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국학원 김봉순 원장(앞줄 왼쪽 두번째)과 활동가 20여 명은 국학원 민족혼 교육팀과 함께 안동의 독립운동가 김락열사를 주제로 한 연극과 교육으로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안동인의 가슴을 뒤흔든 민족혼 교육이 지난 11월 8일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열렸다. 세찬 바람과 굵은 빗줄기가 내리는 가운데 오전 행사에는 김휘동 안동시장 내외, 류동춘 안동교육장, 김준식 안동문화원장, 우남국 경북공무원노조협의체 회장, 이동수 성균관 중앙청년회장, 광복회 회원을 비롯하여 안동의 각 문중 어르신과 교육생 50여 명이 참석했다.

안동은 유교를 중심으로 한 ‘정신문화의 도시’로 1894년 최초의 항일의병을 일으킨 독립운동의 발생지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 합병되자 고성이씨 종손인 석주 이상용과 처남인 김대락 등 혁신 유림의 중심 인사들은 만주로 이주해 본격적인 투쟁과 독립운동 지사를 양성한다.  고성이씨 가문은 행촌 이암, 이맥, 이유립 등 끊어질 위기의 단군역사를 지켜왔다. 유교적 이상의 구현이 바로 독립운동이고 그 뿌리에는 국혼, 단군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를 교육 속에 녹여낸 안동만의 민족혼 교육이 이루어졌다. 오후가 되면서 독립운동가 후손, 안동독립기념관 학예사 등 교육생이 갑작스레 늘어나 의자와 태극기가 모자라는 등 장소가 협소해 진행자들은 바쁘게 뛰었다.

교육 중 ‘민족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 안동의 독립운동가 김락 열사의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김락 열사는 백하 김대락의 누이이고, 나라를 잃은 슬픔에 단식하여 순국한 향산 이만도의 며느리이자, 제1차 유림의거단 이중업의 아내, 제2차 유림의거단의 동흠과 종흠의 어머니로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김락 열사는 3·1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의 고문 끝에 두 눈을 실명했다. 객석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신념을 져버리지 않는 김락 열사의 모습에 울분과 눈물이 뒤섞인 흐느낌으로 일렁였다.

이날 김락 열사의 후손은 흔쾌히 200만원을 기탁하며 민족혼 부활에 더욱  노력해달라고 했다. 김시중 선생(백하 김대락의 후손)은 “그 어디서도 받아본 적 없는 교육이다. 우리 할머니에 관한 내용을 연극으로 만들어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자신이 감사로 있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의 교사대상 연수 등과 접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교육을 이수한 한 교사는 “안동의 정신문화 수도라는 기치, 왜 안동에서 1,000명의 독립지사가 나왔는지, 민족혼 교육을 통해 의문이 해결되었다. 선도의 맥을 이어온 각 문중에서 배출한 독립지사들, 신흥무관학교, 협동학교 이 모든 것의 저변에는 국혼이 살아 있었음을 비로소 알았다.”고 했다. 이날 각 문중과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이동수 성균관 중앙청년회장의 적극적인 참여로 결실을 맺었다.  이번 교육으로 안동시에 민족혼 교육이 확산될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안동국학원 김봉순  원장은 “독립운동가 후손의 가슴을 깨우는 일은 그 집안일이 아닌, 나의 일이고 선조의 일이며 우리의 미래로 이어지는 아이들의 일이란 걸 확실히 증명하게 되었다.”고 했다. 김 원장은 2008년 4월 1만 명이 참석한 공개강연회를 시작으로 지역 유지들과 관공서에 국학원을 알리고 민족혼 교육을 기획했다. 여기에는 장영주 국학원장(대행)의 청사진이 발판이 되었다. “15년 전 국학강의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안동을 찾았던 1차 결실을 오늘에야 이루었다. 안동은 전 국토, 전 국민의 국혼 진원지”라고 장 원장은 말했다.

최순남 국학상황팀장은 “김락 열사의 자료를 모으기 위해 독립운동기념관을 발이 닳도록 다녔다.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한 분들은 잃어버린 강토를 되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정신을 찾으려 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순탄치 않았던 준비과정을 전했다. 끝으로 김봉순 원장은 민족혼 교육을 위해 함께 발을 구르고 서로 힘이 되었던 20여 명의 국학활동가에게 감사를 표했다.