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사
1910년 8월 29일에 공포된 일본의 한국병합은 한민족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경술국치(庚戌國恥)란 말이 생겼고 올해가 그 100년째 해이다. 이렇게 큰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100주년이란 표현이 동원되기 십상이지만 이 경우만은 이를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날은 기념이 아니라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런데 우리 한민족에게 엄청난 재앙과 치욕을 안겨준 이 사건을 놓고 반성을 하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너무 큰 사건이어서 반성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잡기가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런데 해방 후 지금까지 어떤 위기가 닥치면 한말(韓末)의 역사를 들먹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위기 앞에서 자칫 잘못하면 한말처럼 될 것이니 정신 차리자는 뜻이었다. 말 자체는 선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반성의 대상이 주로 일본이 아니라 우리로 삼아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충고나 제언은 나무랄 것이 없지만, 그것이 가해자 측을 두둔하는 결과가 된다면 곤란하다. 100년 전의 역사를 놓고 우리는 실제로 명치 일본의 화려한 성공과 대한제국의 무능과 실패를 대비하는 화두를 수없이 많이 보았다. 역사의 반성이 이런 식으로 계속 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조상을 스스로 매장하는 선을 넘어 가해자 일본 숭배의 터전을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의 마음과 뇌리에 만들어주는 꼴이 되면 난감하지 않은가?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가해자의 가해(加害) 역사에 대해 별로 파헤친 것이 없다. 일본의 정치 지도자가 ‘망언’을 터뜨리면 격분하지만 가해자의 속을 드러내는 연구는 별로 해놓은 것이 없다.

가해자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미리 우리 머리 속에 주입한 지식들에 사로잡혀 가해자를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작업을 벌이지 못했던 것이다. 경술국치 100년에 우리가 진정 반성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의 이런 모습이다. 작년에 재일교포 김문자(金文子) 여사가 『조선왕비 살해와 일본인』이란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일본제국의 대본영(大本營)이 명성황후 살해를 지시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대본영의 지시에 따라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오가 조선공사로 부임하여 8명의 정예 장교들과 함께 대원군을 동원하여 사건을 일으켰다고 한다. 왕비에게 치명적인 최초의 ‘일도(一刀)’를 가한 자도 일본군 육군소위였다. 신문기자들과 상인들로 구성된 이른바 장사(壯士, 낭인) 패는 어디까지나 진상을 가리기 위한 연막용이었다고 한다.

가해 측도 역사적 진실로서 일깨우고 바뀔 때 진정한 이웃될 수 있어

대본영은 청일전쟁에서 조선정부가 이미 가설해 놓았던 전신선을 장악하여 승리에 결정적 이점을 누렸다. 그래서 전후에 1개 대대 이상의 병력을 한반도에 주둔시켜 이를 계속 관장하고자 했지만, 왕과 왕비가 이를 절대적으로 반대하여 왕비 시해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 충격적인 보고는 우리가 그동안 가해자 일본 연구에 대해 얼마나 안이했던가를 일깨워준다.

다행히 저자가 재일교포여서 안도하지만 고종 시대에 대한 지금까지의 안이한 인식으로 이런 중대한 진실을 우리 손으로 직접 파헤치지 못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필자가 국권 피탈 관련 조약들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왜 그런 쓸데없는 연구를 하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 연구로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는 소리도 들려온다. 교토의 한 시민 모임에서 내가 일본의 기만과 강제의 실상을 들려주자 그들은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했다. 이로써 보면 가해 측도 역사적 진실로서 일깨울 때 바뀔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것마저 외면한다면 그들은 영원히 이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일본, 일본인은 거기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날의 피해국인 한국과 중국이 경제적으로 저력을 발휘하여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치 일본의 대본영은 천황이 최고사령관이다.

왕비 살해의 지시는 현역 최고 군사령관이 한 것이지만 최종적인 책임은 천황에게 돌아간다. 왕비 살해사건의 미스터리가 이렇게 풀렸다면 일본 천황은 결코 이 해를 침묵으로 보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