220년경 인물인 창해역사(蒼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이 지은 시가 고려시대 문하시중을 지내신 이암(李嵒)선생이 지은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전한다. 창해(蒼海)는 고대 중국의 북해(北海) 또는 동북해(東北海)로서 지금의 발해(渤海)를 가리키며 여홍성의 여씨(黎氏)는 산동지역의 동이족(東夷族)과 직결되는 성씨이기도 하다.

여홍성이 지은 시는 아래와 같다.

“마을 밖 변한이라 불리는 곳에,
독특하게 빼어난 변함없는 돌이 있네.
받침은 거칠어지고 철축꽃은 붉기만 하고,
글자는 허물어지고 이끼는 푸르기만 하네.
처음 다듬어져 생긴 채로,
흥망의 돌로 서 있네.
문헌에는 증거가 없을지나,
이것이 단씨의 흔적이 아니랴!
(村郊稱弁韓 別有殊常石 臺荒躑躅紅 字沒莓苔碧 生於剖判初 立了興亡石 文獻俱無徵 此非檀氏跡)”

여홍성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 된다. 단군조선의 변한 땅이 어디인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홍성은 진시황(秦始皇)을 철퇴(鐵槌)로 쳐 죽이려다 부차(副車)만 부수고 실패하였던 산동지역 동이족 출신의 인물이다.

여홍성이 말한 변한(弁韓)은 번한(番韓)을 음차(音借)한 글자로서 서기전209년 이후 한반도 남쪽에 세워진 후삼한(後三韓)의 변한이 아니라 곧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194년경까지 단군조선의 비왕(裨王)인 번한(番韓)이 다스리던 발해만 유역에 위치하였던 원래의 번한(番韓)을 가리키는 것이다.

창해역사 여홍성이 보았던 단군조선 번한(番韓)에 세워진 비석은 원래의 요하(遼河), 요수(遼水)였던 지금의 북경(北京) 동쪽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의 중하류 지역 바로 동쪽에 세워졌던 것이다.

[용가(龍加) 소속 내량(來良)과 하걸(夏桀)과 상탕(商湯)]

서기전1813년 무신년(戊申年)에 용가(龍加) 소속 내량(內良)을 파견하여 하(夏)나라 걸(桀)왕을 도와 상(商)나라 탕(湯)을 치다가 탕이 사죄하므로 내량이 군사를 돌렸다. 이때 내량이 염이(厭夷) 때문에 관중(關中)의 기주(岐周)에 살게 되었다.

단군조선 시대에 삼사오가(三師五加)에서 나아가 팔가(八加) 구가(九加)라고도 부르는데, 팔가는 삼사오가를 합칭한 것으로 되기도 하고, 구가는 팔방과 중앙을 합친 구방을 직책으로 분류한 것이 되는데, 용가(龍加) 또는 호가(虎加)가 총괄직에 해당한다.

단군조선 초기에 팔가구가(八加九加)로 기록된 것을 나열해 보면, 호가(虎加)는 용가(龍加)라고도 하며 태자부루(太子扶婁)가 맡았던 직책이고, 마가(馬加)는 신지씨(神誌氏)가 맡았으며, 우가(牛加)는 고시씨(高矢氏)가 맡았고, 웅가(熊加)는 치우씨(蚩尤氏)가 맡았으며, 응가(鷹加)는 부소(扶蘇)가 맡았고, 노가(鷺加)는 녹가(鹿加)라고도 하는데 부우(扶于)가 맡았으며, 학가(鶴加)는 주인씨(朱因氏)가 맡았고, 구가(狗加)는 여수기(余守己)가 맡았으며, 봉가(鳳加)는 아밀(阿密)이 맡았다.

웅가(熊加)는 국방군사 담당으로서 목숨을 담당한 마가(馬加)에서 파생된 것이 되며, 응가(鷹加)는 형벌 담당으로서 구가(狗加)에서 파생된 부서가 되고, 노가(鷺加)는 질병(疾病) 담당인 저가(豬加)에 해당되며, 학가(鶴加)는 선악(善惡)을 담당하여 양가(羊加)에 해당하고, 봉가(鳳加)는 재정(財政) 담당으로서 부루단군 천왕 때 신설된 부서가 된다.

단군왕검 천왕 시대에 오가(五加)의 업무 중에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는 명칭을 그대로 두고, 양가(羊加)는 배달나라 시대 때에는 계가(鷄加)라고도 하였던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 시대에는 학가(鶴加)라 별칭한 것으로 되며, 저가(豬加)를 노가(鷺加)로 별칭하고, 마가(馬加)에서 웅가(熊加)를 별도로 두어 치우(治尤)의 별칭이 된 것으로 되고, 구가(狗加)에서 응가(鷹加)를 별도로 두고, 총괄직으로서 용가(龍加) 또는 호가(虎加)를 신설하였던 것이며, 부루천왕 때 저가(豬加) 또는 노가(鷺加)에서 별도로 봉가(鳳加)를 신설한 것이 된다.

호가 또는 용가는 태자부루가 맡아 진한(眞韓)으로 봉해졌으며, 마가 신지씨는 숙신(肅愼)에 봉해지고, 우가 고시씨는 청구(靑邱)에 봉해지고, 웅가 치우씨는 남국(藍國)에 봉해지고, 응가 부소는 단군왕검 천왕의 둘째아들로서 구려(句麗, 九黎)에 봉해지고, 노가 부우는 단군왕검 천왕의 셋째아들로서 진번(眞番)에 봉해지고, 학가 주인씨는 개마(蓋馬)에 봉해지고, 구가 여수기는 예국(濊國)에 봉해졌는데, 여기에 단군왕검 천왕의 넷째아들인 부여(扶餘)가 부여에 봉해지고, 그 외 옥저(沃沮)가 봉해져 모두 기본 9군후국(君侯國)이 되며, 그 외에도 졸본(卒本), 비류(沸流) 등 소국들이 많았다.

내량(內良)은 단군조선의 팔가(八加) 중 총괄직인 용가(龍加)에 소속된 인물로서 하(夏)나라 걸(桀)왕을 도우라고 명을 받고 파견되었던 것이며, 상(商)나라 탕(湯)을 치다가 탕이 사죄하므로 군사를 돌렸던 것이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서남방이 되는 서이(西夷)에 속하는 염이(厭夷)의 소란 때문인지 내량(內良)이 단군조선 본국으로 복귀하지 아니하고, 서기전1766년 이후 은(殷)나라 시대에 백작(伯爵)의 제후국인 주(周)나라가 소재하였던, 관중(關中)의 기주(岐周)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은 견이(畎夷)와 가까운 곳인데, 백이(白夷)에 해당하는 서이(西夷)와 더불어 하은주의 서쪽 변방을 다스렸던 것이다.

내량이 활동한 역사는 서기전1767년에 신지 우량(于亮)이 견군(畎軍)을 이끌고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는 역사와 연관된다. 빈기는 빈(邠)과 기(岐)의 땅이며 은나라 제후국으로서 은나라를 멸하고 세운 주(周)나라의 제후국시절 주무대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하(夏)나라의 제후국이던 은나라의 제후 탕(湯)이 서서히 군사를 일으킨 것이 되는데, 서기전1766년에 은나라를 세우기까지 최소한 약 50년간의 준비기간이 있었던 것이 된다. 은탕(殷湯)은 이윤(伊尹)을 재상(宰相)으로 삼아 하(夏)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잡았는데, 은(殷)의 원래 국명이 상(商)이므로 상탕이라고도 한다.

이때는 단군조선이 정식 천자국인 하(夏)나라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소위 반란군이 되는 은탕(殷湯)의 군사를 진압한 것이 된다. 아직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인정 즉 천명(天命)을 받지 못한 것이 된다.

[욕살을 한(汗)으로 승진시켜 봉하다]

서기전1806년 을묘년(乙卯年)에 청아(靑莪) 욕살(褥薩) 비신(丕信)과 서옥저(西沃沮) 욕살 고사침(高士琛)과 맥성(貊城) 욕살 돌개(突蓋)를 열한(列汗)으로 봉하였다.

욕살은 지방장관에 해당하는데 이들 비신, 고사침, 돌개를 봉하여 욕살 윗 단계가 되는 한(汗)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욕살은 원(原)이나 성(城)의 책임자이며, 한(汗)은 지방의 왕(王)인 제후(諸侯)에 해당하는데, 소위 제후라는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즉 단군조선의 한(汗)은 소위 천자(天子)격에 해당된다.

서기전108년 북부여 시대에 위씨조선이 한(漢)나라에 망하자 졸본(卒本)의 한(汗)이었던 고두막(高豆莫)이 의병을 일으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하며 한나라와 전쟁을 하였는데, 이 고두막한(高豆莫汗)이 곧 북부여의 제후인 천자(天子)인 것이다.

고사침은 그 성씨가 고씨임을 알겠으나 ,비신과 돌개는 그 성씨가 불명이나 아마도 단군조선의 종실로서 한(桓)씨일 가능성이 많은데, 한편, 단기고사에서는 한불배(韓不倍), 신돌개(申突蓋)라고 적고 있어 비신의 성씨가 한(桓,韓)씨이며, 돌개의 성씨가 신(申)씨임을 나타내고 있다. 불배는 아마도 필사과정에서 비신을 잘못 쓴 것으로 되는데, 비신(丕信)이 맞는 것이다.

[하(夏)나라의 망조(亡兆)가 무르익다]

서기전1799년 임술년(壬戌年)에 하(夏)나라 사람이 들어와 걸왕(桀王)이 무도하여 스스로 망할 것이라 전하였다.

걸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데, 말기에 달기(妲妓)라는 여자에 빠지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여 나라의 정세(政勢)가 극도록 불안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에 제후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고 하나라의 제후국에 해당하는 상(商)나라의 탕(湯)이 군사를 일으키곤 한 것이다.

서기전1833년에 송화강의 북쪽에서 외뿔짐승(一角獸)이 출현한 것은 하(夏)나라의 망조(亡兆)를 나타낸 자연현상이 될 것이며, 서기전1813년에 상탕(商湯)이 군사를 일으키자 하나라 걸왕이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고, 이에 단군조선이 군사를 내어 탕을 치도록 하니 탕이 사죄하므로 군사를 물렸던 것이 된다.

그런데, 하나라 걸왕의 폭정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므로 상탕(商湯)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고, 결국에는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사부(師傅)가 된 유위자(有爲子) 선인(仙人)의 제자였던 이윤(伊尹)을 재상(宰相)으로 둔 탕(湯)이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서기전1766년에 하나라를 멸하고 상(商,殷)나라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하(夏)나라는 서기전2224년에 우(禹)가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의 명을 받아 유상(有象)과 함께 순임금을 협공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우의 군사가 순임금을 죽였고, 이에 우가 권력욕에 눈이 멀어 단군조선의 명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면서 독단(獨壇)을 설치하여 결국 단군조선을 반역하였던 것이고, 정식 천자국(天子國)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후대에 하나라 왕이 단군조선에 예를 표하면서 묵시적(黙示的)으로 천자국을 인정받은 것으로 된다.

하(夏)나라 말기에 상탕(商湯)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을 해오자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로 보아 하(夏)나라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의 천자국(天子國)임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되고 실제로 망하기 이전인 서기전1813년과 서기전1767년 등 두차례 이상 군사적 구원을 받은 사실이 있기도 하다.

[은탕의 재상 이윤(伊尹)의 스승, 유위자(有爲子)]

서기전1797년 갑자년에 하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상(商)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마다하고 단군조선에 많이 망명하였다. 이윤(伊尹)이 상(商)나라 탕(湯)의 재상이 되어 탕을 도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쳤다. 이에 이윤의 스승이었던 유위자(有爲子)가 “이는 사람을 사랑하고 하늘을 따르는 일이지만 이윤(伊尹)이 아니면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때 하나라 사람들이 단군조선에 대거 망명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역사적 망명 사건은 이후 중국역사에서 종종 나타나며, 하(夏)나라의 건국 당시인 서기전2224년경에도 하나라 시조 우(禹)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면서 단군조선의 정치제도를 흉내내어 마음대로 제후를 봉하고 조공(朝貢)을 받는 등 폭돌한 정치를 펼치므로, 이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라의 땅에서 탈출하여 단군조선 직할 영역으로 망명하였던 사실도 있었다.

이윤(伊尹)이 처음부터 상탕(商湯)의 사람이 아니었으나, 상탕이 결국 이윤(伊尹)을 재상(宰相)으로 등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이 팽창하고 민심(民心)을 얻음과 더불어 하(夏)나라를 멸할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결국에는 단군조선의 군사적 후원까지 얻어 천명(天命)이라는 명분(名分)하에 하나라를 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위자 선인은 서기전1950년경 이전에 출생하여 서기전1797년 현재 약150세이던 때가 되는데, 이윤이 상탕의 재상이 되어 본격적으로 하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나라는 이미 기울었고 이 하(夏)나라를 경략할 인물로 곧 이윤만이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서기전268년에 지었다는 위(魏)나라 사람이자 공자(孔子)의 7세손으로 전하는 공빈(孔斌)의 홍사(鴻史) 서문에도 유위자(有爲子) 선인(仙人)의 제자이던 이윤(伊尹)이 은탕(殷湯)의 재상(宰相)이 되었다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이에 앞서 유위자 선인은 서기전1833년에 송화강 북쪽지역에 출현한 외뿔짐승을 하(夏)나라의 망조(亡兆)로 내다보았고, 서기전1797년에 이르러 유위자(有爲子) 선인이 하(夏)나라를 대신할 은(殷)나라는 이윤(伊尹)의 보좌(輔佐)로 이룰 것이라 단정한 것이 된다.

[우가(牛加) 홀달(屹達) 즉위]

서기전1783년 무인년(戊寅年)에 상나라 사절이 처음으로 입조하였다. 이해 7월에 아한(阿漢) 천왕이 붕하고 우가(牛加) 흘달(屹達)이 즉위하였다.

이때, 상(商)나라가 하나라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어느 정도 힘을 과시하던 때가 되는데, 상나라의 상국(上國)이 되는 하(夏)나라를 무시하고 하(夏)나라의 상국(上國)이 되는 단군조선(檀君朝鮮)에 직접 사절을 파견하여 예를 표한 것이 된다. 이때까지 단군조선은 하(夏)나라 정세를 관망한 것이 되며 하나라와 상나라 중 어느 나라를 후원할지는 도(道)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정하였던 것이 된다.

이 흘달(屹達)을 대음달(代音達)이라고도 하고, 제15대 대음(代音) 천왕의 대음(代音)을 후흘달(後屹達)이라고 하는데, 흘달(屹達)이 클달(泰地)의 음차가 되는 글자라면, 대음달(代音達)의 대음(代音)은 대음(大音)으로서 “큼”을 나타낸 이두식 표기가 되는 것이라 보이기도 한다.

-조선(朝鮮) 제13대 흘달(屹達) 천왕(天王)의 역사 -

[지방행정 단위인 주현(州縣)을 정하다]

서기전1767년 갑오년(甲午年)에 주(州)와 현(縣)을 정하고 직책의 분권제도를 세웠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지 않고 정치는 법칙을 넘어 섬이 없으니,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 거문고 노랫소리가 넘쳐 흘렀다.

단군조선 초기에 이미 경(京), 이궁(離宮), 국(國), 주(州), 원(原), 성(城), 읍(邑), 구(區), 가(家) 등의 행정단위가 정립되었던 것이 되는데, 이때에 이르러 주(州)와 현(縣)의 제도를 재정비한 것이 된다.

여기서 국(國)은 군후국(君侯國)을 가리키는데 소국(小國)은 대략적으로 지름 100리(里) 이상의 나라가 될 것이고, 주(州)는 국토를 크게 나눈 지역단위가 되며, 원(原)은 그 크기가 주(州)보다는 적으며 지방장관인 욕살(褥薩)이 봉해지는 행정단위가 되고, 성(城)은 성곽을 가진 도시(都市)를 가리키고 지방장관인 욕살이 봉해지는 행정단위가 되며 경우에 따라 국(國)이 되기도 한다.

또, 현(縣)은 주(州)와 원(原)보다 적은 행정단위가 되고, 읍(邑)은 성곽이 없는 도시로서 대략 반지름이 10리(里) 정도에 걸치는 마을들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최소한 10가(家) 이상으로 이루어지며, 구(區)는 4가(家)로 이루어지고, 가(家)는 대략 20호(戶)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되며, 1호(戶)에는 대략 10명의 식구(食口)가 있는 것이 된다.

주(州)와 현(縣)을 정하고 분직(分職)의 제도를 세웠다는 것은 주와 현의 관리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의 범위 내에서만 권력을 행사하며 다른 직책을 겸하지 않고, 법과 규칙에 따라 다스리게 하였다는 것인데, 한배달조선의 삼사오가 제도 또한 권력분립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주와 현의 관리들이 정치를 잘하여 이에 백성들이 고향을 버리지 않고 정착하여 일하는 곳에서 스스로 편안함을 즐기어 거문고를 타며 노래부르는 소리가 온땅에 넘쳐 흘렀다는 것이 된다. 그야말로 태평시대이다.

[하은(夏殷)의 전쟁과 단군조선의 원조(援助), 하나라 멸망과 은나라 건국]

서기전1767년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왕 걸(桀)이 도움을 청하였으며, 흘달 천왕이 읍차(邑借) 말량(末亮)으로 하여금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전쟁일을 돕게 하니, 탕(湯)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명을 내려 돌아오게 하였는데, 걸(桀)이 그것을 어기고 병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 금지맹약(禁止盟約)을 깨려고 하였다. 결국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군(畎軍)을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관중(關中)의 빈기(邠岐)의 땅으로 진격하여 그곳에 머물며 관제(官制)를 설치하였다. 이때 번한(番韓) 소전(少佺)이 장군 치운(蚩雲)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게 하였다.

서기전1767년은 하(夏)나라가 멸망하기 1년전이 되는데, 이윤(伊尹)을 재상(宰相)으로 삼은 은(殷)나라의 탕(湯)이 군사를 일으켜 하나를 정벌하자 하나라 걸왕이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단군조선에서는 하나라에 가까운 지역에 있는 마을의 읍차인 말량(末亮)으로 파견하여 단군조선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전쟁을 돕게 하니, 탕(湯)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던 것이다.

은탕이 사죄하자 이에 흘달 천왕께서 명을 내려 말량에게 회군(回軍)하도록 하였던 것인데, 하나라 걸(桀)은 단군조선이 주선이 되어 맺은 단군조선과 하나라와 은나라 상호간에 맺었던 은 맹약을 어기고 병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서, 하지 말자고 하였던 금지맹약(禁止盟約)을 깨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에 단군조선은 결국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을 정벌하기로 작전을 짜서 몰래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군(畎軍)을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관중(關中)의 빈기(邠岐)의 땅으로 진격하여 그곳에 머물며 관제(官制)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견군(畎軍)은 견족(畎族)의 군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 견족은 삼위산(三危山)을 중심으로 하고, 백족(白族, 西夷)이 살던 서안(西安)에 걸쳐 활동하던 부족(部族)이 되며, 서기전3897년경 한웅천왕의 배달나라 개천시에는 삼위산으로 가서 천자격(天子格)의 가한(可汗)이 된 반고(盤固)가 다스렸고, 이후 배달조선의 견족으로서 9족의 하나에 속하며, 고대중국 기록에서는 견이(畎夷)로 불리고, 후대의 역사상에서는 터키의 선조가 되는 돌궐부족이 되는 것이다.

단군조선 진한(眞韓)에서 흘달 천왕이 군사를 내어 은나라를 돕게 할 때, 번한(番韓) 땅의 번한(番韓) 소전(少佺)도 장군 치운(蚩雲)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게 하였던 것이며, 은탕(殷湯)의 군사와 합공으로 하나라 걸왕의 군사를 남소(南巢)로 내 몰아 내고 멸망시킨 것이 된다.

[은탕(殷湯)의 즉위를 축하하다]

서기전1766년 을미년(乙未年)에 번한(番韓) 소전(少佺)이 묵태(墨胎)를 보내어 은탕의 즉위를 축하해 주도록 하였다.

묵태(墨胎)는 단군조선의 비왕(裨王)인 번한 소전의 명을 받아 은나라 탕왕의 즉위를 축하해 준 인물인데, 역사상 고죽국의 임금(君)이었다. 번한(番韓)은 단군조선의 서보(西堡)의 장(長)에 해당하는 비왕(裨王)으로서 천왕격(天王格)에 해당하고, 단군조선의 군(君)은 천군(天君)에 해당하여 제사장을 겸하는 지위에 있다. 즉 고죽국의 임금인 묵태는 천군(天君)으로서 천왕격이 되는 번한(番韓)의 아래 직위에 해당하고, 고죽국은 번한관경에 속하는 것이 된다.

한편,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의 임금인 군(君)은 천군(天君)으로서 천자(天子)보다 윗자리가 된다. 그리하여 묵태(墨胎)는 천군(天君)으로서 천왕격인 번한(番韓)의 명을 받아 천자(天子)인 은탕(殷湯)의 즉위를 축하한 것이다. 즉 이는 결국 단군조선이 은탕(殷湯)을 하(夏)나라를 이은 천자(天子)로 인정한 것이 된다. 반면에 서기전2224년에 세워진 하나라의 시조 우(禹)는 반역자로 낙인 찍혔던 것이며 천자로 즉위축하를 받지 못하였고 이후 약 30년간 단군조선의 사자였던 유호씨와 전쟁을 하다가 진중(陣中)에서 사망하였다.

고죽국은 도산회의(塗山會議)가 있었던 시기인 서기전2267년경에 봉해진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으로서 광의의 제후국(諸侯國)에 속하며, 지방의 일반 제후국이 볼 때는 천군국(天君國)이 되는데, 천자(天子)는 제사장의 권한이 없으나 천군(天君)은 천왕(天王)과 천제(天帝)와 더불어 제사장의 권한을 지닌다. 천자는 명을 받아 천제를 올릴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는 보고의식(報告儀式)으로서 봉선(封禪)을 행할 뿐이다.

고죽국의 수도는 고죽성(孤竹城) 또는 무체성(無棣城)이라고도 불리며, 지금의 북경 동남쪽에 위치하는 천진(天津) 부근이나 탁수(꟔水) 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이 된다. 고죽국의 수도인 무체성의 서북쪽이 되는 유수(濡水)의 상류지역에 단군조선의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였던 영지성(永支城)이 소재하였다.

고죽국의 서쪽에는 태항산(太行山) 넘어로 서기전1122년 이후에는 은나라 망명자인 기자(箕子)의 기후국(箕侯國)이 있었고, 고죽국의 남쪽에는 서기전1122년경 이후로 연(燕)나라가 위치하고, 고죽국의 동남쪽에는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청구국(靑邱國)과 남국(藍國)이 산동지역에 소재하였으며 서기전1122년경 이후에는 주(周)나라 제후국인 제(齊)나라가 산동지역의 일부에 위치하였던 것이 된다.

[천지화랑(天指花郞)-국자랑(國子郞)]

서기전1763년 무술년(戊戌年)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다. 미혼(未婚)의 자제(子弟)로 하여금 읽고, 활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天指花)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도 불렀다.

소도(蘇塗)는 국선(國仙)이 하늘에 제(祭)를 올리는 제천단(祭天壇)이 있는 신성지역(神聖地域)이다. 국선(國仙)은 나라에서 뽑은 선인(仙人) 즉 종(倧)으로서 국자랑(國子郞)의 스승(師) 즉 국자사부(國子師傅)가 된다. 솟대로 소도(蘇塗)임을 표시하였는데, 솟대의 “소“ 또는 ”솟“이 곧 소도(蘇塗)와 같은 소리를 나타내는 말이 된다. 즉 소도(蘇塗)는 ”소“ 또는 ”솟“과 같은 소리를 한자(漢字)로 나타낸 말이며, 솟대의 대는 긴 막대기를 가리키는 바, 결국 솟대는 ”소도(蘇塗)의 대”로서 소도임을 표시한 긴 나무막대가 된다.

솟대의 “소“는 소(巢)와 직결된다. 즉 소(巢)라는 글자가 원래 나무 꼭대기에 있는 새집처럼 만든 망루(望樓)라는 뜻을 가지는 바, 신성지역을 지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실재 역사상 소(巢)는 서기전 7197년 이전의 파미르고원에 있었던 마고성(麻姑城) 시대에 수찰(守察)을 하던 망루였는데, 고탑(高塔) 모양이 된다.

한편, 궁(穹)은 소(巢)와는 다른 형태의 제천단(祭天壇)으로서 계단식으로 넓게 쌓아올려 꼭대기에 제단(祭壇)을 만든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후대에는 소(巢)가 탑으로 변형되어 기도하는 장소가 되고, 궁(穹)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천단의 역할을 한 것이 된다. 지리산 노고단이나 마이산의 돌탑 등은 궁(穹)과 소(巢)가 어우러진 모양이 된다.

천지화(天指花)는 하늘을 가리키는 꽃이라는 말로서, 밝은 하늘 꽃인 한화(桓花)이자 하루하루 끝없이 피고지는 무궁화(無窮花)를 가리키는데, 제단(祭壇)의 꽃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도 무궁화를 샤론의 장미라고 하여 제단의 꽃임을 나타내고 있다. 국자랑들이 머리에 천지화 즉 무궁화를 꽂고 다녀 천지화랑이라 한 것이다. 국자랑(國子郞)은 나라에서 뽑은 미혼의 자제들이며, 주로 황실(皇室)이나 삼사오가(三師五加)를 비롯한 지도층의 자제들이 될 것이다.

한편, 지방 고을에서 선출된 선랑(仙郞) 중 제천(祭天)을 담당하고 계율(戒律)을 맡은 책임자를 전(佺)이라고 하며, 나라 전체에서 선출 즉 나라의 부르을 받으면 종(倧)이 되어 국자랑(천지화랑, 國仙花郞)들의 스승이 되는데 통상 선인(仙人)이라 부르는 것이다.

고구려시대에는 선인도랑(仙人徒郞) 중 제천의식과 계율을 담당한 자를 참전(參佺)이라 하고, 무예를 관장한 자를 조의(皁衣 : 검은 옷)라 불렀는데, 조의는 오늘날 흑띠(黑帶)를 매는 자로서 무예사범(武術師範)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오성취루(五星聚婁)와 황학(黃鶴)]

서기전1733년 무진년(戊辰年)에 오성(五星)이 누성(婁星)에 모여들고 누런 학(鶴)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오성(五星)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오행성(五行星)을 가리키는데, 누성(婁星)에 모여들었다라는 것은 이들 오행성이 누성 부근에 모여들었다는 것이 된다. 누성(婁星)은 28수(宿) 중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별이 된다. 오성취루 현상은 천문현상인데, 이러한 현상은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되어 과학적으로 계산하게 된다면 연대기적으로 충분히 의미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한편, 오성취루를 단순히 오행성(五行星)이 함께 모이는 현상이라 풀이하기도 한다.

황학(黃鶴)이 궁궐 뜰에 있는 소나무에 날아와 살았다는 것은 비유적인 기록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실기록이 된다.

[유위자(有爲子) 선인(仙人)이 돌아가시다]

서기전1727년 갑술년(甲戌年) 9월에 유위자(有爲子) 선인(仙人)이 돌아가셨다. 흘달 천왕께서 이를 슬퍼하며 통곡하고 국장(國葬)으로 장사를 치렀다.

유위자 선인은 자부선인의 학문을 계승한 분으로 서기전1950년경 이전에 출생하여 서기전1727년에 돌아가시니 최소한 230세 이상 사신 것이 된다. 단군왕검 천제께서는 130세를 사셨고, 부루 천왕께서는 약158세를 사셨으며, 단군왕검을 보필한 유호씨(有戶氏)는 120세를 산 순임금의 아버지로서 단군왕검보다 약100세가 많아 서기전2470년경 출생하였으며 서기전2195년경에 돌아가시니 약270세 이상을 산 것이 된다. 유호씨와 유위자 선인은 특별한 도인(道人)임에 틀림없는 것이 된다. 한편, 서기23년생인 김수로왕은 서기199년에 돌아가시어 177세를 살았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흘달 천왕 붕어와 사면]

서기전1722년 기묘년(己卯年)에 흘달 천왕께서 붕하시니 백성들 모두 먹지 않았으며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생명체를 죽이는 것을 금하고 놓아주도록 하였고, 해를 넘겨 장사를 지냈다. 우가(牛加) 고불(古弗)이 즉위하였다.

흘달 천왕이 성스런 임금이었다는 것이 나타나는데, 부모가 돌아가신 듯 백성들이 모두 먹지도 않고 슬퍼하였다는 것이며, 이에 죄수들을 사면하고 살생(殺生)을 금하여 방생(放生)토록 하였던 것이고, 이듬해에 장사를 치렀다는 것이다.

이어 즉위한 고불 천왕은 우가(牛加)였다라고 하므로 아마도 태자(太子)가 아닌 제왕(帝王)의 재목(材木)으로서 차자(次子)나 삼자(三子) 등 다른 아들이 될 것이다. 다만, 태자가 우가(牛加)의 직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조선(朝鮮) 제14대 고불(古弗) 천왕(天王)의 역사 -

[기우제(祈雨祭)]

서기전1716년 을유년(乙酉年)에 큰 가뭄이 들어 천왕께서 하늘에 기도하여 비오기를 빌며, 하늘에 맹서하여 고하되, “하늘이 비록 크다 하나 백성이 없이 어찌 베풀 것이며, 비가 비록 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이 어찌 귀하다 하리오!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으로 여기는 것이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한몸일진대 하늘이 어찌 백성을 버리시리오? 이에 비는 곡식을 번성하게 하고 때 맞추어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말이 끝나자마자 큰 비가 수천리에 장대같이 내렸다.

이 큰가뭄 이전에 단군조선 전기에 있었던 땅이나 곡식과 관계된 천재지변으로는, 서기전2284년의 대홍수와, 서기전2098년에 있었던 황충(蝗蟲) 사건이 있는데, 아마도 기우제(祈雨祭) 관련 기록으로는 처음이 된다. 대홍수는 치수를 잘하여 마무리 하였고, 황충의 소란은 천왕이 삼신(三神 하늘님께 기도하여 물러가게 하였던 것이다.

비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며, 곡식은 비가 내려야 번성하게 되고, 사람은 하늘이 내어 한몸이나 마찬가지여서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 존재이며, 사람은 먹는 곡식이 생명줄과 같아서 낳아 준 하늘이나 마찬가지인 바, 어찌 하늘이 사람인 백성을 버릴 것이며, 하늘이 내리는 비가 어찌 곡식을 버릴 것인가! 비가 내리면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곡식이 번성하고 이에 백성들은 먹는 것에 대하여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다.

천재지변(天災地變)은 후대에는 임금의 부덕(不德)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는데, 기우제에 대한 기록은 수 없이 나타난다.

[자모전(子母錢) 주조(鑄造)]

서기전1680년 신유년(辛酉年)에 자모전(子母錢)을 만들었다.

자모전(子母錢)은 글자대로 보면 자전(子錢)과 모전(母錢)을 함께 부른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자음(子音)과 모음(母音)의 글자가 새겨진 주조전(鑄造錢)이라고도 할 수도 있는데, 역사상으로 볼 때는 서기전2181년에 가림토 38자라는 표음문자가 정립되었던 것으로 자음과 모음을 새긴 화폐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자모전은 주조(鑄造)된 화폐이다. 이 자모전 이전의 주조된 화폐로는 서기전2133년에 발행된 원공패전(圓孔貝錢)이 있는데, 화폐상에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는 자모전의 자모가 자음과 모음을 가리킨다면 서기전1680년에 주조발행된 자모전(子母錢)이 되는 것이며, 후대의 소위 명도전(明刀錢)이라는 화폐는 자모전의 후신이 되는 것이다. 명도전 이전의 단군조선 화폐로 소위 첨수도(尖首刀)도 있는데, 첨수도에 새겨진 글자는 명도전의 글자보다는 상형문자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자음(子音)과 모음(母音)으로 분리와 조합이 가능하여 표음문자식으로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되어 자모전이라고 함에는 큰 난점이 없다.

소위 명도전(明刀錢)은 통상 서기전500년경 이전에 주조된 화폐가 되는데, 대체적으로 주(周)나라 초기나 춘추(春秋)시대 이전부터 주조된 것이 되며, 명도전(明刀錢)으로서 최초로 주조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 되는 은(殷)나라 중기가 되는 서기전1500년경이 될 것이다.

소위 첨수도(尖首刀)는 명도전(明刀錢) 이전에 주조된 화폐가 되고, 화폐상에 새겨진 문자의 형태로 보아 소위 명도전은 이 첨수도의 후신(後身)이 되는 바, 서기전1680년에 주조된 자모전(子母錢)은 이 첨수도(尖首刀)가 시초가 되어 차츰 명도전(明刀錢)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첨수도에 새겨진 글자는 거의 모두 자음과 모음이 조합되어 상형문자식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되는데, 명도전에 이어지면서 그 글자의 형태가 상형문자식, 상형-표음문자식, 표음-상형문자식, 표음문자식 등 4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상형문자식 명도전의 글자는 첨수도에 새겨진 상형문자와 유사하거나 조금 더 부드러운 곡선 등으로 나타나며, 자음과 모음의 분리를 한층 더 쉽게 할 수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첨수도에 비하여 가림토 글자를 새긴 화폐라고 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상형-표음문자식 명도전의 글자는 전제적으로는 상형문자이면서 상형문자의 틀에서 조금 더 벗어나 자음과 모음의 분리가 훨씬 더 쉬워 가림토 글자로 해독이 가능함으로써, 표음문자로 읽을 수 있는 글자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된다.

표음-상형문자식 명도전의 글자는 가림토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상형에 맞춤으로써 전체적으로는 상형문자로 보이나, 자음과 모음이 분리되어 있어 순수한 표음문자로 읽히는 경우가 된다.

표음문자식 명도전의 글자는 순수한 가림토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차례로 새긴 것으로 상형문자와는 거의 관계가 없이 자음과 모음으로 읽히는 글자가 되어, 지금의 한글과 유사한 체계로 자음과 모음이 배치된 경우가 된다.

이상의 명도전에 새겨진 문자의 형태가 되는 네가지 유형은, 첨수도에서 명도전으로 다시 후대에 발행된 명도전으로 이어지면서 글자의 모습이 상형문자 형태에서 표음문자 형태로 변한 것을 대별한 것인데, 이는 문자 발전단계와도 일치하게 된다.

서기전1680년에 가림토38자가 정립된 이후 훨씬 후대까지도 배달나라 시대에 사용되던 가림토의 전신이 되는 글자들을 첨수도나 명도전에 계속 새긴 것이 되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가림토 38자를 중심으로 하여 주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위 명도전의 출토지역이 되는 북경 부근에서 발해만 유역과 요동반도 및 한반도 북부지역과 만주지역은 단군조선의 삼한(三韓) 영역에 속하며, 단군조선 땅에서도 경제적인 활동이 왕성하던 곳이 된다.

첨수도와 명도전은 주조화폐로서 수급에 따라 지속적으로 주조한 것이 되는 데, 그리하여 똑 같은 글자가 새겨진 화폐가 많이 주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된다. 특히 소위 명도전에는 같은 글자가 새겨진 경우가 허다하다고 보면 된다. 이는 주조형틀을 이용하여 계속하여 주조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엽전(葉錢)의 시초는 서기전1426년에 주조된 패엽전(貝葉錢)이 되며, 원공패전과, 자모전이라 할 수 있는 첨수도 및 명도전과, 패엽전은 모두 청동화폐(靑銅貨幣)가 된다. 서기전645년에 주조된 방공전(方孔錢)은 철전(鐵錢)이 된다.

철전은 청동전보다 산화(酸化)가 잘 되어 부서지기 쉬워서 사용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것이 되는데, 철전이 주조되던 시기에도 명도전인 청동화폐가 지속적으로 주조되어 사용되고 유통된 것으로 된다.

[오색 큰닭(五色大鷄) 출현]

서기전1680년 9월에 마른 나무에 싹이 나고 오색(五色)의 큰 닭이 성(城)의 동쪽 자촌(子村)에서 깨어나오니, 이를 본 사람들이 잘못 알고 봉(鳳)이라 하였다.

마른 나무에 싹이 나오고 오색의 큰 닭이 출현한 것으로 보아 보통일은 아닌 듯 하다. 경우에 따라 이적(異蹟)이 일어나는 것은 다 연유가 있는 법인데, 그 원인을 잘 알지 못하면 기적(奇蹟)처럼 여겨지는 것이 된다.

봉황(鳳凰)은 글자의 모양에서처럼 날개가 긴 새가 되며, 날개가 큰 닭이나 공작(孔雀)이 봉황새의 별칭으로 불려질 수 있기도 하다. 한편, 고구려의 상징새가 되는 삼족오(三足烏)는 발이 셋인 검은 새인데, 그림을 보면 실제로는 머리에 벼슬(官)이 있어 검은 봉황이 된다. 닭도 머리에 벼슬이 있어 봉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특이한 닭은 때때로 봉황에 버금가는 새로 간주되는 것이다.

김씨(金氏)의 시조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는 서기전2600년경 인물인데, 황제헌원(黃帝軒轅)의 친 아들이 아니면서 황제헌원의 뒤를 이어 웅국(熊國)의 천자(天子)가 되었으며, 벼슬이름을 모두 새이름으로 하였고 그 중에 봉황을 총리(總理)로 정하였던 것인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봉황이 용(龍)과 더불어 왕(王)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가야와 신라 시대를 거치면서 대한민국에 이르러 대통령의 문장(紋章)으로 봉황새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 된다.

봉황은 불사조(不死鳥)인 바, 소위 사신도(四神圖)에서 남쪽의 주작(朱雀, 朱鵲)이 붉은 봉황이 되는 것이며, 삼족오(三足烏)는 검은 봉황으로서 태양신(太陽神)을 상징하는 새이며 또한 불사조가 된다. 태양의 밝은 빛을 내도록 하는 주체가 곧 태양신으로서 검은 봉황인 삼족오로 나타난 것이며 태양의 흑점과도 직결된다. 즉 검은 숯이 탈 때 불꽃은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그 본체는 검은 숯임을 알고 있는 것으로, 태양도 또한 마찬가지라 본 것이 된다. 겉은 허울, 형체(形體)이며 속이 얼, 본체(本體)가 되는 것이다.

[인구조사 - 1억 8천만]

서기전1666년 을해년(乙亥年)에 관리를 사방으로 내 보내어 호구(戶口)를 조사하게 하니 총 1억 8,000만명이었다.

서기전1666년이면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시작된지 약700년이 되는 해가 되는데, 총인구수가 1억8,000만명이라는 것은 단군조선의 영역에 속하는 모든 지역의 사람들을 계산한 것이 된다.

단군조선은 배달나라를 정통계승한 나라이므로 당연히 배달나라의 영역에 포함되는 사람들이 모두 포함될 수 있으며, 이 당시 고대중국은 은(殷)나라 초기이며 특히 은(殷)나라는 단군조선의 군사적 후원으로 건국된 나라로서 제후국이 되는 천자국(天子國)에 해당되어 당연히 총인구수에 포함된 것으로 된다.

실제로 당시 은나라의 크기는 현 중국대륙의 1/1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은나라 주위에는 곧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존재하였던 것이고, 은나라는 일개 제후국인 천자국에 해당할 뿐이었던 것이다.

단군조선은 대제국(大帝國)으로서 대국(大國)으로서 마한과 번한을 거느리고 소국으로는 20여개국을 넘어서며, 그 외 조공하는 나라를 포함하면 70여개국이 넘는 등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렸던 것이다. 단군조선은 배달나라의 정통성을 이었고 배달나라는 한국(桓國)의 정통성을 이었던 것이므로, 단군조선 영역은 한국(桓國)의 영역을 전부 포함하는 것이 되는데, 그리하여 파미르고원 동쪽으로 남북에 걸쳐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인구수를 포함한 것이 될 것이다.

단군조선에서 특히 봉한 제후국이 아닌 배달나라의 제후국이나 한국(桓國) 시대의 12한국에 해당하는 나라들은 한국(桓國)과 배달나라의 정통성을 가진 단군조선에 조공(朝貢)을 하는 나라로서 제후국으로 간주되었다고 보면, 파미르고원 동쪽으로 인구수가 서기전1666년에 1억 8,000만이었다는 기록은 과장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이 된다.

서기전7197년경부터 존속한 12한국(桓國) 중에서 수밀이국(須密爾國),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일군국(一群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우루국(虞婁國), 선비국(鮮卑國) 등은 단군조선 시대까지도 존속하였으며, 고구려 광개토태황(廣開土太皇) 시대까지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객현한국(客賢汗國), 매구여국(賣句餘國) 등이 존속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국(桓國)의 중심지가 되는 한인씨(桓因氏)의 나라는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땅이 되며, 진한의 북쪽과 서북쪽과 서쪽에 산재한 12한국들은 한국에서 배달나라, 배달나라에서 단군조선으로 계승될 때에도 망하지 않은 채 구족(九族)에 속한 나라로서 정통계승국인 배달나라와 단군조선을 섬기며 조공(朝貢)을 바쳤던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 수밀이국, 비리국, 양운국, 일군국, 구다천국 등이 조공(朝貢)을 바치기도 하였고, 우루국의 망명자들이 단군조선에 들어와 살았다라고 기록되고 있으며, 선비국(鮮卑國)의 남쪽에는 남선비(南鮮卑)를 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조선(朝鮮) 제15대 대음(代音, 후흘달後屹達) 천왕(天王)의 역사 -

제13대 천왕인 흘달(屹達)을 대음달(代音達)이라고도 하며, 제15대 대음(代音)을 후흘달(後屹達)이라고도 한다. 즉 제13대와 제15대 천왕이 흘달(屹達)로서 대음달(代音達)이 되는데, 흘달의 흘(屹)은 “클(大)”을 나타낸 글자가 되고, 대음(代音)은 대음(大音)으로서 “큼(大)”을 나타낸 글자가 되는 것이다.

[은(殷)나라 소갑(小甲)이 화친을 구하다]

서기전1661년 경진년(庚辰年)에 은(殷)나라 왕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和親)을 구하였다.

은나라 왕 소갑(小甲)은 서기전1666년부터 서기전1650년까지 17년을 재위한 제7대 왕이다. 서기전1661년에 소갑이 화친을 청하였다는 것에서 이 이전에 소갑이 군사를 움직여 단군조선의 영역을 침범하다 패퇴당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기전1766년에 건국된 은(殷)나라는 단군조선의 군사적 원조로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되어 단군조선의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출발하였으나, 이후 하(夏)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진정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펼치지 못하고,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주변국과의 전쟁을 일삼게 되었다.

실제로 은나라 시조 탕도 왕이 된 후 곧바로 주변의 세력인 이족(夷族)을 정벌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생존을 넘어서서 영토확장을 꾀하는 전쟁을 수시로 벌였던 것이 된다.

즉, 은나라도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에 속한 천자국이 아닌 멀리 떨어진 지방 즉 천하(天下)의 천자국으로서 주변의 단군조선 제후국들과 생존과 정벌을 위한 전쟁을 벌인 것이며, 심지어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의 서쪽 변경을 침범하는 사례도 종종 발생한 것이 된다.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은나라의 침범행위는 서기전1291년경에 은나라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정벌하고 색도(索度)와 영지(永支)를 침공한 것을 들 수 있다. 무정은 서기전1325년부터 서기전1267년까지 59년 동안 재위한 은나라의 제22대 왕이다.

귀방(鬼方)은 서남방(西南方)이 되는데, 이는 단군조선에서 볼 때의 서남방이며 은나라로 볼 때는 북방(北方)이 되고, 영지(永支)는 단군조선 번한 지역에 있던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로서 지금의 천진(天津) 서북쪽이자 옛날의 유수(濡水)가 되는 지금의 탁수(涿水) 상류지역에 위치하였다.

한편,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도 귀방(鬼方)이라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신방(神方)이 되는 북방(北方)을 낮춘 것이 되는데, 보통은 서남방이 되는 것이다.

색도는 영지 부근이며, 곧 귀방은 색도와 영지의 서방으로서 은나라의 북방이 되고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서남방이 되어 지금의 태원(太原) 북쪽으로서 태항산(太行山) 서쪽 지역이 되는 것이다. 서기전1122년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서자 은나라 왕족 기자가 패잔병 5,000명을 이끌고 정착한 곳이 지금의 태원 북쪽이 되는 서화(西華)라고 불린 땅으로서 고죽국(孤竹國)의 서쪽이자 단군조선의 귀방(鬼方)에 속한 지역이 되는 것이다.

[80분의 1 세율의 조세법]

서기전1661년에 80분의 1의 세제(稅制)로 고쳤다.

단군조선의 세법은 백성들을 위한 세율로 시행하였다. 즉 정전법(井田法)에 따라 9분의 1 즉 약11%의 세율로 세금을 내다가 약 300년이 흐른 서기전1993년에 20분의 1 즉 5% 세율의 세법을 시행하였으며, 다시 300년이 흐른 서기전1661년에 이르러 80분의 1 즉 1.25%의 세율의 세법을 시행한 것이 된다.

현재 부가가치세가 10분의 1 세율이 적용되고 있으며 소득세가 약10%에서 35%에 이르는 것을 고려하면, 80분의 1 세율은 백성들의 생활을 위주로 한 파격적인 세법이 된다.

[홍수(洪水)와 구휼(救恤)]

서기전1660년 신사년(辛巳年)에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民家)에 피해가 많았다. 천왕께서 매우 불쌍히 여기고 구휼하여 곡식을 창해사수(蒼海蛇水)의 땅으로 옮기어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 당시 이미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 이상의 무상(無償)으로 한 구휼법(救恤法)이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서기전6200년경 이전에 정립된 것이 되는 한배달조선의 3대경전의 하나인 참전계경(參佺戒經)에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은 무극(無極)의 원리에 따라 순환(循環)함을 가르치고 있는 바, 이러한 재해를 대비하고 구휼하는 제도를 이미 정립해 둔 것이 된다.

창해사수(蒼海蛇水)의 땅이 어디인지는 불명이나, 창해(蒼海)는 산동지역의 동쪽이나 북쪽 바다가 되어 지금의 발해만이 되며 사수(蛇水)는 강이름으로서 산동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대홍수는 산동지역의 서남방 쪽에서 발생한 것이 되고 곡식을 산동지역의 북쪽 발해만 가까이에 있는 사수(蛇水) 지역으로 옮긴 것이 된다.

[양운국(養雲國)과 수밀이국(須密爾國)의 조공(朝貢)]

서기전1660년 겨울 10월에 양운국(養雲國)과 수밀이국(須密爾國)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양운국과 수밀이국은 서기전3897년 이전에 있었던 한국(桓國)의 12분국(分國)에 속하는 나라로서 배달나라 시대를 거쳐 단군조선 시대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

양운국은 지금의 바이칼호 서쪽지역에 위치한 나라가 되고, 수밀이국은 송화강 북쪽과 지금의 아무르강이 되는 흑룡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나라로서, 각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북쪽이 되는 시베리아 지역에 있던 나라이다. 수밀이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숙신국의 북쪽에 위치하며, 양운국은 지금의 몽골의 북쪽에 위치한 나라가 된다. 수밀이국과 양운국 사이에 비리국(卑離國)이 위치하는데 지금의 러시아 브리야트 공화국 지역과 관련이 있는 것이 된다.

서기전7197년에 시작된 한국(桓國)의 분국이 되는 12한국(桓國)은 대부분 황하북쪽에 위치하였으며, 한국(桓國)의 중심지는 단군왕검이 수도를 정한 송화강 아사달을 중앙으로 둔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 땅이 된다.

[금(金)과 쇠(鐵)와 원유(原油)를 캐다]

서기전1652년 기축년(己丑年)에 천왕께서 서쪽으로 약수(弱水)에 행차하고 신지(臣智) 우속(禹粟)에게 금철(金鐵)과 고유(膏油)를 채취(採取)하도록 하였다.

약수(弱水)는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땅으로 볼 때 서쪽에 위치하는데, 서기전2177년에 열양(列陽) 욕살(褥薩) 색정(索靖)이 약수(弱水)에 종신금치(終身禁置) 당하였다가 뒤에 사면받아 봉해져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되는 바, 이 약수가 곧 여기서 말하는 약수라는 강이 틀림없는 것이 된다. 즉 지금의 오르도스 지역에서 황하의 북단(北端) 지역과 남류(南流) 시작 지역에 있는 황하의 지류가 되는 강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신지(臣智)는 신지(神誌)와 소리가 같아 동일 관직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문자(文字) 및 명령(命令)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우속(禹粟)은 인명(人名)이 된다.

금철(金鐵)의 금(金)은 쇠로서 황금(黃金)이며, 철(鐵)은 무기나 농기구 등을 만드는 재료인 일반적인 쇠(釗)를 가리키게 된다. 원래 철(鐵)이란 글자의 옛 글자는 銕(철)인데 이족(夷族)의 쇠라는 뜻으로서, 동이족이 발명하여 주조(鑄造)한 쇠라는 의미가 된다.

고유(膏油)는 찐득찐득한 기름을 가리키는데 원유(原油)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즉 이때 이미 천연(天然)의 석유(石油)를 채취하여 연료로 사용하였다는 것이 된다. 아마도 약수(弱水) 지역은 예전에 동물이 번성하였던 곳이거나 물고기가 많이 살았던 바다였다는 것이 된다.

한편, 나무가 울창하던 지역에서는 석탄(石炭) 종류가 나게 되는데, 석탄은 나무가 썩으면서 탄소화(炭素化) 한 것인데, 원래부터 식물이 자라던 육지였음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우루(虞婁) 사람 20가(家) 투항]

서기전1652년 가을 7월에 우루(虞婁) 사람 20가(家)가 와서 투항하였는데, 천왕께서 염수(鹽水) 부근지역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우루(虞婁)는 서기전3897년 이전의 한국(桓國) 시대부터 존속하였던 12한국(桓國) 중의 하나인 우루국(虞婁國)을 가리키는데, 이때 투항한 우루 사람들은 이 우루국의 후예(後裔)가 되는 것인데, 우루(虞婁)는 지역적으로 보아 파미르고원의 서쪽에 있었던 소위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되는 옛 수메르 지역의 우르(크)로 추정된다.

서기전2220년경 유호씨(有戶氏)가 무리를 이끌고 가르침을 펴러 서방(西方)으로 갔던 월식주(月息洲)가 높은 층대가 되는 지구랏을 많이 만들었던 수메르 지역이 되는 것이며, 이 수메르 땅에 있던 우르(UR)라는 나라의 사람들이 서기전2000년경에 이르러 바빌론에게 망하면서 수메르 땅을 벗어나 사방으로 흩어져 살다가 이때에 이르러 동쪽으로 이동해 와 단군조선에 투항한 것이 되는 셈이다.

역사적으로는 서기전2348년경에 소위 노아홍수가 수메르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것이며, 이후 서기전2000년경에 바빌론의 함무라비왕이 정복하면서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는 아브라함이 서기전1950년경에 가족을 이끌고 갈데아 우르(UR)를 탈출하여 서쪽의 가나안 땅으로 갔으며, 이후 이삭과 야곱의 시대를 거쳐 12지파로 불어났고, 약 300년이 지난 서기전1652년에 이르러 야곱의 후손 중 일파가 20가(家)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단군조선 땅의 염수(鹽水)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20가(家)는 사람의 수로 보면 단순히 20명(名, 口)이 아니라 약 4,000명 정도가 된다. 가(家)는 한 집안을 가리키며 보통 4대(代)가 1가(家)를 이룬다고 볼 때, 1대(代) 약 30년에 10명 정도의 자녀를 둔다면, 2대째에는 약 10명이 되고, 3대째에는 약 100명이 되며, 4대째에는 최소한 100명이 넘게 되는데, 모두 합하면 최소한 약200명이 넘는 것이 된다. 여기서 20가(家)이면 최소한 4,000명이 되는 것이다.

4,000명이면 대이동이 된다. 최소한 20개의 마을(里) 합친 것이 되는 큰 읍(邑) 하나가 움직이는 것이 된다. 아브라함의 시대는 서기전1950년경이 되고, 이삭의 시대는 서기전1900년경이 되며, 야곱의 시대는 늦어도 서기전1800년경이 되는데, 이때부터 서기전1652년까지는 약150년이 지난 것이 되며, 이에 야곱의 아들 중 한 사람으로부터 불어난 후손은 약4~5대를 지난 기간이 되어 20가(家)가 충분히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적고 있는 우루 사람 20가(家)는 역사적으로 수메르 지역의 우르국 출신이 되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가리킬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 된다.

12한국(桓國) 중에서 일군국(一群國)은 수밀이국에서 거리로 따지면 서쪽 또는 서북쪽으로 5만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가 되는데, 지금의 송화강에서 서북방으로 5만리 즉 2만킬로미터가 되는 지역을 찾아보면 영국에 가까운 북유럽 지역이 된다. 일군국은 아마도 영국의 스톤헨지 유적과 관련된 나라가 아닌가 한다.

12한국 중에서 우루국은 위치가 불명한데, 앞에서와 같이 서기전1652년의 기사를 보면 아마도 서방에 있었던 수메르지역의 우르일 가능성이 농후하며, 또 사납아국(斯納阿國)도 위치가 불명한데, 아마도 인도지역에 있었던 나라가 아닌가 추정된다.

파미르고원의 동북지역과 동쪽 지역으로 이동한 황궁씨족(黃穹氏族)과 청궁씨족(靑穹氏族) 외의 백소씨족(白巢氏族)과 흑소씨족(黑巢氏族)은 각 수메르지역과 유럽지역, 인도지역으로 이동한 것이 되는데, 12한국 중에서 소재가 불명한 우루국(虞婁國)과 사납아국(斯納阿國)은 수메르 지역과 인도지역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태백산(太白山)에 공적비(功績碑)를 세우다]

서기전1634년 정미년(丁未年)에 천왕께서 태백산에 올라 비석을 세워 열성조(列聖祖)와 여러 한(汗)들의 공적을 새겼다.

단군조선 시대의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킨다. 물론 태백산이라 불리는 산이 단군조선의 영역 안에 많이 있었다고 보이는데, 단군조선의 역사기록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태백산은 백두산이 되는 것이다.

백두산을 태백산이라 한 기록은 대진국(大震國:발해) 제3대 문황제(文皇帝)의 삼일신고봉장기(三一神誥奉藏記)에 보이고, 신라시대 인물인 박제상(朴堤上)이 지은 부도지(符都誌)에서 강원도 태백산을 서기400년경에 남태백산(南太白山)이라 부르고 있어 백두산이 원 태백산이 됨을 알 수 있게 한다.

열성조(列聖祖)는 역대 단군을 가리킨다. 한(汗)은 단군조선의 군후(君侯)를 가리키는데, 단군조선 중앙조정을 천(天)이라 하면 단군(檀君)은 천왕(天王)이 되고 그 아래 천군(天君)이 있으며, 천군 아래 일반 제후가 되는 하늘나라의 공작인 천공(天公), 후작(侯爵)인 천후(天侯), 백작(伯爵)인 천백(天伯), 자작(子爵)인 천자(天子), 남작(男爵)인 천남(天男) 등이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여러 군후국(君侯國) 중에서 구려국(句麗國), 진번국(眞番國), 부여국(扶餘國), 청구국(靑邱國), 남국(藍國), 고죽국(孤竹國), 몽고리(蒙古里), 낙랑국(樂浪國) 등은 군국(君國)에 해당하고, 숙신(肅愼), 개마(蓋馬), 예(濊), 옥저(沃沮), 졸본(卒本), 비류(沸流) 등은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일반 제후국(諸侯國)에 해당하며, 남선비(南鮮卑)는 대인(大人)의 나라에 해당한다.

비석을 세운 예는 제12대 아한(阿漢) 천왕께서 요하(遼河)의 동쪽인 번한(番韓) 땅에 서기전1833년에 세운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가 있으며, 제30대 내휴(奈休) 천왕께서 청구국(靑邱國)을 둘러보고 배달나라 제14대 한웅(桓雄)인 치우천왕(蚩尤天王)의 공덕을 새긴 역사가 있다.

[대심(代心)을 남선비(南鮮卑) 대인(大人)에 봉하다]

서기전1622년 기미년(己未年)에 천왕의 아우 대심(代心)을 남선비(南鮮卑)의 대인(大人)으로 삼았다.

남선비(南鮮卑)는 선비(鮮卑) 땅의 남쪽 지역이 되는데, 선비국(鮮卑國)은 서기전3897년 이전의 한국(桓國) 시대에 12한국의 하나로서 줄곧 존속해 온 나라이며, 배달나라와 단군조선을 거치면서 반역하지 아니하고 정통성을 인정하며 9족에 속한 나라로서 배달조선에 복속한 나라가 된다.

선비국은 몽골의 남쪽 지역이자 구려국의 서쪽에 위치하며 흉노의 북쪽이자 견족(畎族)의 활동지역의 동쪽에 위치한다. 즉 선비(鮮卑)의 동쪽에 단군조선 진한(眞韓) 관경에 속하는 구려국(句麗國)이 위치하였는데, 구려국의 구려라는 말이 가운데, 중앙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려국은 서쪽의 삼위산(三危山) 지역에서 동해(東海)에 걸친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보아 동서(東西)의 중앙에 해당하는 나라가 된다.

대인(大人)은 일반제후 아래의 직책이 되는데 대부(大夫)라는 직에 해당한다고 보며, 대부(大夫)는 공후백자남의 제후보다는 아래이고 지방장관보다는 윗 자리가 된다. 서기전3897년 이전의 한국시대에 지위리 한인(桓因)의 아들 한웅(桓雄)이 서자부(庶子部) 대인(大人)의 직을 수행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천왕(天王)이 되는 제(帝) 아래 천왕격(天王格)이 되는 한(韓)을 두어 비왕(裨王)이라 하였으며, 한(韓)의 아래에 일반 제후국인 국(國)의 왕(王)인 군후(君侯)가 있는데 이 군후를 통칭 한(汗)이라 하였고, 한(汗)의 아래에 대인(大人)이 있으며, 대인의 아래에 원(原)이나 성(城)에 봉해진 지방장관격인 욕살(褥薩)이 있는 것이다. 일반 성(城)의 욕살(褥薩)이 승진되어 한(汗)으로 봉해진 경우도 있다.

한(汗)은 일반적으로는 왕(王)이라 해석하지만, 독자적인 왕국(王國)의 왕(王)이 아니라 제후에 해당하므로 원칙적으로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지 아니한다. 즉, 왕은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지만, 한(汗)은 제후로서 명을 받아 군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비왕(裨王)인 한(韓)도 넓은 의미로 한(汗)이 되며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지 아니한다.

한편, 단군조선의 말기가 되는 서기전425년부터는 단군조선 삼한(三韓)의 관경(管境)이 각 삼조선(三朝鮮)이라는 나라가 됨으로써, 진조선(眞朝鮮)의 임금(단군)은 천왕(天王)이 되고, 번조선(番朝鮮)과 마조선(馬朝鮮)의 임금(韓)은 각 왕(王)이라 부르게 되어 번조선왕(番朝鮮王), 마조선왕(馬朝鮮王)이라 하게 되어 독자적인 군사권을 행사하게 된다. 다만, 서기전323년에 읍차(邑借)로서 번조선왕이 된 기후(箕詡)는 먼저 번조선왕이라 칭하고 사후에 단군 천왕의 윤허(允許)를 밟는 절차를 취하였다고 기록된다.

[은(殷)나라 왕 태무(太武)가 번한에 조공하다]

서기전1614년 정묘년(丁卯年)에 번한(番韓) 진단(震丹)이 즉위하고 은(殷)나라 왕 태무(太武)가 번한(番韓)에 방물(方物)을 바쳤다.

진단(震丹)은 번한(番韓)의 제20대 임금으로 서기전1614년부터 서기전1579년 사이에 재위하였으며, 은나라 왕인 태무는 제9대 왕으로 서기전1638년부터 서기전1563년 사이에 재위하였다.

은(殷)나라가 번한(番韓)에 조공(朝貢)을 하였는데, 은(殷)나라의 왕은 천왕격(天王格)에 해당하는 번한보다 아래이며 천군(天君)보다 아래인 천국(天國)의 자작(子爵)으로서, 천국(天國) 즉 천상(天上)의 나라인 단군조선의 지방(地方) 즉 천하(天下)에 봉해진 천자(天子)인 것이다.

방물(方物)은 지방의 특산물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우가(牛加) 위나(尉那) 즉위]

서기전1611년 경오년(庚午年)에 천왕께서 붕하시니 우가(牛加) 위나가 즉위하였다.

위나(尉那)는 태자(太子)가 아닌 대음(代音) 천왕의 차자, 삼자 등 다른 아들로서 우가(牛加)의 직을 수행한 인물일 가능성이 농후한데, 다만, 태자로서 우가(牛加)의 직을 겸하였을 여지는 있다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