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불암산과 검암산
[칼럼] 우대한 국학원 학술이사
2025년 새해를 맞아 서울 인근의 이름난 불암산을 등반했다. 불암산은 해발 509미터로 중간 크기 정도의 산이지만 서울 북쪽 상계, 노원지역은 물론이고 서울시민들에게 꽤 널리 알려진 곳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울과 사방 전역의 조망이 매우 아름답고 뛰어나다. 새해 초부터 불암산성을 등반한 또 다른 목적은 역사문화지 탐방이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나의 최대 관심사인 고대 문화유적지를 탐방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 새해 1월부터 불암산을 등반한 이유다.
내 고향이 불암산 근처라서 젊어서부터 전철 등 교통편을 이용할 때, 항상 멀리 눈에 들어오는 불암산이었지만 막상 실제 등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 북쪽 임진강부터 양주시를 따라 노원, 상계동, 불암산, 아차산 쪽으로 이어지는 평야 지대 사이에는 삼국시대 때 쌓은 70여 개의 성터 또는 보루(堡壘-군대 주둔지)가 곳곳에 남아있음을 알았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한강 잠실 부근 풍납토성 건너편 고구려 아차산 보루군이며 무려 20여 개의 보루가 발견되어 학계는 물론 국민의 큰 관심을 끌었다. 서울 북쪽에서 한강 잠실 방향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불암산에도 고성이 남아있다.
불암산성으로 알려진 이 고성은 불암산 정상에 있는 퇴뫼식 산성인데, 신라 시기 기와, 토기 조각 등이 발견되어 신라 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퇴뫼식이란,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것으로,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하다고 해서 발권식(鉢圈式) 산성, 시루에 흰 번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시루성,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다고 해서 머리띠식 산성이라고도 한다. 대개 규모가 작은 산성이 이에 속하며, 부여의 증산성과 청마산성, 함안의 성산산성, 김해의 분산성 등이 있다.
비단 불암산성뿐 아니라 임진강 근처 대전리 산성을 비롯하여 양주의 대모산성, 도봉산의 고구려성, 천보산 보루, 수락산 보루, 양주 불곡산 보루 등 수많은 성과 보루가 있다. 그런데 임진강 유역부터 양주시를 거쳐 의정부 서울 북쪽, 그리고 한강 근처 아차산까지 이르는 평야 지대 양 옆 산등성이에 왜 이리도 산성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일까?
우리는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 시간에 배운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한강 유역을 상대로 치열한 영토 탈환 전쟁을 벌였던 것을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초기에 백제가 먼저 지배하다가 고구려에 빼앗기고 다시 백제가 차지하였다가 최종적으로 신라가 차지하는 치열한 영토분쟁 지역이 바로 한강 유역이다.
만주와 현재 북한 쪽에 있던 고구려가 이 한강 유역을 차지할 목적으로 남하할 경우, 가장 빠르게 한강으로 접근할 수 있는 루트가 바로 임진강-양주-의정부-노원·상계-불암산-아차산 지구대이다. 백제나 신라가 북쪽으로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로 이 루트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가장 빠른 길목마다 진격로를 확보하고 대규모 군사 이동 시 군사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방어하거나 공격하기 좋은 지역 곳곳에 산성이나 보루를 설치한 것이다.
불암산성은 지금으로부터 최소 1500년 전 산성이지만 성곽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산성 부근 안내문에는 불암산을 '검암산'이라고도 불린다는 내용의 문구가 있는데, 이 안내문을 보는 순간 나는 매우 흥분되었다. 왜 불암산을 검암산이라고 했을까?
우리 조상들은 위대한 철학과 사상을 전수해 주셨다. 바로 밝음 또는 광명 사상과 천지인 정신이다. 삶의 목적이 양심과 인성을 밝게 깨우쳐서 인간을 이롭게 하고 밝은 세상을 만드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밝음을 강조하고 광명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이를 ‘불함문화론’이라고 설파하였고 많은 학자가 이를 “밝 사상”이라고 명명하였다. 인간 내면의 밝음을 추구하고 신성을 밝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목적임을 알려주기 위하여 “밝사상”이 나온 것인데, 밝음이 음차 변이 되어 “불”로 표현되었다. 한자음으로는 “불” 또는 “백”으로 표현하였다. “태백산”, “백두산”, “박산” 등은 모두 밝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수행과 천제문화를 통해서 내면의 밝음을 추구했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백의민족이라는 의미도 밝음을 추구했던 우리 고유 전통문화의 유산인 것이다.
불암산을 검암산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하려면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서 곰과 호랑이 이야기를 보아야 한다. 내면의 밝음과 신성을 밝혀 천지인 정신을 갖춘 홍익인간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 수행을 거쳐야 하는데 곰을 숭배하는 지손족인 웅족이 수행을 거쳐서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 천손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단군설화의 핵심이다.
수행을 통하여 깨달은 곰족의 여인과 그들 부족은 신인이 되어 땅의 신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래서 “검”, “곰”이라 함은 신성한 분, 신성한 곳, 신성함의 다른 표현이다. 나아가 “곰”은 “고마”라고도 변이되어 ‘땅의 신’이라는 의미로 표현되었다. 불암산을 검암산이라고 부르는 데서, 이 산을 신성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한강 유역을 비롯한 서울 인근은 지리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불암산도 한강 유역 근처에 있고 전략상으로 국가를 보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산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정상에서 보면 서울과 한강, 그리고 한강 이북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요충지였다.
명확한 유적은 아직 발견이 안 되었지만, 불암산성 정상에서 천제 등을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불암산은 나라의 밝음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산이면서 나라를 지켜주는 땅의 신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검암산이라고 했을 것이다.
“검”자는 단군의 어머니 웅녀를 상징하기도 한다. 웅녀는 깨달은 후에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는다. 이 웅녀는 후대에 가면서 신으로 모셔졌다. 특히 땅의 신, 풍요의 신으로 여겨져서 영험한 곳이나 산에 “검”자를 많이 붙였다. 천안 독립기념관과 국내 최대 국조단군상이 있는 국학원이 자리한 흑성산의 옛 지명도 “검은산”이고 백제 시기 한강 유역의 명산인 “검단산”도 “검”자가 들어간다.
“곰”이 “검”이 되었고, 한자로는 “웅(熊)”이다. 백제의 옛 수도인 공주의 다른 이름이 웅진이며 곰나루다.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의 후손들이 세웠던 나라가 백제다. 또 백제의 후손 일부가 세운 나라가 일본이다. 그래서 일본에는 “고마”라는 지명과 이름이 많이 있다. 결국 일본과 우리는 한 핏줄이다. 고구려, 신라 또한 수많은 교류와 통합을 거쳐 피가 섞였을 것이다.
서로 간 사건들도 많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일본 등은 DNA 구조상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다. 그것도 “광명사상”, “밝문화”, “천손철학”의 위대한 홍익문화를 공유한 민족들이다. 지금은 북한, 남한, 일본 등이 크게 갈라져 있지만 뿌리가 하나이다. 그래서 평화롭게 상호 협조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배우고 익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