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국치 100년인 올해 한일병합조약의 불법 무효성을 밝히려는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다. 5월 10일 한일지식인 215명의 공동선언에 이어 지난 6월 10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동아시아역사시민네트워크 주최 ‘1910년 국치 100년의 역사NGOs 학술포럼’에서 법학자들도 병합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 호에 이어 이태진 서울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국학원 국민강좌 내용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무효의 이유를 살펴보자.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은 외교권을 이양하는 중대사안인 만큼 전권위임장과 비준서가 있어야 하는 정식조약으로 체결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자리까지 비워 놓고 제목이 없으며 박제순과 임권조가 위임받은 사실만 문서에 기재한 약식조약의 형식을 띠고 있다. 더군다나 박제순과 임권조의 서명이 동일하다.

물론 비준서도 발부된 적이 없다. 일본 측은 애초 국제법에 따른 형식과 절차대로 문서를 작성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외교위탁조약’이란 명칭을 본 고종황제가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강제로 모아 놓은 대신들도 완강히 저항하자 명칭 없는 협약문에 한국 외부(外部)대신의 서명을 강요했다.

이 협약은 특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통역관 마에마 교우사쿠(前間恭作)가 헌병을 대동하고 한국 외부로 들어가 외부대신 직인을 탈취해서 강제로 서명, 도장을 찍게 한 협약이다. 일본은 닷새 후인 11월 22일 자로 영어 번역문에 ‘Convention’이라는 명칭을 붙여 이 협정 체결사실을 미국과 영국 등에 알리며 협약문의 결함을 은폐했다. ‘Convention’은 일반조약이 아니다. 프랑스가 튀니지, 베트남, 캄보디아, 마다가스카르 등에 강요한 조약처럼 열강이 약소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식민지협정을 뜻한다.

당시 일본은 식민지배를 위해 외국 외교문서를 철저히 연구한 결과, 문서에 ‘Agreement’, ‘Convention’ 같은 제목을 넣어 형식을 갖추고자 했다. 국제사회에 최소 요건만 눈가림한 것이다. 이런 문서위조 상태로 한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을사조약에는 이런 문서 상 하자뿐만 아니라 절차상 하자도 있었다. ‘Convention’을 합리화하려면 일본공사가 협정하고자 하는 내용을 대한제국정부에 제출하고 의정부 회의에서 대신들이 허락 여부를 결정한 후 황제께 올려야 한다. 동시에 중추원에 자문을 타진하고 황제가 결정하는 게 순서이다. 이때 황제가 최종결정을 한 뒤 서명하고 비준서를 발부하는 절차를 거쳐야 조약이 성립되고 선포 시에 효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11월 17일부터 18일 새벽 1시 반 사이에 그런 법적 절차가 이뤄지지 않았다. 대한제국정부가 강력히 저항하였기에 회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 헌병 대장 하세가와가 지휘하는 헌병들이 둘러싼 가운데 돌아가려는 대신들을 불러놓고 한 사람씩 찬반을 물어 서명토록 했다.

고종, “을사조약을 승인한 바 없다.”

문서에 보면 이날 고종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회의주재권을 준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조사해 본 결과 그 복명서는 날조였다. 사후에 꿰어 맞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꿰어 맞추기식 서류마저 하자 투성이였다.
실제로 그때 찬성한 사람은 두 사람뿐이고 나머지는 “…… 때문에 곤란하다.” 한 것을 모두 찬성으로 돌렸다. 게다가 외부대신 박제순은 도장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헌병을 보내 외부대신 직인을 가져와 찍은 것으로 정당한 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이다. 

이때 고종황제는 강압 속에서도 이듬해 6월에 열리기로 된 만국평화회의에 일루의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을사조약체결 2개월 전에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로부터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라는 초청장을 받아 놓았다. 그래서 미국인 헐버트를 특사로 임명해 위임장을 써주고 “어전회의가 열렸다고 하나 실제는 열리지 않았으며 황제로서 승인한 바 없다.”는 내용의 친서를 함께 주었다. 그리고 9개 수교국 정상들에게도 조약이 불법임을 알렸다.

그러나 일본은 끈질긴 로비활동으로 만국평화회의를 1년 뒤로 연기해 놓고 고종황제가 노력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했다. 실제 1년 뒤에 열린 헤이그 세계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은 밀사를 참석시키려 했다. 위임을 받고서 황제의 친서를 갖고 이준 열사 일행이 대한제국 대표로 떠났으나 일본은 이미 정보망을 통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이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준 열사 일행은 일본의 저지로 회의 참석에 실패하고 회의장 밖에서 기자회견을 했을 뿐이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사사건건 반대하는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그 아들을 황제로 앉혀 손쉽게 일을 처리하려 했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