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이후 한국선도의 국학으로서의 위상이 점차 약화되어가다가 급기야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이 국학이 되면서 국학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민속·무속의 차원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후 시대변화와 함께 성리학이 국학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될 때, 사정은 다시 역전될 수 있는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데, 한국사 속에서의 유교와 한국선도의 대척적인 관계의 역사로 미루어볼 때 조선왕실이 망하고 성리학이 시의성을 상실하게 될 경우 일차적으로 선도가 자유롭게 놓여나게 되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임을 짐작해 보게 된다. 

조선말 성리학 이념이 시의성을 상실하게 되면서 기존에 성리학에 의해 이단으로 억압받아온 기층 사상이 양성화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맞아 그간 회생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피폐해졌던 한국선도가 놀라운 속도로 소생하기 시작하였다.  선도는 한국인들 스스로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의식의 심층부에 자리하고 있었고, 사상적 과도기에는 의식의 중심자리에 있던 것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즈음 선도는 1860년대에 시작된 동학(東學), 1880년대에 나온 정역(正易) 사상, 1900년대에 나온 증산도(甑山道), 1910년대에 시작된 대종교(大倧敎), 1920년대에 나온 원불교(圓佛敎) 등 다양한 형태의 민족종교의 방식으로 등장, 일세를 풍미하였다. 이렇게 근대의 선도는 민족종교의 방식으로 부활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선도는 동양사상의 시원으로서 원형성과 포용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나온 다양한 선도 사상들은 선도를 근간으로 하되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들을 끌어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결과 선도적 중심이 분명치 못한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대종교 계열은 선도의 본령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수행의 면으로 선도의 지감·조식·금촉(止感·調息·禁觸) 수행법을 정립하였으며 실천의 면으로는 ‘홍익인간·재세이화(弘益人間․在世理化)’라는 선도의 궁극적 실천 목표에 철저함으로서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무장독립투쟁을 주도할 수 있었다. 대종교는 한국인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선도 성향을 자극하였고, 1920년대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20만~30만의 대종교도를 거느릴 정도로 일대 선도의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근대 선도의 부흥은 대종교 계열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들에 의하여 조선시대 침체되었던 선도적 역사인식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대종교측의 선도적 역사인식은 대종교의 2대 교주 김헌(金憲, 초명 김교헌 金敎憲)에 의해 틀이 잡히기 시작하여,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신채호(申采鎬, 1880~1936),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유근(柳瑾, 1861~1921), 장도빈(張道斌, 1888~1963) 등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선도에 바탕한 이들의 역사인식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사학’으로 불리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종교계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선도적 역사인식’이 되살아나면서 선도는 국학 원류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곧 대종교계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선도를 ‘국학’으로 인식하는 ‘국학’ 담론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선도를 ‘국학’으로 인식하였던 대종교계 민족주의 사학자로는 신채호, 박은식, 최남선, 안확(安廓, 1886~1946) 등이 있다.

먼저 신채호는 1910년대 이후 ‘국수(國粹)’를 보전하면서 외국문화를 선별적으로 모방할 것을 강조하였는데, 국수의 중심에 단군의 선교(仙敎)를 두고  ‘단군의 仙敎는 支那(중국)의 선교와 다르며 단군의 仙敎의 침체가 國粹의 무너짐이다’고 보았다. 또한 ‘國粹’를 ‘국학(國學)’으로도 사용하고 있는데, 가령 단군시대 고유의 사상 전통을 ‘국학’으로 개념화하고 ‘국학’, ‘불학(佛學)’, '유학(儒學)’을 분명히 구분해서 사용하였다.
박은식도 ‘국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국혼(國魂)과 국백(國魄)을 대비시키면서 국혼은 쉽게 소멸하지 않는 속성을 가짐으로서 國魂을 굳건히 하면 國魄이 일어난다고 보았는데, 그 국혼의 하위개념으로 ‘국교(國敎)·국학(國學)·국어(國語)·국문(國文)·국사(國史)’를 들었다. 여기에서 선도는 ‘國敎’로 표현되고 있으며, ‘국학’의 개념은 다소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기는 하나 국교와 국학이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동시대의 최남선, 안확 등도 비록 명확하게 ‘國學’, ‘國敎’ 등의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연구의 중심에 선도를 두었는데, 최남선의 경우 ‘부루교(夫婁敎)’ 또는 ‘신도(神道)’를, 안확의 경우는 ‘종사상(倧思想)’을 설정하였다.

이처럼 대종교계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선도적 역사인식이 되살아나면서 선도는 국학 원류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단군조선 이후 점차적으로 국학의 지위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이래 다시 그 지위를 회복하기 시작한 것으로, 특히 이를 즈음하여 ‘국학’ 담론까지 등장한 점은 더욱 주목된다.  실제적으로 국학 원류로서의 위상이 회복되면서 이론적인 면에서도 선도를 국학으로 인식하는 ‘국학’ 담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선도가 국학 원류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은 일차적으로 한국 고대 이래 선도가 곧 국학 원류였던 내적인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외적으로 일본 및 중국에서의 ‘국학’ 담론의 영향도 있었다. 일본의 경우 18세기 이래 전통 신도(神道)에 바탕한 국학 담론이 등장, 일본 근대화 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의 경우도 일본 국학의 영향으로 국학 담론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영향도 있었던 것이다.

1930·40년대 무렵이 되자 급속한 일본화(서구화)의 진전과 함께 선도적 역사인식 및 국학담론이 약화되는 면모를 보였다. 당시 일본을 통해 서구사상을 접하게 된 학자들은 서구의 사회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학문방법론으로 선회,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유물주의적 역사인식을, 자유주의 계열에서는 실증주의적인 역사인식을 보였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초기 민족주의사학’은 ‘신민족주의사학(新民族主義史學)’으로 경신되었다. 

‘신민족주의사학’은 유물주의사학과 실증주의사학을 끌어안고자 하였는데, 이는 대표적인 신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鄭寅普), 안재홍(安在鴻), 문일평(文一平) 등의 역사인식에서 잘 알 수 있다. 좌·우의 유물주의사학 및 실증주의사학의 협진에 주안점이 두어지면서 ‘초기 민족주의사학’에서 강하게 드러났던 선도적 역사인식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변화가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선도를 국학 원류로 인식하는 ‘국학’ 담론 또한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는데, 이는 ‘국학’ 개념 대신 '조선학' 개념이 사용되었던 점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물론 1930년·40년대 일제의 사상탄압이 더욱 치성해가는 상황에서 '국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당시 일본과 중국에서 '국학'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일본의 식민지 한국에서는 일제의 눈치를 보느라 ’국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이, '조선학'의 내용은 앞 시기 '국학'의 내용에 비해 선도적 기준이 상대적으로 약화, 포괄적인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령 정인보의 경우 단군의 정신을 '조선얼'로 강조하면서도 조선시대 실학이나 양명학을 ‘조선학’의 실체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일평의 경우는 ‘조선심(朝鮮心)’의 중심에 조선글(훈민정음)과 실학을 두었다.

이처럼 신민족주의사학의 ‘국학’ 담론, 곧 ‘조선학’에서 선도적인 기준이 약화되면서, 조선학 담론은 학술 차원으로 축소되는 변화를 보였다. 초기 민족주의사학의 ‘국학’ 담론이 무장독립운동과 같은 실천적 차원으로 전개되었던 점과 대비된다. 요컨대 근대 한국선도가 민족종교의 방식으로 부활하면서 특히 대종교계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선도적 역사인식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였고 선도를 국학 원류로 인식하는 ‘국학’ 담론도 등장하였다. 단군조선 이래 사라져갔던 선도의 국학으로서의 위상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 민족주의사학’에서는 선도가 곧 국학으로 인식되는 등 선도적 기준이 강하였으나, 1930·40년대 ‘신민족주의사학’에 이르러서는 ‘국학’ 대신 ‘조선학’ 개념이 사용되는 등 선도적 기준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변화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