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국학운동시민연합 최란숙 사무국장

늦가을 단풍이 어우러진 청주의 고인쇄 박물관(직지박물관)에서 충북지역의 국학활동을 지휘하는 최란숙씨(46)를 만났다. 

그녀는 공무원 아내로, 세 아이의 엄마이자 종갓집 장손며느리로 평범한 주부였다. 친정과 시댁이 모두 화목해 별 걱정 없던 그녀에게 1999년 느닷없이 유방암 3기 판정이 내려지면서 큰 시련을 겪었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가족이 걱정됐지만 다름아닌 우리나라 전통 수련법과 명상으로 극한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제 삶을 돌아보게 됐지요. 제 남은 인생은 정말 잘 쓰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그때가 인생의 전환기였다고 했다.

“전통수련과 명상이 좋아 공원에서, 교육청과 노동사무소에서 무료로 수련지도를 했지요. 특히 암 환자들이 제 소문을 듣고 많이 왔죠”라고 말하는 그녀는 건강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던 차에 국학원에서 민족혼교육을 받았다. 거기서  한겨울 만주벌판에서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한 무명용사의 사진을 보는 순간 전 온 몸에 전율을 느끼며 그분과 하나 되는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2004년에 충북 국학운동시민연합 사무국장직을 맡고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언론사, 관공서, 학교로 뛰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현재 충북지역 중학교 국사교사 대상 국학 세미나와 공무원 자치연수원, 충북도청, 교육청에 내년 상반기 국학원 교육이수 등을 계획하고, 지역케이블 TV 국학특강 섭외, 대한청소년충효단연맹의 청소년 국학캠프를 추진하면서 하루가 어찌 가는 줄 모른다.

“장영주 국학원 교육원장님 강의와 국학원 전시관을 관람을 마친 충효단 총재님이 시민단체에서 하는 활동에 감동해 국학원 민족혼 교육에 직접 참여하기로 했지요”라는 그녀는 ‘그동안 예절, 전통학습 체험만으론 한계를 느꼈는데 청소년들에게 생동감 있는 뿌리교육을 할 수 있겠다는 총재님의 말을 들었을 때 정말 가슴이 뿌듯함을 느꼈다’고 흐뭇해했다. 그녀는 모교 대학에서도 총동문회 이사로서 국학강의를 한다. 그의 열정에 학교 사무총장이 한민족 정체성 세우기 천만서명운동을 추진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조건 찾아가 동북공정과 국학교육을 해주고 서명도 받겠다고 했죠. 국학개념도 생소해서 명함 뒤에 ‘국학이란’ 설명을 써 넣어 전달해도 수없이 거절받기도 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국학을 알고 도와주시는 분이 많습니다”고 말하는 그녀는 지금의 보람을 엿보였다.

특히 일제 때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한국 역사 사서로 화랑세기를 비밀리에 필사해 세상에 알린 박창화 선생의 손자를 만났던 그녀는 그로부터 기업체와 관공서를 소개받고, 또 이어져 교육감, 학교장이나 기업체 사장 등 많은 사람을 소개받았다고 했다. “제가 끝까지 의지를 살리니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모이네요”

아픈 몸으로 돈 생기지 않는 시민운동으로 하루를 보내니 남편과 세 아이들의 불만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그녀는 “공무원으로서 수술비며 치료비, 생활비, 아이들 뒷바라지로 힘든 상황에 반대급부가 없는 내 활동에 남편은 불만이 좀 있었겠지요”하며 미안해 하면서도 “운동으로 제가 건강해졌기 때문에 지금은 남편이 가장 잘 이해해주는 협력자예요”라며 남편외조를 소개한다.

그녀는 특히 아이들에게도 “너희들이 미래에 해야 할 일을 엄마가 먼저하고 있다”고 말하며 엄마로서의 시간을 잃지 않으려 잠을 줄이며 일한다. 그녀는 “막내도 홍익인간을 실천하려는 저에게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쓰레기봉투 버리러 나가서 수다 떨지 않아서 너무 좋다’고 합니다”며 가족의 호응을 말한다. 그녀는 종종 아이를 불러내 데이트도 하고, 공원에서 손잡고 오순도순 이야기 하든가 극장에 가든가 떡볶이를 같이 사 먹는 등 나름대로 엄마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녀는 심지어 이웃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짧게나마 국학강의를 한다. “요즘은 주위에서 제가 부러움의 대상이죠. 평범한 주부가 도청, 교육청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섭외하죠. 학교에서 강의하죠, 정장입고 출근하죠, 무척 부러워한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철학을 알리고 직접 행사를 기획하고 교육을 유치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고 하는 그녀의 비전은 충청도에 국학원을 세우는 것이고 청주를 국학도시로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신화섭 희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