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땅의 주인 한국인을 닮은 수많은 장승이 우상, 미신으로 몰려 수난당했다.

왕방울만한 눈, 주먹만한 코를 지닌 장승, 질병과 악귀를 무섭게 쫓는 모습이자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는 든든한 수호신이다. 소박하고 익살스러우며 해학과 분노, 기괴와 웃음이 함께하는 이 땅의 주인공 한국인의 모습이다. 유래도 많고 장생, 후, 장성, 벅수, 법수, 당산할아버지, 수살목, 수살이, 신장, 돌미륵 등 명칭도 다양하다. 이는 장승이 그만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왔음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 전날이면 장승을 세우고 마을마다 온 마을주민이 모여 국태민안과 마을의 평화, 개개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승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성수 명예교수는 “장승은 원래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치우천왕(신시 배달국 14대 환웅)이었다. 간혹 장승에 거리를 나타내는 이수(里數)가 적혀 있다고 해서 일종의 이정표라 해석하는 일본인 학자의 해석만은 들어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 국토와 백성을 지켜 주던 치우천왕이 이정표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니 우리 역사에서 단군조선을 말살하는 것 이상으로 큰 죄악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그의 저서 <단군문화기행>에서 이야기 했다. 치우천왕의 모습은 일본인들이 귀면와(鬼面瓦)라고 왜곡한 치우와당, 도깨비 상이 새겨진 벽돌, 사찰의 사천왕상, 그리고 장승으로 전해졌다.

박 교수는 “소도 제천의 국속(國俗)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을 거쳐 고려의 팔관회로 이어졌다. 이 전통을 계승한 천신제를 통해 동민 모두가 화합하고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천신제에서는 “이 고을에 환웅이 내렸다.”는 뜻으로 장승에 금줄을 친다. 금줄은 검줄이 와전된 것으로 단군왕검 즉 ‘임검의 줄’이란 뜻이다.”라며 장승이 우리 상고시대 선도문화와 연관됨을 설명한다.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이종호 지음)을 보면 조선 말 한국에 온 외국인들은 길가에서 흔히 마주치는 장승이야말로 한국 문화의 낙후성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이교도의 생활풍습’으로 보았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토착화시키기 위해서는 장승을 ‘꼭 배제해야 할 민속신앙’으로 간주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러 왔던 오페르트는 ‘조선기행’에서 장승을 “동리(洞里)의 우상신으로 사원 또는 기도소를 대신 한다.”고 했다. 선교사 게일도 “드러난 이빨과 이글거리는 눈을 보면 무의식중에 이스라엘인들이 숭배하는 다곤, 몰록, 그모스, 발과 같은 신이나 우상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평했다.

일본 강점기 숱한 장승들이 수난을 당했으며 60년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동네 정비사업 때 당수나무와 돌무더기 철거를 하면서 많이 소실되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장승 건립을 추진하자 일부 종교인들이 완강히 반대하며 설치물을 훼손했다는 사례가 많다. 서울 상도동의 장승 없는 장승배기가 한 예이다. 종교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현대와 같이 과학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미신을 의미하는 장승을 정부에서 공인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비단 종교인뿐만 아니라 일부 식자들이 합세하기도 한다. 사물을 서양의 문화잣대로 보는 데는 익숙하고 정작 우리 전통에는 문외한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소치이기도 하다.

우상과 무속, 꼭 배제되어야 할 민속신앙으로 배척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전통문화로서 이해하고 유치하는 경향이 늘었으나 일부에서는 아직도 그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2007년 인사동 재정비 때는 88올림픽 당시 외국인에게 보여 줄 우리 문화의 상징으로 세웠던 할머니 할아버지 돌장승이 철거되었다. 샤머니즘이란 비판이 거세고 새 도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장승이 쇠락한 데는 격변하는 외세 탓도 있으나 우리 전통문화를 우리가 천시하고 우리 손으로 배척했기 때문이다. 한국장승진흥회 최해렬 회장은 “일부 종교인들은 장승을 샤머니즘의 표상이라며 행사를 가로막고 전시된 장승을 발로 차기도 했다. 관공서에 민원을 제기하여 담당관을 귀찮게 하여 민원발생으로 행사 자체를 꺼리게 하는 등 몹쓸 짓을 하기도 한다. 역사보다도 소중한 것이 자기 종교라는 것인데 종교 때문에 보편적 삶의 가치를 포기하는 것은 사회악이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최근 충남 무형문화재로 유일하게 제도권에서 체계적인 전수자로 인정받았던 서상훈 씨가 타계했다. 장승인들은 우직함으로 평생 이어온 이들이 많은데 이제는 장승이 흔하다고 장승 자체를 천시여기며 목수가 깎은 목형 정도로 취급하기도 해 생계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최 회장은 “전통문화 계승을 위해 지방자치단체에서 장승인의 활동과 경력을 평가하여 임명하는 ‘장인제도’를 마련했으면 한다. 생계지원이 된다면 더 큰 도움이 되겠으나 명예만이라도 지킬 수 있도록 제도마련이 필요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