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생명, 절제와 폭발이 공존하는 조형의 시(詩), 이준호 개인전 《상처의 자리, 꽃이 피다》

갤러리508, 11월 25일 ~ 2026년 1월 21일 개최

2025-11-12     정유철 기자
산수경-11, 2010, Acrylic on canvas, Scratched, 190x190cm. 이미지 갤러리508

이준호 작가는 지난 20여 년간 자연의 형상과 시간의 흔적을 탐색하며, 칼로 긁어내는 행위를 회화의 핵심으로 삼아왔다. 초기에는 강렬한 붉은빛 산을 중심으로 한 색채 실험을 하여 주목받았고, 이후에는 회색, 청색, 흑색 등으로 확장한 다층적 색면을 통해 자연의 리듬과 내면의 질서를 탐구했다. 이제 산수화를 중심으로 조형적 탐구를 이어온 이준호 작가가 회화적 언어를 확장하여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갤러리 508이 11월 25일 개막하는 이준호 작가의 개인전 《상처의 자리, 꽃이 피다》에서 신작을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작가가 오랜 시간 탐구해 온 ‘현대 산수’의 회화적 언어를 확장하여, 처음으로 <꽃> 시리즈를 선보이는 전환점이자 새로운 시기의 서막이 된다.

산수경-23, 2015, Acrylic on canvas, Scratched, 116.8 x 91cm(50호). 이미지 갤러리508

이번 전시에서 그는 ‘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꽃’이라는 생명의 형상을 통해 조형 언어를 새롭게 펼친다. 화면을 덧칠하지 않고 수만 번의 칼질로 긁어내는 역행적 회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작가는 상처와 치유, 절제와 폭발, 생성과 소멸의 이중적 에너지를 꽃의 형태 속에 담아낸다.

Flower-7, 2024, Acrylic on canvas, Scratched, 91 x 72.8cm(30호). 이미지 갤러리508

작가에게 ‘꽃’은 장식적이거나 상징적인 대상이 아니다. 그는 “수만 번의 칼질은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얻어진 수행적 결과이자, 상처의 자리에서 피어난 생명의 은유다. 긁히고 잘려 나간 칼날의 흔적은 꽃잎의 결로 남고, 화면 위에 쌓인 단면들은 한 송이 꽃의 중심이 된다.

이준호의 회화는 덧입히는 대신 비워내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칼은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형태를 새기고 생명을 피워내는 ‘붓’이 된다. 작가가 수행적 시간 속에서 반복해 온 긁어내기의 행위는 결국 “한겨울의 차가운 칼바람을 이겨내고 봄날의 꽃봉오리를 피워낸” 존재의 기록이다.

Flower-10, 2025, Acrylic on canvas, Scratched, 72.7 x 60.5cm(20호). 이미지 갤러리508

이번 전시의 <꽃> 시리즈는 색채의 절제를 통해 오직 조형 행위의 본질만을 남긴다. 단색의 화면 위에 새겨진 칼날의 흔적은 고요하지만 강렬하며, 침묵 속에서 피어오르는 생명의 숨결을 드러낸다. 이준호의 ‘칼로 그린 꽃’은 상처와 생명, 절제와 폭발이 공존하는 조형의 시(詩)이자,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제시한다.

Flower-13, 2025, Acrylic on canvas, Scratched, 65.1 x 53cm(15호). 이미지 갤러리508

“한겨울 차가운 칼바람을 이겨내고 봄날 꽃봉오리 만개하던 날, 수만 번의 칼질도 꽃이 되었다.”(이준호, ‘작가 노트’ 2025년)

이준호 작가의 개인전《상처의 자리, 꽃이 피다》는 갤러리508(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95-3)에사 2026년 1월 21일까지 열린다.

이준호 작가의 개인전 "상처의 자리, 꽃이 피다" 포스터. 이미지 갤러리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