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동양 평화를 위해 펜을 놓치 않았던 안중근 의사.

2010년은 경술국치(8월29일) 100주년이 되는 해임과 동시에 안중근 의사 서거(3월 26일) 100주년이 되는 의미심장한 해이다. 국민의 가슴속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애국지사가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일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국외에서 의병활동을 하기 전, 국내에서 교육을 통해 국민계몽 운동을 하고자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설립(1906)운영하였다. 천주교 신자였던 안 의사는 이에 앞서 10년 전인 1896년 2월 11일 한국 천주교 총괄책임자였던 뮈텔 주교를 만나 대학설립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학문이 오히려 신앙에 방해될 뿐 아니라 한국은 아직 대학교육이 시기상조”라고 거절했다.

안 의사는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 된다.”며 불어공부마저 중단하였다. 한국 천주교는 안 의사의 하얼빈의거 발생 직후 안 의사를 천주교 교적에서 빼내고 안 의사의 마지막 고해성사를 위한 신부 파견도 금지했다. 일제에 의하여 천주교 활동이 방해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으로 외래 종교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안 의사는 애국계몽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권 회복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해외 의병활동을 하던 중 혈혈단신 대한의군 참모중장 독립특파대장으로서 일본제국의 제1인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의거는 2천만 동포뿐만 아니라 수억의 중국인들까지도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초대 대통령 위안스카이(袁世凱)는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건 장부가 아니고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만방에 이름을 떨쳤소. 살아선 백 살이 없는 건데 죽어 천 년을 가오리다.” 라고 송축시를 지어 추모하였다. 체포된 안 의사는 여순감옥으로 이송 된 후 이루어진 재판과정에서도 당당한 자세로 수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안 의사는 1910년 2월 7일 중국 여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에서 의거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칙서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일본이 전쟁에 이겼을 때 한국인은 마치 우리나라가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이토가 한국을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맺었다. 그것은 일본 천황의 약속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한국인은 모두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이어 정미 7개 조약을 맺어 한국인의 불이익은 더해 갔다. 또한 고종 황제의 폐위까지 강행하였기 때문에 한국인은 이토를 원수로 삼게 되었고 그래서 내가 이토를 죽였다. 나의 이번 거사는 한국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한국의 군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사형이 언도 되었지만, 안 의사는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고 미소를 지었으며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의 상고 권고도 끝내 거절했다. 안중근 의사의 선택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민족이라는 절대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또한 사형이 구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고 전한 안 의사의 모친과 같은 절대적 나라 사랑의 국혼이 가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천만 동포에게 남긴 안 의사의 유언은 순국 전날인 1910년3월 2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에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안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동양평화론의 핵심은 한중일 삼국이 서양의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막고 부흥하기 위해서는 삼국의 독립을 돈독히 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북아시아 연합의 구성에 있다.

이는 100년 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 금융 자본의 투기적 행태를 통한 금융 식민지화 실태와 전쟁을 통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다국적 국산복합체의 검은 음모의 실체를 봤을 때 100년 후 미래를 정확히 내다본 혜안임이 틀림없다. 우리 후손들은 안 의사의 깊은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겨 통일 조국을 이루어내고 평화로운 아시아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절체 절명의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