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학에서는 처음에 기(氣)를 통하고 터득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축기(蓄氣)를 하고 운기(運氣)를 통해서 대맥 임독맥 대주천을 다 돌리고, 그 다음에 신공(神功)을 닦고, 그 위로 심공(心功)을 닦습니다. 이 공부를 하다보면 자연적으로 건강해지고 병이 낫습니다. 기를 터득하게 되면 우선 내 자율신경을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그런 능력이 다 있습니다. 그 방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기를 터득하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산으로 들어가도 스승을 만나기가 힘들었고 스승을 만나도 나무하기 3년, 밥 짓기 3년을 하고 그 다음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네 몸을 관찰해 보아라. 벽을 보고 있거나, 몸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느끼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해라.’ 하고 앉혀 놓습니다. 100일 동안을 화장실 가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계속 앉아 있게 합니다. 100일이 되면 스승이 와서 물어봅니다. ‘뭐 느끼는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계속해라.’ 그럼 또 계속 앉아 있어야 합니다. 못 할 일인 것입니다. 10명이 하면 9명은 결국 도망가버립니다. 기를 터득하고 나서야 제자로 받아줍니다. 시작이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나도 기를 터득하기 위해 무척 고생을 했습니다. 유명하다는 스님도 찾고, 도인도 찾아가보았으나 모두 똑같은 말만 했습니다. ‘스스로 터득해야 된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였습니다. 생활에만 만족할 수 없었던 나는 결혼을 하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일요일만 되면 어떤 기인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산을 헤맸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한 고서점에서 태극권이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선을 통해 내기를 터득하면 천하무적이 된다는 글을 읽고 온몸에 전류가 쫘악 흘렀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해 뜨는 시각이 제일 좋다는 새벽 4시에 산에 올랐습니다. 굉장히 추웠지만 10분 정도 앉아 있으니 마음이 안정되면서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습니다. 몸에서 열이 나면서 추운 겨울인데 땀을 흘렸습니다. 어떻게 터득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어떤 일도(一到)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정신을 집중하면 몸이 뜨거워질 수도 찰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3년 후, 기는 터득했지만 아직도 나는 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직장을 버리고 모악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모악산에서 21일 동안 자지도, 먹지도 않고 용맹 정진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를 터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절에서 참선한다고 앉아 있다가 병이 나는 일들은 기를 터득하지 않은 채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몸은 병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를 터득하면 자기 마음대로 기를 돌릴 수 있어 병이 나지 않습니다. 모악산에서의 21일 공부를 통해 나는 ‘내 기운이 천지기운이고 내 마음이 천지마음’이라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내 몸은 늙어가지만 내 몸을 바라보는 나는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몸과 나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몸이 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 몸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몸은 정신과 몸, 둘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늙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은 늙어갑니다. 계속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몸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마음으로써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몸에 매여 살아가게 되면 늘 초조하고 불안하지만, 마음자리를 깨닫게 되면 평안하고 평화롭습니다.

공부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내 몸으로부터 이탈되어 내 몸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내 몸을 바라보고 내 몸을 의식하게 되면 내 몸을 조종하고 지배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보이는 나와 보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몸은 내 소유물이라는 것이 정리되면서 여기서부터 공부가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몸은 자기라고 알고 살아갑니다.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알게 되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납니다. 내 몸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 되면서부터 자기 몸의 주인이 됩니다. 내 몸의 노예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사용하는 주인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내 몸을 불사를 수도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통해서 됩니다. 그리고 몸의 비위를 맞추고 살던 인생에서 내 몸을 어떤 목적을 위해서 활용할 수 있는 큰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공부를 하고 나서 이것이 옛날에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선도의 수행방법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기를 터득하면 내 몸은 자동차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몸과 나의 관계는 자동차와 주인관계입니다. 우리 감각에는 신적인 감각과 동물적인 두 가지 감각이 있습니다. 우리 몸에만 매여 살아가다 보니 동물적인 감각은 굉장히 발달되어 있으나 신적인 감각은 거의 마비되어 있습니다. 단학은 기학(氣學)입니다. 기를 터득할 때 단학의 이론이 성립이 됩니다. 기를 터득하지 못한 사람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 몸이 내가 아니라 내 것이라는 것이 이해가 잘 안 갑니다. 기를 터득하고 나면 정말로 내 몸의 주인이 나임을 알게 됩니다.

단학은 나의 운명과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내 몸은 내가 아니고 내 것이고, 내 몸은 죽어가지만 내 정신은 영원하다는 것을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소극적인 ‘나’에서 적극적인 ‘나’로 긍정적인 ‘나’로 바뀌었습니다. 보는 시야가 달라집니다. 이 몸은 어차피 죽으면 흙 속으로 들어갈 것인데 이 몸뚱이를 어떻게 사용하고 갈 것인지, 몸을 위해서 살 것인가, 아니면 큰 목적을 위해서 살다 갈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맥아더장군 일지에 보면, 일본 양색시들은 국가와 천황을 위해서 몸을 팔고, 한국 양색시들은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 양색시들에게는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목적의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육에서 비롯됩니다. 똑같이 양색시가 되었지만 목적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도둑도 아침에 밥을 먹고, 교육자도, 군인도, 대통령도 아침에 밥을 먹습니다. 그러나 그 아침밥의 의미는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