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환 경남국학원 이사
4월 13일은 상해 임시정부수립일이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일제는 이듬해 8월 우리를 강제 병탄한다. 서방 열강에는 조선을 혼자 두고서는 더는 조선의 발전은 물론 동아시아의 평화는 없다는 구실 좋은 명분을 알리고는 20년 이상을 밤잠을 자지 않고 준비한 끝에 그들은 야욕을 채운 것이다.

한일 강제 병탄 전 임진란 때에는 백성의 반이 왜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풍전등화, 천신만고 끝에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이 나서 나라를 건졌다. 그 정도 당하였으면 조정에서는 정신을 차릴 만한데도 채 4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만주족인 후금, 즉 청에 당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겪었다. 우리의 아들 딸들이 무수히 끌려갔고 능욕을 당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청에 무릎을 꿇을 수가 없다며 마지막까지 눈을 부릅뜬 분들이 계셨으니 바로 삼학사(윤집·오달제·홍익한)이다. 특히 오달제는 조국을 버릴 수가 없는 심정을 아내인 남씨에게 시로 남겼는데 이 글이 지금 우리들의 가슴을 쥐어뜯는 듯하다.

정이 깊어 금슬도 좋았었지요(琴瑟恩情重) / 만난 지 두 해도 못되었는데(相逢未二朞) / 이제사 멀리 이별하게 되니(今成萬里別) / 백년해로 하잔 약속 헛되이 등졌구려(虛負百年期) / 길은 멀어 글 띄우기 쉽지가 않고(地闊書難寄) / 산이 높아 꿈길 역시 더디겠지요(山長夢亦遲) / 이 내 목숨은 점칠 수가 없으니(吾生未可卜) / 부디 당신 뱃속 아이를 보호해 주오(須護腹中兒).

병자호란 당시 극렬한 척화파로 공론(公論)을 주도했던 오달제는 삼전도의 치욕 후 적진에 송치되어 적장 용골대의 혹독한 심문에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고 청에 호송되어 온갖 협박과 회유에 시달렸지만,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후 우리는 또 국권을 능욕당했고 좋다 싶은 것은 다 갖다 바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라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를 그토록 겪었음에도 우리는 진정 쓸개가 빠졌었는가. 200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자기 자리만 지키려고 버둥거리다 속절없이 일제에 국권까지 내어주고 책임자들이 나 몰라라 할 때 우리는 또 의병들이 일어났다. 조국을 지키겠다는 이름 없던 리더와 민초들의 응집력, 근근이 버티어 준 국혼이 다시 일어나 독립군이 일어난 것이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봉급을 준 것도 아니었다. 나라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백성의 삶은 피폐해지자 더는 이대로는 안된다는 사명감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일제에 저항했고 가능성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싸우고 싸우며 만주로 향하였다. 풍찬노숙. 변변한 군화 없이 여름 삼베옷을 껴입고 우리는 남의 땅에서 우리 땅을 찾고자 목숨을 걸었다. 그런 각고 끝에 상해 임시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참으로 천우신조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상해 한인사회는 강력한 후원자가 됐으며 각종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1919년부터 1932년 상해를 떠날 때까지 임시정부는 많은 활동을 주관했다. 일제가 승냥이와 늑대처럼 잔인하게 우리를 할퀴고 있을 때 임시정부 수립은 큰 희망이었고 가능성이었다. 당시 우리 정부의 탄생은 조선 백성이 아직 건재하다는 천명이며 일본의 야욕을 세계에 알렸던 쾌거였다. 4월13일 임시정부의 수립은 국통을 바로 세우고 국맥을 이은 것이며 국체를 가다듬어 독립운동의 기초를 마련한 중대한 일이었다.

우리나라는 기념할 날이 많다. 역사가 깊기에 당연히 그런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수립일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며 그것은 우리가 더는 쓸개 빠진 민족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우리들의 약속이다. 이는 앞으로 우리나라의 웅비를 위한 점검활동이고 국격을 높여 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