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애창곡 하면 누구나 주저하지 않고 ‘아리랑’을 꼽을 것이다. 그 기원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 민족은 수천 년 동안 줄기차게 '아리랑'을 불러왔다. 이 노래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장 널리 애창되는 겨레의 노래요, 일제 강점기 때는 겨레의 울분과 민족의 한을 표출하는 저항의 노래였다.

지금도 남북한이 함께 만나는 자리에도 빠지지 않는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며,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아리랑을 부를 때면 우리도 모르게 옆 사람의 손을 잡거나 어깨에 손을 걸어 하나가 된다. 그만큼 마음과 마음을 통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런데 흔히 버림받은 여인의 한 맺힌 노래라고 하는 아리랑을 수천 년 동안 부르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아리랑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깊은 뜻이 숨어있다. 28년 전 처음 단학을 보급할 때부터 필자는 아리랑의 참 의미를 알려왔다. 지금은 외국인들에게도 아리랑은 ‘나를 찾아가는 기쁨의 노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단학인이면 누구나 깨달음의 노래로 아리랑을 부른다. 아리랑은 또한 우리 민족의 얼이 영글고 영글어서 만들어진 영혼의 노래다.

겉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원망가이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민족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삶의 영원한 근원, 참나, 커다란 민족적 자아가 ‘님’으로 생각됐고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야 할 것으로 깊이 인식됐던 것이다.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동안 아리랑을 불러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라는 글자를 한자로 써 보면 ‘나’라는 뜻을 가진 ‘我(아)’이고, ‘리’는 이치를 깨닫는다 할 때의 ‘理(리)’이고, '랑'은 즐거울 ‘朗(랑)’이다. 풀어보면 ‘아리랑’은 ‘나를 깨닫는 기쁨’을 뜻한다.

이때 ‘아’는 근원적인 ‘나’를 말하며,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진짜 ‘나’를 일컫는다. 그래서 ‘아’를 깨달은 사람은 참 나를 깨달은 사람이며, 모두가 다 하나이고 형제인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 ‘나’를 알 때 큰 포용력과 자유로움과 사랑이 생겨난다.

‘아리랑 고개’는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말을 의미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이 세상의 인생 역정을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아’를 알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삶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루게 된다. 필자는 ‘아’를 아는 사람이 바로 홍익인간이며, 홍익인간은 ‘아’를 알고 이 세상의 모든 ‘아’를 널리 이롭게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나’는 ‘아’와 같은 뜻이므로 ‘나’ 버리고 가는 ‘님’은 참 나를 버리고 거짓 나를 위한 욕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십 리’는 이정표처럼 거리를 나타내는 그런 의미가 아니며, 십(十)이라는 글자는 음과 양의 만남, 참 나와 거짓 나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의미의 통합과 완성, 깨달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것은 참 나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살게 되면 인간 완성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성공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도 ‘아’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중심에 있는 영혼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영혼이 병들고 아프다는 뜻이다.

눈을 감고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천천히 아리랑을 불러보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슴이 뭉클해질 것이다.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영원하고 근원적인 어떤 것에 대한 간절함과 그리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절로 난다. 자기 자신에게 불러줄 수 있는 노래 중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가 있을까.

우리는 아리랑에서 한민족의 깨달음의 철학과 전통을 재발견해야 한다. 이제껏 버림받은 여인의 한을 노래한 정한의 노래로 보아서는 안 된다. 노래 가사에 담겨있는 ‘참 나를 깨닫는 기쁨’의 뜻을 충분히 인식하고, 끝없는 개인적, 집단적 수련을 통해 자신과 전체를 완성하고자 하는 정신이 녹아들어 갈 때, 아리랑은 진정한 민족의 노래, 나아가 인류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깨달음의 노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 국학원 설립자 www.ilch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