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인식 체계로는 포착되지 않는 사물의 구조를 그려내다, 정수진 개인전 《부도위도(不圖為圖)》

S2A, 11월 11일 ~ 2026년 1월 10일 개최

2025-11-09     정유철 기자
극미와 극대 사이의 붓질이 만든 느낌의 시공간, 2025, Oil on linen, 180x220cm. ⓒ 정수진, 이미지 S2A 제공

2025년 ‘프리즈 서울’ 솔로 부스를 통해 국제적 주목을 받은 정수진 작가 오는 11월 11일부터 2026년 1월 10일까지 서울 강남구 S2A에서 개인전 《부도위도(不圖為圖)》를 개최한다. 이 전시는 작가가 지난 수년간 이어온 회화적 탐구를 새로운 단계로 확장하는 자리로, 신작 유화 18점을 선보인다.작가가 오랜 시간 구축해 온 이론적 사유를 회화의 형식으로 본격 구현한 첫 사례다.

전시 제목 ‘부도위도(不圖為圖)’는 “그리지 않는 것을 그린다”라는 뜻이다. 정수진은 현실에서 보이는 형상을 재현하기보다 자신만의 색형(色形) 체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의식의 구조를 가시화한다. 사물의 외형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감정, 생각, 무의식, 리듬, 균형 같은 것들을 그림 안에서 연구하고 표현한다.

균일한 단절, 2025, Oil on linen, 100x100cm. ⓒ 정수진, 이미지 S2A 제공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정연심 교수는 “정수진의 회화는 현실계와 형상계, 즉 사물이 존재하는 세계와 그것을 바라보는 무수한 관점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라며 “이전의 작업들이 의식과 무의식, 선형성과 가역성에서 오는 마주침을 표현했다면, 2025년 개인전을 통해 그는 그림 그리기를 이제는 사물의 관점, 즉 인간의 의식과 인식의 체계 속에서 포섭되지 않는, 인식의 그물 밖에 있는 사물들의 관점과 구조를 드러내는 비평적, 혹은 방법론적 선언으로 제시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번 전시는 그 지점에서, 인간의 인식 체계로는 포착되지 않는 사물의 구조를 드러내며 회화를 새로운 인식의 장으로 확장하는 비평적 선언이다. 작가는 감정의 표현을 넘어, 회화를 하나의 ‘언어 체계’로 바라보는 실험적 시도를 선보인다.

극미와 극대 사이의 붓질이 만든 정물화, 2025, Oil on linen, 180x220cm. ⓒ 정수진, 이미지 S2A 제공

S2A는 이 전시를 통해, 색과 형태 중심의 이전 작업에서 회화의 구조와 관계로 나아가는 작가의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다. S2A 강희경 디렉터는 전시 서문 '기획의 글'에서  정수진 작가의 작업을 이렇게 소개한다.

정수진의 회화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출발한다.
그가 말하는 “현실계”는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세계이며, “형상계”는 그 현실을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과 차원을 뜻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이 두 세계가 맞닿고 스치는 순간, 즉 우리가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경계의 틈에서 태어난다.

그의 그림은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형태를 잃고, 사물의 리듬 속으로 흩어지는 과정에 가깝다. 반복되는 병의 형태, 겹쳐지는 이미지, 번져나가는 색채 속에서 감정은 점차 이름을 잃는다. 그러나 그 자리는 결코 차갑거나 공허하지 않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의식의 잔향, 미세한 진동이 화면 전체를 감싸며 보는 이의 내면을 흔든다.

부도위도 I, 2025, Oil on linen, 180x220cm. ⓒ 정수진, 이미지 S2A 제공

이러한 태도는 그가 말하는 ‘부도위도(不圖為圖)’ ― “그리지 않는 것을 그린다” ― 로 이어지는데, 이는 단순히 비워두는 행위나 공백의 미학이 아니다. 오히려 그릴 수 없기에 더욱 존재하는 세계,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선명한 세계에 대한 선언처럼 느껴졌다. 

정수진이 말하는 “형상계”는 감정이 잠시 머무는 장소이자, 사물과 인간의 의식이 얽혀 있는 그물망이며, 그의 화면 속 ‘감정의 시간’은 폭발처럼 터져 나오기보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서 잔잔히 드러난다. 폴 발레리가 말했듯, “예술은 감정의 순간이 아니라,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의식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빈칸 채우기, 2025, Oil on linen, 130x130cm. ⓒ 정수진, 이미지 S2A 제공

정수진의 회화는 바로 그 흔적의 세계에 머무른다. 그림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을 천천히 통과하며 자신 안의 의식을 마주하게 된다.

그의 회화는 조용히 묻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느낀다는 것은 어떤 시간 속에서 가능한가.
그 물음은 곧, 우리가 ‘본다’는 행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부도위도' 전시 모습(부분) ⓒ 이미지 S2A 제공

 

정수진(1969–) 작가는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쌈지와 두산 레지던시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파리 에스파스 루이비통, 국립타이베이현대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기관 전시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