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온고지신(溫故知新)' 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온고지신'은 낯익지만 '법고창신'은 생소하다. '온고지신'은 『논어』「위정편」에 나오는 말로, "옛 것을 익혀서 오늘에 되살린다" 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법고창신’은 연암 박지원의 『연암집』 권1 「초정집서」에 나오는 것으로 그 뜻은 “옛 것을 법도로 삼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같은 뜻이지만 내포된 의미는 조금 다르다. ‘온고지신’은 중국식 표현이라면 ‘법고창신’은 우리식 표현이라고 해 두자. 우리 국학이 지향해야 할 바가 ‘법고창신’이 아닐까 한다.


요즈음 전통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정신문화도, 생활문화도, 전통적인 방식이 새로운 해법으로 제시되어 힐링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나가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전통이란 무엇인가를 새삼 묻고 싶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법고’와 ‘창신’은 서로 대립하지만, 각각의 의미도 긍정과 부정을 함께 갖고 있다. 지나친 ‘창신’은 지나친 ‘법고’ 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다. 항상 새롭다고 해서 그것만이 옳을 수 없고, 전통을 계승했다고 해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국학이 염두에 두어야 할 대명제가 아닌가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학에서 상고사 인식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대개 그렇듯이 한 개인의 가치관은 역사관에 투영되어 있기 마련이고, 그 역사관은 다시 한 개인의 인생을 결정한다. 한 국가의 운명도 마찬가지이다. 그 나라의 국학이 갖는 역사인식, 특히 우리가 우리다웠던 아름다운 시기가 상고시대이므로 상고사에 대한 역사인식이 앞으로 국학을 전개해 나갈 때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할 것이다.


한국사 연구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주류 사학계인 ‘강단사학’과 비주류 사학계인 ‘재야사학’의 대립이다. 그 동안 ‘주류’와 ‘비주류’ 간에 내부적으로 많은 충돌과 갈등이 있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연구의 혼란이 내재되어 있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으며, 뿌리 깊은 갈등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 우리 역사학계의 씁쓸한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현재 주류학계인 ‘강단사학’에서는 고조선을 연구할 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가치가 양립될 때는 흔히 상식선에서 따지면 될 일이다. 역사 연구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것이 오늘날 우리 강단사학의 현실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 상고사 연구를 중국 사서인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조선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조선전」은 고조선의 역사가 아니고 위만조선에 대한 역사이다. 그 내용도 위만조선이 어떻게 중국의 한나라에게 정복을 당하였는지를 서술한 것이다. 그것을 고조선이라고 착각한 것이고, 그 이후의 중국 사서들에서도 그러한 내용이 동일하게 채택되어 서술되게 된다. 즉『한서』,『후한서』,『삼국지』 등 각 「동이전」에서 그러한 내용으로 서술되었고, 역사서술의 아전인수 격인 ‘춘추필법’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자부심의 발로가 되었어야 했던 고조선이 피해망상증에 걸린 역사로 전락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서에는 고조선을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 것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 대표적으로 『삼국유사』가 있고, 그 외에도 이승휴의『제왕운기』, 이규보의『동국이상국집』 등 고조선이 역사적으로 실재한 국가이며,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도 역사적인 인물로 보고, 민족적, 국가적 자존감을 천명한 바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 사서를 활용하지 않고 중국사서만 활용하는 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렇듯 고려시대만 해도 역사서술 뿐만 아니라 정치ㆍ문화적으로 자주 국가임을 대외적으로 표방하였고, 요와 금과의 전쟁에서도, 원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유일하게 독립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자주성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교를 그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 이르면서 상황은 변하여 고려시대에 ‘단군’이 차지했던 위치를 ‘기자’가 차지하면서 자주성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두 번의 국가적 존폐 위기를 맞이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율곡 이이와 송시열 등에 의해 사대주의가 극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조선의 관료들 중 일부는 반성을 하고, 실추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단군’이 있었다. 그러한 변화를 주도했던 인물들은 대개 실학파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수산 이종휘 인데, 그의 저서 『동사』에서 최초로 「단군본기」를 채택하게 이르렀다. 수산 이종휘는 미수 허목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허목은 그의 저서 『동사』에서 「단군세기」를 저술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자주성을 찾는 과정에서 ‘단군’은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되었고, 이러한 실학파의 역사관은 대일항쟁기 때 민족주의 사학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로 대표되는 대종교에서 상고사 정신, 즉 고조선 정신으로 돌아가 영광스러운 과거를 되찾고, 자주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고 역설하였으며, 이것이 국민적 공감대 형성으로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건국정신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고, 결국에는 국권을 회복함에 따라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사를 그 내용별로 분류할 때 영광사, 수난사, 왜곡사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 세 가지는 상호 연관성이 강하다. 상고사, 즉 고조선 시대에 찬란했던 자주적인 역사가 있었지만 그 중심철학을 잃고 ‘단군’의 고조선 건국정신을 부정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수난사가 시작되었고, 그 수난사의 결과로 찬란했던 역사마저도 왜곡되거나 빼앗기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수난사와 왜곡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울 따름이다.


우리가 상고사를 말할 때는 대개 ‘단군’의 고조선사를 의미한다. 한국사에서 상고사로 구분하는 경계는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의 고조선 침략(연나라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아 고조선의 세력이 차츰 약화되어 요서지역에서 요동지역으로 이동하는 사건)이 이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고조선이 차츰 세력이 약화되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기자(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동예, 옥저 등 열국시대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고조선과 연나라 간의 전쟁이전을 상고시대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상고시대의 역사가 상고사인 것이다.


일본과 중국은 그들의 상고사를 연구하여 자신감을 회복하였고, 국가적인 힘의 원천으로 활용하였으며, 그들보다 뛰어났던 우리의 상고사를 철저하게 짓밟았고, 지금도 역사왜곡이나 동북공정 등으로 여전히 짓밟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우리다움을 되찾고, 지켜내려면 상고사인 고조선의 건국정신을 회복하여 오늘에 되살리고자 하는 국학을 살리는 것만이 살 길이다. 이것이 바로 국학에서 상고사가 갖는 의미이며 가치인 것이다.

 

 

기고=민성욱 국학박사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졸업

국학박사(논문 '한국사에서 말갈 인식에 관한 연구')

학교법인 한문화학원 법인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